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2025.11.] 단단담담: (2) 엄마하고 나하고

빈고게시판

안녕하세요, 최곰입니다.
강릉은 물이 귀했던 여름을 지나 10월 내내 기록적으로 이어진 비 때문에 다들 무척 힘든 가을을 시작했어요. 잎이 물들기도 전에 비를 흠씬 맞아서 이러다 올해는 단풍도 못 보겠구나 싶어 서운한 마음이 들 때쯤, 하늘이 보이고 바다가 짙은 색을 띄기 시작했답니다. 놓치기 싫은 날씨에도 발걸음을 돌려 지난한 일들을 마무리하러 책상 앞에 앉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아요. 펀딩한 책을 기다리면서, 또 11월에 빈고 식구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을 정리하면서 그렇게 한해의 알곡을 추수하듯 오늘의 가을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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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통영의 딸입니다. 사실 충무시이던 시절에 태어났지만요. 아, 물론 국민학교를 다녔고요. 1학년 때는 2부제 수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시절을 대략 짐작 하시겠지요.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서울 시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서울을 떠나오기 전까지 거의 20년 동안 저는 여전히 ‘통영 아이’였습니다. 재미난 것은 이젠 강릉 시민인데 여기서는 한동안 ‘서울 사람’으로 통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제가 진정한 강릉 사람이 되려면 부러 모험을 떠나야 할 판이에요.

시덥잖은 농담은 그만두고. 칠순(+a)의 엄마와 지난 추석에 조금 색다른 여행을 떠났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큰 부족함 없던 엄마가 아주 너무 많이 가난한 아빠를 만나 속성으로 고생을 마스터한 것을 보다 못한 외삼촌이 준 돈으로 얻은 셋집. 바로 그 집에서부터 시작한 여행이었습니다.

저는 모르는 집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었어요. 시가에 살다가 분가해 나왔다는 이야기야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었지만 그 위치나 세세한 이야기는 이날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외삼촌이 찾아 왔어. 집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골목길에서 한참 서성였나 봐. 내가 대문 틈으로 보이면 부를려고. 집앞을 그렇게 며칠 왔다갔다. 나중에 옆방 언니가 그러데. 며칠 됐다고 했어. 외삼촌이 그런 사람이었어. 인정이 있었지. 나한테 의리가 있었어. 내가 처녀 때 외삼촌 와이셔츠를 정성스럽게 다려 바쳤거든. 외삼촌이 아주 그런 게 예민한 사람이었어. 엄마도 못하게 하고. 자기 셔츠를 나만 다리게 했어.”

엄마는 이사를 할 수 있어서 정말 많이 기뻤다고 했습니다. 그 집에서 저를 가졌다고 해요. 그렇지만 세들어 살던 2층은 계단이 가파르고 방이 작아서, 나를 낳을 준비를 하기 위해 다시 이사를 했다는 근처 다음 집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왜 엄마한테 용돈을 한 번 쥐어줄 생각을 못했을까. 엄마가 나 시집 보내고 힘들었을 텐데. 너는 그런 걸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엄마한테 어렸을 때부터 했는데. 나는 왜 한번도 못 그랬을까.”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외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외가의 유전자가 아주 강력해서 외할머니 사진 속에는 큰이모부터 막내이모까지, 또 이모들의 딸인 사촌들과 저의 얼굴까지 다 있기 때문에 생전에 한번도 뵌 적 없지만 아주 낯선 얼굴은 아닙니다. 나를 보면서 엄마가 외할머니를 떠올린 날이 많았겠다는 생각이, 문득 그렇게 스쳤습니다.

이 집이야, 이 집. 너 낳은 집.

기웃거리는 엄마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임신한 몸으로 집을 보러다녔을 새댁이 겹쳐 보이기도 하고. 엄마는 꽤 상기되어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고 저는 틈틈이 녹음 버튼을 눌러 엄마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담으려 했습니다.

“이 집은 너 낳고 한참 살았지. 대문을 지나 또 골목 샛길 지나듯 꺾어가야 우리 사는 문이 나오는 집이라서 밥을 해먹고 씻고 하는 것도 많이 불편했어. 그래도 조금 넓어지고 1층이라 너를 키우기가 좋았지. 여기서 너 돌잔치도 했잖아. 이 좁은 집에 친적들을 가득 불러놓으니 음식 차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어. 그래도 기뻤지. 너를 낳아 키우는 동안 엄마는 참 기뻤어. 너가 기쁨이었어.”

엄마가 저렇게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한 달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때 엄마가 받은 충격으로 제가 거꾸로 앉게 되어 결국 엄마는 제왕절개를 통해 저를 출산했어요. 엄마는 엄마를 잃고 엄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머물던 시절의 집 앞에 엄마와 제가 와 있었습니다.

엄마가 꽤 오래, 그 집에서 살았던 일을 떠올리는 것 같았어요. 엄마가 대문 안을 보는 동안 저는 담 너머로 목을 빼고 엄마가 말한 집의 구조가 남아 있는지를 살펴 봤습니다. 집을 새로 칠하고 몇 번 보수도 거친 것처럼 보였지만 구조가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곁채에 드나들기 불편한 집이 어쩌면 엄마가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방어막이 되어 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는 그집에서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는지 만감이 스치는 얼굴로 한참을 그 집 이쪽저쪽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았습니다.

“오죽하면 주인집 할머니가 ‘OO이 데리고 나와서 마당에 있거라. 밖에 나와서 볕을 쬐거라. 그게 여자 몸에 좋다’ 그랬을까. 그 할매는 돌아가셨겠지. 오래 전에. 마음이 좋은 할매였는데.”

그런 이웃들이 새댁의 고된 살림살이를 가만 들여다 봐 주셨겠지요.

첫 집에 이어 이 집 역시 제 기억에는 없는 집이지만, 여태까지 살면서 몰랐던 이야기를 새롭게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네. 이건 이 집에서 했다던 저의 돌잔치 사진이구요.

드디어 제 기억의 첫 집.그때는 초록색 대문이었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빈 집이거나, 누가 있더라도 늘 사는 집이 아닌 집이거나, 평소에도 인기척이 영 없거나 하는가 봐요.
좀 의외였던 건, 엄마는 의외로 이 집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저는 사실 이 집에서의 기억이 가장 많은데, 엄마는 이 시기가 가장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던가 봐요. 기억에서 지워버린 한 시절이 아닐까. 짐작만 해 보았습니다.

“집주인이 본채에 살았지. 우리는 여기 맞은 편에 있고. 처마 밑에 쭉 마루를 새로 해놓고 세를 들인 거라. 걸어다니는 너를 마루에 내려놓으면, 애기가 똥오줌을 못 가려 마루에 저지레를 할까 봐 항시 불안해 하던 여자였어. 그때는 너가 기저귀를 할 때도 아니었는데. 나는 너한테 눈치하는 게 싫어서, 그 여자가 너를 눈치하는 게 싫어서 늘 데리고 들어와 방에 있었지. 늬 아부지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너를 책을 많이 읽어 줬어. 너가 자꾸 읽어달라고 해. 그래서 엄마 아빠가 돌아가면서 읽었지.”

여전히 방 안에만 있던 엄마에게 어느 날 누가 찾아왔는데, 계몽사 전집을 판매하는 분이었대요. 전질이 60권인데 가난한 엄마는 30권만 샀다고 합니다. 눈치 없는 아이가 자꾸만 책을 빨리 읽어버려서 엄마는 책을 숨겨놓고 몇 권씩만 꺼내주었다고요.

그랬던 아이가 커서 이제 방에서 나와 초록 대문을 나서고 유치원을 다니면서 친구가 생겼습니다. 친구가 집에 놀러온 날이 기억납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집에 간다고 할 때 제가 이걸 준다고 했거든요. 울면서.

제가 사랑해 마지 않던 일일공부. 아이템풀과 양대산맥이었죠.
하지만 친구는 일일공부보다 더 좋은 동생이 집에 있어서 그랬는지, 친구가 간다고 서러워 우는 저를 놓고 집으로 가버렸어요. 기억이 맞다면 그게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 본 소중한 것을 잃은 상실감이었을 겁니다.

초록색에서 회색으로 바뀌어버린 대문처럼 기억도 많이 바래져서 이게 정말 맞는 기억인지 날조된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그 집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제가 먼저 엄마를 이끌었던 것이 엄마에게도 꽤 놀라운 일이었나 봐요.

“너가 이 집을 기억했구나. 그래. 우리가 이 집에서도 살았지. 길지는 않았어. 그리고 아파트로 이사를 했으니까.”

엄마 손을 잡고 골목골목을 걸으면서 여기는 뭐였고 저기는 뭐였다는 설명을 듣는데, 문득 이 시간이 정말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내려오면 나타나는 익숙한 가게 앞에 이르기 전까지 엄마는 기억 속 많은 것들을 캐캐 묵은 먼지 속에서 끄집어 내어 저에게 건넸어요. 저도 슥슥 문대어 닦고는 주섬주섬 추억 서랍에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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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사 꿀빵 가게 앞에 도착을 했습니다. 문을 빼꼼 여는 엄마를 보고 낯익은 사람이 달려 나와요. 아마 원래 사장님의 큰 따님일 지금 사장님이 제 기억속의 그 사장님과 비슷한 나이가 되신 것 같습니다. 통영에 꿀빵이 많고 많지만 이 집이 가장 오래된, 말 그대로 원조인 집이에요. PPL은 아닙니다.
엄마는 당 조절 때문에 엄격한 식단을 지켜 하시는데 오랜만에 딸과 함께 옛집을 방문한 기념으로 한 팩을 덥썩 샀습니다. 한두 개 정도는 추억값이라 생각하고 맛있게 먹고 대신 나하고 좀 더 걷자고 엄마를 꼬드긴 딸의 말에 홀라당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손을 꼭 잡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지금은 길이 되어버린, 외가가 있던 주소지.
엄마는 요즘 외할머니가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해요. 혼자서도 곧잘 그 길가에 가서 할머니에게 말을 걸고 온다고 합니다.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외삼촌이 사시다가 외삼촌이 돌아가신 뒤 남은 가족이 그 집을 팔고 이곳을 떠났고, 시간이 좀 지난 후 그 집을 시에서 매입해 큰 길을 냈는데 엄마는 그 집이 없어진 것이 참 많이 서운하고 속상했을 것 같습니다. 엄마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엄마를 잃고 지금 70세가 넘었는데 여전히 아이처럼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저도 엄마의 딸이니까, 엄마와 걸었던 이 길을 걸으면서 언젠가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겠지요. 되도록 그날이 천천히 오기를, 외할머니께 빌어보았습니다.

외가가 있던 동네는 바다 바로 앞의 항구 가까운 곳이어서 한때는 가장 번화했던 중심이었다가 지금은 여느 지방 도시의 구도심과 다르지 않은 색채를 갖고 있는 곳입니다. 사람만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집도 땅도 시간도 추억도 조금씩 바래져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강릉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의 현재를 존중하고 더 많이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멀다는 핑계 대지 말고 엄마하고 함께 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겠습니다. 남는 시간에 할 일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해야 할, 1순위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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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주 치밀한 계획을 갖고 시작한 여행은 아니어서 제대로 된 사진도 없고 잘 쓰여진 글도 아닌 것 같은데요. 다만, 시작은 서먹하고 끝은 울컥했던 이 여행 이야기를 조금 들려 드리고 싶었어요. 아직 이날의 마음과 기분이 명료한 말로 정리가 잘 안 되지만 말입니다. 어쩌면 영영 정리를 못하고 두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하는 막무가내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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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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