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2026.03.] 단단담담: (5) 길 위의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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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빈고 가족 여러분.
봄이 올 듯 해도 한참 춥다는 어마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네요. 이 겨울을 감기 안 걸리고 무사히 나나 했더니 막바지 꽃샘추위에 덜컥 앓아눕고 말았습니다. 면역력이라든지 염증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실체가 정말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중요한 시기마다 꼭 며칠씩 주저 앉혀야지만 직성이 풀리나 봐요. 그래도 전 뜨뜻한 방에서 땀 흘리며 감기기운 떨친다고 꽁꽁 싸매고 있지만 아직 쌀쌀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길 위에서 어떤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의 이불 속 상황은 호강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을까 곰곰 생각하다가 3월의 단단담담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그는 지난 2009년부터 꾸준히 장애인, 퀴어 등 다양한 한국사회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무대를 선보여 온 연극인입니다. 특히 2022년부터는 극단을 창단해 장애인, 비장애인 연극인이 함께 만드는 연극을 제작하고 있는데요. 작년이네요, 벌써. 2025년 9월 10일 서울연극협회 정회원 입회 면접 자리에서 그가 면접위원의 장애인과 장애 예술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와 발언에 모욕을 당한 일이 발생해요.

그가 정회원의 자격 검증을 위한 증빙자료로 제출한 공연포스터와 리플렛을 살펴본 면접위원1이 ‘리플렛에 있는 사람들이 연극인이 아닌 것 같다’는 식의 질문을 한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어요. 배우 중 한 명은 장애인 단체 활동가(비전문예술인)이고 대부분이 전문예술인이라고요. 그러자 면접위원1은 전문예술인이 아니라 전문 연극인이어야 한다고 발언을 하지요. 전문 배우라는 증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예술활동증명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이 증명을 완료하면 각 지역 및 광역문화재단의 전문예술지원사업을 통해 전문예술가 혹은 단체로서 활동할 기회가 생깁니다. 그러나 면접위원1은 예술활동증명으로는 증빙이 안 된다는 답변을 해요.

그가 다시 질문을 합니다. 예술활동증명으로 연극인이라고 인정을 받았는데도 전문 연극인이라는 증빙이 안 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전문 연극인이라는 증빙을 하라는 것인지를요. 면접위원1은 연극을 업으로 하고 꾸준히 활동해야 한다는 애매한 답변과 함께 해당 공연장이 장애인 공연만 올리는 곳(사실이 아님)이라 전문 예술 공연이 올라가는 공간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그의 극단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어떤 작품을 올리는지도 알고 그 활동에 대해 좋은 취지의 사업이라 생각한다며, 그러나 그것은 전문연극인의 공연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서울연극협회 정회원이 되려면 이 작품들 말고 다른 전문 극단의 공연에 배우로 참여한 이력을 내야 하냐고 물었더니 면접위원1은 그게 좋은 방법이라고, 협회가 인정할 수 있는 연극 4개를 올린 후 정단체 신청을 하시고 좋은 일,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시면 된다는 답변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야기하지요. 서울연극협회와 한국연극협회에 장애인극단은 하나도 없다고.

그가 정말 장애인 극단이 하나도 없냐고 되묻자 돌아온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애인 연극협회는 없어요?”

그는 다른 비장애인 극단과 함께한 작업 위주로 정회원 신청서를 보완해서 제출할 의사가 없으며, 이 모든 과정이 한국연극협회와 서울연극협회의 원칙에 의한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라는 뜻의 발언을 하고 면접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에게 면접위원1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죠?”라고 물었고, 그는 “이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납득하거나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하고 서울연극창작센터를 나왔습니다.

사건 개요는 이와 같아요. 이후 몇 차례의 공문이 오가고 협회에서 사과문을 올렸지만 이는 협회 차원에서 잘못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피해자의 실명을 반복적으로 공개해 만천하에 알리고 문제를 일으킨 주체는 끝내 숨기며 익명화한 수준의 형식적 사과문이었습니다. 피해자가 겪은 모욕이 진심어린 사과를 통해 회복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저 한 조직의 학습 자료가 된 것을 목격한 많은 장애인 동료들 역시 피해당사자라고 생각합니다. 협회는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몇 번 사과의 마음을 전할 용기를 낼 만한 중요한 시기가 있었음에도요.

상황이 이 지경이 되기 전, 협회는 세 사람의 자문위원을 모셔서 이 사안에 대해 의견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공식적 면접 상황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과 부적절한 후속 조치에 대해 가해당사자 및 협회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하라는 것과 차별적 태도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 및 이후 장애연극 배제 및 제한 관련 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지만, 이후 가해자는 자문위원 구성 및 논의 절차에 있어 내부 합의과정이 부족했다는 발언으로 자문위원의 자격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태도를 보인 바 있습니다.

비장애인인 그가 장애인 동료들과 하는 작업을 ‘좋은 일’, ‘좋은 취지의 사업’이라 폄하해서 말하고, 장애인 배우들이 출연한 연극은 전문연극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장애인 연극은 장애인연극협회로 가라는 의미로 이해할 법한 말을 공식면접자리에서 했던 면접위원은 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았고 그 사이 협회 회장으로 출마, 당선되어 올해 새 임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오늘, 이들이 연대해 함께 거리에서 이 사안을 알리고 집회를 통해 규탄 사실을 가시화하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출처:그의 페이스북)

저는 처음에 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중재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와 개인적인 관계의 협회 내부인과 함께 빠른 시일 내에, 해를 넘기지 않고 문제를 잘 맺음하여 상처받은 그가 회복하는 데에 시간을 쓰기를 누구보다 바랐습니다. 하지만 공문이 오고 갈수록, 그리고 회가 거듭할수록 무언가 일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협회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장애 인권 감수성 부족이 반복적으로 지적되었다는 것은 협회 운영 전반에 보완점이 있다는 뜻’이라고 자문위원이 의견서에 남겼는데요. 그 말을 귀담아 듣는 이사진이 정말 단 한명도 없을까, 하는 생각에 다다르자 제가 중재하려고 했던 방식이 혹시 조용히, 적당히 사과 받고 끝내자는 식으로 읽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와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강하게 사과를 요구하고 상황을 공개하자고 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요.

단단하고 담담하게 세상을 살아나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여전히 단단하지도 담담하지도 못한 저는, 장애예술 차별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손에 손을 잡고 길 위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빈고 가족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3월의 글을 씁니다. 저 역시 ‘우리’로서 광장의 한구석에 서 있겠다는 다짐을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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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이 사안이 큰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다거나 추후 이 글의 진위 내용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원인은 사건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도록 약술하지 못한 저에게 책임이 있음을 밝혀 씁니다. 실제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할 시 수정을 통해 바른 내용이 전달될 수 있도록 후조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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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글
신입회원 입회 심의 관련 서울연극협회 이사회 공식 사과문
사과라는 이름의 폭력 – 서울연극협회 사과문에 대하여
서울연극협회 이사회 사과문은 다시 쓰여져야 합니다.

5빈고게시판
최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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