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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루이지노 브루니, <<콤무니타스 이코노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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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시 : 2021-07-0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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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노 브루니, <<콤무니타스 이코노미-모두를 위한 경제는 어떻게 가능한가?>>, 북돋움COOP




< 서론 - 그래도 우리는 만나야 한다>


콤무니타스 communitas는 라틴어 communis에서 유래한 것으로 선물, 즉 무상의 나눔을 서로 실행할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생활 공동체를 말한다 그러나 콤무니타스는 인간 삶의 터전이지만 개인적 자유와 권리가 위협받는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와같은 의무와 부담으로부터의 면제를 임무니타스 immunitas라고 한다. 


진정 이것이 현재 나타나고 있는 무미건조한 삶의 현실이다. 그 근원에는 다음과 같은 거대한 환상이 있다. 즉 시장이, 혹은 관료적이고 위계적인 어떤 기업이 우리에게 고통 없고 평화로운 어떤 좋은 공동 생활을 선사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 그리고 우리가 타인과 만날 때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타인만 만나도록, 또 우리와 싸우지도 않고 우리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으면서 그저 사고 파는 거래만 하는 타인만 만나도록 미리 배치해 주리라는 환상이다. 실제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익명화된 시장에서 우리는 점점 더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와 ‘우연히 마주칠(encounter)’ 뿐이다. ... 그러나 우리가 시장에 기대하는, 아무런 상처 없는 타인과의 무해한 만남은 사실 기만이다.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주로 동료나 평소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인간관계에 대해 다차원적이고 입체적인 성찰을 시도하려고 한다. 반면에 비대칭적 권력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경제학은 인간이 지닌 관계성의 광범위한 영역 안에서 단 한 가지 관계의 형태,곧 에로스(eros)와 흡사한 관계에만 집중해왔다. 그러면서 우정에 해당하는 필리아(philia)는 소홀히 했고, 무상성이라는 특성을 뚜렷이 지니는 아가페(agape)는 전적으로 소외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경제학이 이러한 속성을 띠는 것은 아가페에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잠재적인 고통의 부담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장은 사람들이 희생 없이도 만날 수 있고, 중재를 통해 상호유익 한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자유 구역(free zone)’이라고 할 수 있기에, 문명의 승리이자 도구이다. 때때로 시장은 심지어 무상성과 동맹을 맺을 수도 있으며, 인간의 공동 생활이 보다 자유롭고 형제애 넘치도록 해줄 수도있다. 과거와 최근의 사회적 경제와 시민경제 civiI economy의 많은 경험들, 그리고 ‘모두를 위한 경제 Economy of Communion, EoC’의 많은 경험들이 그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무상성에 대해 우리가 마음을 열고, 또한 타인때문에 상처 받는 것이 무서워 도망가지 않는 한, 시장은 타인과 진정으로 만나는 장소이자 축복의 장소가 될 수 있다. 


< 1장 - 왜 우리는 개인주의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


만일 사람이 정말 이렇다면 공동 생활의 기반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 하는 자를 배반할 때는 망설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배반할 때는 덜 망설인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종의 의무감에 의해 유지되는데, 인간은 지나치게 이해 타산적이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자신이 사랑한 자를 팽개쳐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항상 효과적이다."(마키아벨리, 《군주론》)


《니코마코스 윤리학(Etica Nicomachea) 》 9장에서 언급되었듯 ‘‘행복한 사람은 친구가 필요하다.” 이것이 누구도 혼자서 행복할 수 없는 이유이자, 고독 속에 서,또 사회로부터 은둔하고 타인과의 관계 로부터 도피함으로써는 행복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만일 행복이 사회적 관계를 필요로 하면서 우정과 상호성을 요하고, 이 우정과 상호성이 개인이 온전히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유에 관련된 문제라면, 우리의 행복은 타인의 반응에 좌우된다. 타인이 우리의 사랑 우리의 우정, 그리고 상호성에 얼마나 많이 보답해 주는지에 달린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내가 행복하기 위해 친구와의 상호성이 필요하다면 그 행복한 삶이란 양가적 兩價的이고 양면적 이다. 타인은 나의 기쁨이자 고통이고 내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유일한 기회이지만, 또한 내 불행을 좌우하는 사람이기도하다. 이렇게 되면 ‘좋은 삶’이라는 축복은 타인에게 달려있고,이 타인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전근대 서구에서 공동선共同善, common good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사적 이익을 더하는 것뿐만 아니라 빼는 것도 수반한다. 누군가의 사적인 이익에 해당하는 ‘내 것’의 일부를 포기하고 위험을 감수해야만 ‘우리의 것, ‘즉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통적인 공동선을 구축할 수 있다.


“우리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은 두 가지 상반되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선 공동선이 모두의 것아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공공시설로서의 공원은 누구에게 나 속하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시민사회적 해석으로, 공동선이 ‘우리의’ 선(善)이며 그렇기에 집이나 가족과 마찬가지로 존중되고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느낌을 준다. 

비사회적인 다른 의미는 ‘우리의’ 라는 말이 ‘내 것’ 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무엇이 라는 점에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느낌을 준다. 이 경우 내 것과 우리 것 사이에 이해의 충돌이 발생한다. 2009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자신의 책에서 “나는 사람들이 그들의 시민사회의 문화를 통해 ‘공동(common)’ 이 ‘우리의 것(ours)’을 뜻한다고 이해할 때는 진보하는 반면, ‘누구에게나 속한다(belonging to everyone)’는 말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belonging to no one)’고 해석할 때는 퇴보한다고 확신한다”(Ostrom, 1990)라고 강조한 바 있다. 


친구가 많아질수록 상처 받고 상호성이 배신당할 위험이 커지기때문에 친구는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우애인 필리아는 선별적이고 배타적이다. 폴리스 polis 생활의 기반이 되는 필리아는 소수의 대등한 존재들, 다시 말해 남성, 성인成人, 자유인, 그리고 대개는 같은 민족이라는 공통점으로 결집되는 사람들 사이의 필리아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Politica)》 제 1권에서 신중하게 구체화했듯이 외국인 거류민, 농민, 상인 등은 여기에서 배제 된다.


근대 이후 사회과학은 이렇듯 새로운 중재자들의 새로운 ‘제3자성第三者性, thirdness’이 발명되는 데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개인들 사이의 극적인 만남을 피해야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근대 이후 사회과학이 어떤 식으로든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새로운 제 3자는더이상 신神이나 콤무니타스에 해당하는 제3자가 아니며, 나­너 관계 를 열고 보편화하는 제3자, 즉 에마뉴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가 말하는 섬세한 의미의 ‘그’나 ‘그녀 ’도아니댜 이 새로운 제3자는 우리의 관계 에서 의무성이 소거消去되어 상호적으로 책무를 면제해 주는, ‘즉 상처 받지 않고 서로 만날 수 있는 자유 구역을 우리에게 보장하고 약속하는 제3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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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다원적이고 자유로운 사회가 ‘공정'하려면, 그 사회의 개인들은 어딘가에 유대 관계로 얽매이지 않아야 하고 과도한 열정도 없어야 한다. 나와 너의 차이는 단순히 그 차이를 없애는 것으로 해결된다. 곧 나와 너의 차이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 계약 및 사적 계약을 맺는데, 이러한 계약들은 점점 더 정교해 짐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필요 없게 되고, 만남은 더더욱 필요 없어 지며, 단지 서로간의 무관심만이 요구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장에서의 계약의 상호성 contractual reciprocity은 상호성의 새로운 형태로서, 기존의 자유롭고 상호적인 선물에 기초를 둔 상호성을 대체하는 근본적인 것이 되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선물은 우리를 하나로 결집시키는데, 선물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중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공동의 땅, 공통의 기반을 강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계약에서는 내 것은 너의 것이 아니고 너의 것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는 사라지고, 계약은 우리 서로를 상호 면역immune 상태로, 곧 관계성이 소거된 상태로 만들어준다. 그 공동의 땅 공통의 기반은 특히 대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맺어지는 곳일 경우 갈등과 충돌, 죽음의 장소이기도 하다. 근대성은 이러한 갈등과 충돌, 고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이를 위해 그 공동의 땅 공통의 기반이 주는 삶의 결실들도 포기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근대성은 이러한 결합의 불가항 력성을 깨고 싶어 했지만 결국 해 내지 못했고, 이에 대해 너무도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이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 이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이웃들 안에서 타인(autrui)이라는 존재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각각의 타인을 이웃이라는 존재가 되게 할 가능성, 모든 제3자를 ‘2인칭적인 존재가 되게’ 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우리는 개개의 사람을 즉각적인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낯선 사람을 형제로 인식하는 법을 배우고, 보편적인 이웃 관계성의 세계에서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Jankelevitch, 같은 책 p. 798)



< 2장 - 무상성이 없는 과학, 현대 경제학>


시장 관계에 의해 우리는 타인의 호의love에 의존하지 않고도 우리의 필요need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인격도이름도 지운 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존함으로써 우리는 누구에게도 개인적으로 기대지 않으며, 잠재적으로 고통스러울 수도있는 개인적 만남도 필요없게 되었다. 우리는 익명의 다수로부터 도움을 받지만 특정인에게는 의존하지 않는다. 


‘‘문명사회에서 개인은 항상 다수의 협조와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일반적으로 평생 몇 사람과 친구로 지내기도 빠듯하다’’(《국부론》). 요약하면 스미스는 중재되지 않은 관계는 비문명적이고 봉건적이고 비대칭이며 수직적인 관계라는 이유로 시장의 중재를 중시한다. … 시장을 포함한 시민 생활에서 타인은 익명으로 만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얼굴을 맞대게 되는 타인은 나와 같은 ‘형제’가 아니라 나보다 낫거나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선물과 우정은 사적인 영역에서 중요하지만, 시장과 시민사회에서는 선물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고들 말한다.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선물은 오히려 고통과 상처라는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선물없이 더 잘 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풍요로운 경제에서 고독과 비참함이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은 무상성이 없는 사회는 살 만한 곳이 못 되고 기쁨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우리가 직장, 정치, 단체 등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무상성을 생활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적 영역에서 도 무상성을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요약하면 스미스가 생각한 상처, 그가 시장의 중재를 통해 피하고 싶었던 상처는 내가 동료들 간의 우정과 수평적 관계에서 받는 상처가 아니라 상하 관계의 비대칭적 권력, 그리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억압에서 생기는 상처였던 것이다. 그리고 더 문명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와 같은 상처 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경제학자들 중에도 상호성에 대한 이론적 관심을 새롭게 갖게된 사례들이 있다. 최근 이 주제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면서 리스크와 위험이 따르는 개인의 관계성 차원을 진지하게 회복시키고자 하는 몇 가지 새로운 시도들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연구의 대상이 된 첫 번째 이상 현상 중에는 이론적으로는 기회주의가 나타날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에서 실험 결과 협력적 태도를 보인 상호작용에 나타난 몇 몇 사례들이 있었다. 이 상호성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항상 관대하거나 인색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택적으로 행동하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실제로 이타적인 사람들에게 이타적인 행동을 보인 사람들일지라도,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주려고 한다.” 

이 방면의 연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의도의 역할에 대한 분석이다. 지금까지의 많은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실험 대상자들은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여 그들의 올바름의 정도를 판단하려고 한다. 즉 다른 사람이 실제로 한 일뿐만 아니라 할수도 있었던 일과 하지 않았던 일, 또는 활용할 수 있었던 다른 대안들까지도 살펴 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well-being)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심리학적 증거들을 보면 대부분의 이타적인 행동은 보다 복잡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도우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도움을 주어야 할 다른 이들아 지금 얼마나 관대한지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

특히 라빈의 이론은 다음 두 가지 가정을 토대로 한다. a) 사람들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을 돕기 위해 자신의 물질적 풍요를 기꺼이 희생한다. b)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공평하게 행동한 사람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 자신의 물질적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다. 


실험 결과를 보면 실험에 참가한 A의 절반 이상은 B를 신뢰하여 B에게 돈을 주는 쪽을 선택하고, 많은 경우 B는 총금액의 일부인 X만큼을 A에게 돌려 준다는 것이다. B는 A가 자신의 비용을 지불하면서 준 신뢰나 친절에 보상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A에 대한 보상이나 처벌 은 그 사람이 친절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웠는지, 혹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B의 믿음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 접근방법에서는 의도가 중요하다


최후통첩 게임에서는 내가 보기에 불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상대는 아무것도받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를 처벌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러려면 상대가 나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던 얼마간의 그 작은 금액을 포기해야 하는 만큼, 나도 대가를 치른다. 마찬가지로 신뢰게임에서 내가 상대에게 보상하고자 할 때는, 상호성의 기준에 따라 긍정적으로 응답함으로써, 내가 가질 수 있는 더 큰 이익을 포기하면서 상대의 신뢰에 보상하게 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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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충분히 B를 신뢰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B를 신뢰하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B가 안다는 것만으로도 A의 선물이 B에게는 단순히 공짜로 받는 복지주의에서 벗어나 관계를 맺는 상호성의 의미 로 승화된다는 것이다. 신뢰는 위험이 수반되고 비용이 들 수도 있지만, 이를 받은 사람으로 하여 금 그 가치에 맞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하고, 기회주의를 크게 줄이고, 성장을 현저하게 촉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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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정 무역, ‘모두를 위한 경제 EoC’, 그리고 2006년 노벨 평화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의 그라민 은행 Grameen Bank의 비결은 바로 친밀한 이웃 관계에 있다고 확신한다. 유누스와 그라민 은행이 노벨 경제학상이 아니라 평화상을 받은 것은 ‘발전이 평화의 새로운 이름'임을 보여준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돕겠다는 의도를 알리고 남을 돕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짊어지는 것이다. 관계를 생각하는 친밀한 이웃 관계가 없는 원조는 여러 좋은 의도로 하는 것일지라도 의존성과 복지주의의 덫을 강화할 수 있다


동시에 이 게임들은 여전히 유념해야 할 한계를 지니고 있다 첫째, 모든 상호작용은 돈으로 중개된다 보상과 손실은 금전적이며, 이는 상호성을 다루기에는 다소 미숙한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돈을 보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더 쉽게 수용한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선택이 물질적인 구성 요소 이외의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경우, 우리는 간접적으로 화폐적 요소가 사람들의 선택에서 중요시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A가 B에게 하는 제안이 위험한 것이 맞다면, 이는 보증이나 강제 집행력은 없는 계약상의 제안으로도 볼 수 있다. 사실상 B가 A의 제안을 수락하고 공정하게 대응한다면 A 또한 자신의 초기 상황에 비해 이익을 얻는다. 다시 말해 이때 위험은 B를 향해 A가 무상성의 동기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고전적인 기업 리스크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 담론의 중심인 이 지점을 검토하기 위해 나는 두 동료와 함께 B에게 무언가를 주는 A의 선택이 의심의 여지 없이 순전히 무상 행위로 해석될 수 있도록 고안된 실험을 실시하여, 그 결과를 자기 이익을 따라가는 계약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표준 신뢰 게임 결과와 비교했다(Luca Stanca et al, 2009) 결과는 A가 B를 향해 순수한 관대함(generosity)으로 동기 부여가 되었다는 것을 B가 알 때, A의 제안과 B의 반응 간의 상관 관계가 훨씬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타인의 관대한 행동의 동기가 무상성과 자신의 본질적인 가치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그에 더 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Frey(2005)와 Deci and Ryan(2001)의 연구에서는 자발적으로 해왔던 일을 계약에 의해 돈으로 보상받는 순간 무상성이 감소한다는 동기의 '구축(crowding-out)' 효과를 보고한 바 있다. 우리의 자료는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동기의 구축 효과 이상으로, 그것이 도구적이든 무상성에 의한 것이든 타인의 동기와 나의 행동 사이에도 구축 효과가 있음을 보여준다. 타인의 행위 동기가 내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에 대한 상호성은 더 증가한다.



<이후>


기업의 책임에 대한 시민적 개념이 있어야 시장과 사회를 분리해서 보지 않고 통합할 수 있으며, 공정무역에서처럼 우리가 일하고 생산하며 소비하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 윤리적 금융과 소액 대출처럼 저축할 때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살과 뼈를 가진 구체적 인간인 타인이 지닌 신비와 어둠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가능할 것이다. 


무상성gratuitousness은 아마도 인간관계의 양가적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내가 남에게 선사한 무상성이든 남에게서 받은 무상성이든, 무상성의 행위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 그리고 무상성에 대한 배신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경우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상성을 어떻게 가늠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무상성에는 금전적 가치를 매길 수 없다. … 무상성이 내포하고 있는 신비를 밝히려고 하지 않고, 무상성의 개념을 정의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아마 오히려 나을 것이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는 형태는 다르지만 다 사랑이다. 다만 에로스와 필리아는 아가페에 영감을 받아 열리지 않으면 자기 안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에 굴할 수도있다. 그와 동시에 아가페라는 선물은 에로스의 열정과 욕망, 그리고 필리아의 자유를 가져야 지속적이고 완전한 인간애가 된다.


나는 아가페를 순전한 무조건성(pure unconditionality)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왜나하면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는 순전히 조건적인 계약이 무조건적 선물보다 더 아가페적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액 대출사업(micro credit)의 많은 경우가 이러한 사례이다. 


공공재 혹은 공유지는 개인들과 소비된 재화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이다. 반면에 재화를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존재하더라도, 적어도 간접적인 관계이다. 공동선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공동선은 사람들 간의 직접적인 관계이며, 이 관계는 재화들을 공동으로 함께 사용하는 것을 통해 중재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선은 인격주의적 personalistic이고 관계적인 relational 범주이다. 반면 공공재의 경제적 개념은 개인주의적 individualistic이고 물질주의적 materialistic이ek. 다시 말하면 사람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물질을 중심에 둔 개념이다. 


아가페를 자선사업가나 국가에 맡길 경우 그런 해결책에는 아가페의 두가지 근본적인 요소가 통상 결여되기 마련이다. 첫 번째 간과한 요소는 긴밀한 이웃 관계neighborliness 인데 사마리아인의 딜레 마와 관련하여 일찍이 언급했던 문제를 초래한다. 두번째 빠진 요소는 상호성이다. 사실 아가페는 ‘무조건적 상호성’이라고 정의 내릴 수도있다. 공동체주의에서는 아가페의 구심력과 예지적 목소리가 없는 공동체는 각 개인의 개인주의가 단지 집단이기주의로 대체되는 일종의 ‘거대한 나gigantic I’로 전환될 수 있으며, 그러한 경우가 자주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계약은 우정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말 것. 그리고 우정은 아가페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말 것”


아가페의 존재는 에로스 사랑과 필리아 사랑을 시작하게 하고 향상시킨다. 경제와 시민 영역에서 무상성이 존재할 때라야 비로소 계약이 자유와 평등의 도구가 되고 우정이 형제애로 꽃필 수 있다. 아가페, 즉 무상성은 누룩이나 소금과 같다. 이것이 없다면 모든 것은 맛을 잃게 된다. 무상성 속에서 시민 생활은 확실히 더욱 즐겁고 생산적이다. 그러나 시민적 · 경제적 생활은 상처에 노출된 다는 것을 인정해 야만 한다. 경험할 수 있는 큰 축복은 대가가 따른다. 충분한 인간관계를 경험하기 위하여 시민이 동료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천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강력하면서도상당히 고통스러운 관계 를 감안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무상성의 대가이자 가치이다.


근대성이 망각한 세 번째 원칙이 있다. 바로 형제애 fraternity이다. 근대 경제학이 상정하는 시장에 의해 약속된 자유와 평등은 형제애를 희생시켰다. 왜냐하면 자유와 평등의 성취는 공공 영역에서 형제적 관계를 얼마나 소거시켜 냈는가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은 관계성이 소거된 사회, 즉 임무니타스의 경험에만 그칠 수 있고, 또 실제로 역사적으로도 자주 그래왔다. 그러나그것은 진정한 형 제애의 경험에는 이르지 못했다. 바로 형제애가 항상 기쁨과 슬픔, 그리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제애가 없다면 삶은 풍요로워 질 수 없고, 행복도, 완전한 사람됨full humanness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바로 여기에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집 필하게 되었다.


형제애를 연대(solidarity)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연대는 관계성이 소거된 임무니타스의 경험 안에서도 잘 유지될 수 있다. 연대는 타인 때문에 생기는 상처를 항상 수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제애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이미 분명한 점은, 자본주의적 시장에 대한 커다란 유토피아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만남 곧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모든 만남을 배제함으로써 우리 마음에 드는 타인들만을 만날 수 있게 될 경제와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이른다는 것이다.  - 아! 비선택성이야말로 수 세기에 걸쳐 민주주의와 인 권의 핵심이었는데도 말이다.


즉 서로 다른 공동체는 첫 마디 말을 주고받듯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만나거나 재회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에사우와의 만남을 준비 하는 이야기는 선물dona과 용서lper-dono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 주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이야기 들 중 하나라고 하겠다. 야곱은 에사우에게 용서의 선물, 은사를 청하기 위해 선물을 보냈던것이다. 모든 진정한 용서는 결코 일방적이 아니며 언제나 선물들의 만남이다. 


우리는 끝없이 소송을 걸고 재판에서 수천 번 이길 수도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화해는 우리가 ‘함께 울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누구든지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면, 특히 가족에게나 친지에게 그런 피해를 입은 경우라면, 다른 어떤 처벌이나 배상금보다도 고통이 훨씬 더 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화해 뿐이다. 서로 얼싸안는 것뿐이다. ‘함께 우는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고통과 배상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기에 상처는 봉합되지 못한 채 남고 계속 피가 흘러나올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임을 당했을 때, 심각한 불의를 겪었을 때, 혹은 터무니없는 중상과 모략을 당했을 때, 또는 우리 자신이 받을 축복을 누군가 훔쳐 갔을 때 우리가 홀리는 많은 눈물은 우리가 눈물 홀리게 한 당사자를 끌어안으면서 그의 눈물과 우리의 눈물을 섞을 때에야 비로소 마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것이 온통 매우 어렵다는 것도알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이상으로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은,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한다면 이것 외에 다른 진정한 길은 없다는 점이다. 형사소송 절차와 민사소송 절차는 이렇게 서로 끌어안는 것이 가능해지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해 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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