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념이 아닌 물질적 구축으로서의 코뮤니즘 - 안토니오 네그리와의 대담>, <<안토니오 네그리와의 대담>> 중 발췌
맑스는 장치 내부에서 발명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장치 자체를 혁명적인 것으로 만들지요. 무슨 말이냐면, 현실은 독해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은 주어진 실체가 아닙니다. 자본은 실체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자본은 늘 우리가 그 속에 있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의 내부에 있습니다. 자본의 외부란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 안에 있으며, 자본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자본가들이 우리에 맞서 싸우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요.
공동체들로부터 돈을 빼앗아 은행들에, 즉 해를 당한 당사자들이자 위기를 초래한 당사자들에게 넣어줄 가능성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실로 곤란에 처했을 것입니다. 이 가능성은 실제로 실현됐지요. 모든 위기에는 고전적인 작동 방식이 있습니다. 자본가들을 구해내려고 자본주의적 착취 메커니즘을 구해내려고 부를, 사회적 부를 모아 자본가들의 손에 쥐어주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산업자본가는 이제 없습니다. 지금 존재하는 사람들은 모두 은행에서 금융의 흐름을 주무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맑스와 그 이전의 혁혁한 경제학자들이 정의했던 의미에서의 이윤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엔 지대[임대료]만이 존재하지요. 토지 임대료, 부동산 임대료, 즉 화폐만이, 화폐의 축적만이 존재합니다. 금융자본이 착취가 조직되는 중심이 됐습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게 마련인 것은 명백합니다.
착취를 측정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화폐의 양을 측정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폐를 통해 이 착취된 부를 자본가들 사이에서 옮기고 사회화하고 공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발단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지요. 이제 더 이상 공장 안의 평의회가 겨울궁전이 아닙니다. 은행들 안의 평의회가 겨울궁전이지요. 자본가들로부터 화폐를 뺏을 필요가 있습니다. 화폐는 이차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과 삶에 방향을 부여하는 데, 삶-형태를 지배하는 데 근본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착취는 삶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착취는 공장하고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삶과도 연관되며 정치적 방식으로 조직됩니다. 이 말은 곧 착취가 화폐를 통해 조직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측정하는 것은 화폐입니다. 오늘날 코뮤니즘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조건 위에서 입니다.
오늘날 문제는 가격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거치는 문제이며, 가치에서 분배로 나아가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분배는 근본적으로 금융적 요소입니다. 따라서 금융의 수준에서, 그리고 지대의 수준에서 일이 진행됩니다. 오늘날에는 지대, 즉 금융 지대, 부동산 지대 등에 대항하는 투쟁이 코뮤니즘적 정치 투쟁의 핵심입니다. 화폐를 가질 수도 있고 갖지 않을 수도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생각은 어리석은 이데올로기입니다. 화폐없는 사회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문제는 화폐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화폐를 정의(正義)에 맡기는 것입니다.
코뮤니즘은 구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화폐를 재전유하는 것입니다. 화폐를 민주화하는 것! 은행을 민주화하는 것! 앞서 말한 것처럼 은행을 통제할 힘을 쥐는 것! 겨울궁전, 즉 권력의 중심은 은행, 세계은행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이외에 다른 조그만 길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화폐라는 형태의 공통적인 것이 존재하며, 오바마 정부가 미친듯이 은행을 방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것이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맑스는 장치 내부에서 발명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장치 자체를 혁명적인 것으로 만들지요. 무슨 말이냐면, 현실은 독해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은 주어진 실체가 아닙니다. 자본은 실체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자본은 늘 우리가 그 속에 있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의 내부에 있습니다. 자본의 외부란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 안에 있으며, 자본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자본가들이 우리에 맞서 싸우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요.
공동체들로부터 돈을 빼앗아 은행들에, 즉 해를 당한 당사자들이자 위기를 초래한 당사자들에게 넣어줄 가능성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실로 곤란에 처했을 것입니다. 이 가능성은 실제로 실현됐지요. 모든 위기에는 고전적인 작동 방식이 있습니다. 자본가들을 구해내려고 자본주의적 착취 메커니즘을 구해내려고 부를, 사회적 부를 모아 자본가들의 손에 쥐어주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산업자본가는 이제 없습니다. 지금 존재하는 사람들은 모두 은행에서 금융의 흐름을 주무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맑스와 그 이전의 혁혁한 경제학자들이 정의했던 의미에서의 이윤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엔 지대[임대료]만이 존재하지요. 토지 임대료, 부동산 임대료, 즉 화폐만이, 화폐의 축적만이 존재합니다. 금융자본이 착취가 조직되는 중심이 됐습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게 마련인 것은 명백합니다.
착취를 측정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화폐의 양을 측정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폐를 통해 이 착취된 부를 자본가들 사이에서 옮기고 사회화하고 공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발단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지요. 이제 더 이상 공장 안의 평의회가 겨울궁전이 아닙니다. 은행들 안의 평의회가 겨울궁전이지요. 자본가들로부터 화폐를 뺏을 필요가 있습니다. 화폐는 이차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과 삶에 방향을 부여하는 데, 삶-형태를 지배하는 데 근본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착취는 삶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착취는 공장하고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삶과도 연관되며 정치적 방식으로 조직됩니다. 이 말은 곧 착취가 화폐를 통해 조직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측정하는 것은 화폐입니다. 오늘날 코뮤니즘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조건 위에서 입니다.
오늘날 문제는 가격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거치는 문제이며, 가치에서 분배로 나아가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분배는 근본적으로 금융적 요소입니다. 따라서 금융의 수준에서, 그리고 지대의 수준에서 일이 진행됩니다. 오늘날에는 지대, 즉 금융 지대, 부동산 지대 등에 대항하는 투쟁이 코뮤니즘적 정치 투쟁의 핵심입니다. 화폐를 가질 수도 있고 갖지 않을 수도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 생각은 어리석은 이데올로기입니다. 화폐없는 사회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문제는 화폐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화폐를 정의(正義)에 맡기는 것입니다.
코뮤니즘은 구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화폐를 재전유하는 것입니다. 화폐를 민주화하는 것! 은행을 민주화하는 것! 앞서 말한 것처럼 은행을 통제할 힘을 쥐는 것! 겨울궁전, 즉 권력의 중심은 은행, 세계은행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이외에 다른 조그만 길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화폐라는 형태의 공통적인 것이 존재하며, 오바마 정부가 미친듯이 은행을 방어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것이 권력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