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주제, 전쟁과 난민
써야지 마음을 먹었지만 고민이 많았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트럼프가 푸틴을 만나고, 유럽 정상들이 미국을 방문하고, 그 와중에 이스라엘은 휴전 이야기를 하면서 가자에서 학살을 멈추지 않고. 국제 정세를 공부해야 하나, 주변 인터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가 쓰는 글은 아는 만큼만 소개하는 글이라는 것을요. 지난 두 글에서 너무 의욕이 넘쳤었죠.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제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국제 정세와 역사 등은 다른 훌륭한 책과 기사를 찾아보세요!
성인들이 서로 친해진다는 것
저는 22년 8월에 핀란드에 왔지만, 핀란드에서 이민자 통합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은 24년 1월부터입니다. 23년 10월에 신청을 하고 3개월을 기다렸지요. 코로나가 진정되고, 핀란드에 이민자들이 늘어나는 시기여서 좀 기다린 편인 같아요. 그렇게 저랑 같은 기수(?)로 100명이 민간 성인교육기관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반에 25명씩 배정되었는데, 우리 반에는 총 16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반에서 가장 많은 출신국은 우크라이나, 다음은 러시아, 그다음은 아프가니스탄이었습니다. 다른 반은 좀 국적 구성이 다른 것 같기는 했는데요, 그래도 이 세 나라 사람은 어느 반에나 있었으니 많은 편이지요.
왜 이렇게 국적을 다 아느냐, 그것은 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프라이버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영어 배울 때 이름이 뭐니? 몇 살이니? 어디에서 왔니? 이런 거 먼저 배우잖아요? 핀란드어도 같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이름 말고는 아무도 묻지 않는 신상을 다 까야 합니다. 성인 대상 수업이라 결혼과 자녀에 대한 질문도 추가됩니다. ‘난 말하고 싶지 않아.’ 이런 부정문은 뒤에 배웁니다.
사생활이 털리는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로 초반에 긴장하며 수업을 갔던 기억이 납니다. 러시아 침략(Venäjän hyökkäys)이라는 섹션의 기사가 언론사 홈페이지 상단에 항상 적어도 하나씩은 있을 때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한 반에서 수업을 듣는 것이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거든요. 우려와 달리 두 나라 사람들은 잘 어울리더라고요. 밥도 같이 먹고요(밥 같이 먹으면 친한 거 아닌가요!!!). 우크라이나 사람은 러시아어를 할 줄 알고, 러시아 사람은 당연히 러시아 말을 하니, 성인 사이의 일상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끼리 그룹을 짓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러시아 사람들과 잘 지내는 우크라이나, 체첸 공화국(모두 그 나라 언어가 따로 있지만 러시아어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러시아어로 대화하는 거 괜찮냐고 하니까, 핀란드어 연습해야 하는데 그이들은 러시아 말만 하려고 한다고 불평하기는 하더라고요;;
[사진출처 : https://www.facebook.com/tampereenkaupunki]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핀란드어 실력이 늘어가고, 친밀감이 생기고 나서는 저도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왜/어떻게 핀란드에 왔니?’ 같은 질문이요. 생각해 보면 수업 중에 사돈의 팔촌까지 어디 사는지 집요하게 사생활을 캤지만, 왜/어떻게 핀란드에 왔냐는 질문을 선생님이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항상 맨 앞줄에 앉는 ‘이리나’에게 6개월쯤같이 공부한 즈음, 핀란드에 온 과정을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이리나’는 저랑 비슷한 시기에 남편과 당시 14살, 5살 자녀와 함께 우크라이나에서 핀란드로 왔습니다. 폴란드 쪽에서 국경을 넘었다고 했습니다. 국경을 넘을 때 어느 나라로 갈지 정하라고 했대요. 핀란드가 그 가족의 선택지에 처음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청년기에 독일에서 살아 봤던 남편이 독일은 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 결국 핀란드로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핀란드에 와서는 지역별 쿼터에 따라 살 곳을 지정받았고, 1년 후 자유롭게 거주지를 옮길 수 있게 되었을 때 남편이 탐페레에 직장을 구해서 여기로 왔다고요. 평소 수업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숙제도 엄청 잘 해오는, 그리고 하루에도 몇 개씩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을 올리는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마냥 환한 사람이지는 않았습니다. 불안감이 높아 처음에는 집 밖에도 못 나갔대요. 지금도 약을 먹고요. 그냥 휙휙 넘겼던 그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는 절반 넘게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알리는 내용이나 전쟁 전 살던 곳에서 가족들과 찍은 옛 사진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생각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가고 싶지만 그러기 힘들 것 같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당장 여기서 교육을 받는 자녀가 둘이나 있으니 힘들겠지 정도로 생각 는데, 그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를 더 얘기해주었습니다. 자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해외로 나간 사람들을 미워한대요. 우리 남편과 아들들은 모두 군대에 갔는데, 그리고 죽었는데, 전쟁이 끝나면 돌아와서 그 평화는 같이 누릴 거냐고요. 아마 돌아가더라도 굉장히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가고 싶다고 그이는 말했습니다.
반면에 우리 반의 다른 한 명은 부활절 기간 자체 방학(?)을 가지고 우크라이나에 부모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읭? 그게 가능?’했는데, 버스 타고, 차 타고 해서 다녀왔대요. 새삼 우크라이나가 넓은 나라구나 했습니다. 저에게 전쟁은 온 나라가 풍비박산 나는 이미지인데, 여러 방면으로 나라와 국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기는 하겠지만, 모든 동네가 생명의 위협을 동일하게 느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같은 사건을 각자 다른 위치에서 다르게 겪는 시간을 보내겠구나,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같겠지만 마음에 남는 것들은 다를 수 있겠다, 전쟁이 끝난 후에 더 길고 아픈 시간들이 있을 것 같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로 전쟁으로 나라를 떠난 우크라이나인은 난민과는 다른 ‘임시보호 조치’로 EU 국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망명 신청 후 승인을 받는 난민보다 신속하게 허가 결정이 나는 대신 ‘임시’라서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EU 국가에서 임시보호 조치를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인은 430만 명 정도이며 그중 4만 6천 명 정도가 핀란드에 있습니다. 물론 임시 보호로 체류 중이라도 교육, 의료 등의 권리에서는 다른 이민자와 차이가 없고, 직업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일상에서 구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정부가 바뀌고 나서 핀란드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에는 임시 보호 자격으로 들어오더라도 대학에 입학하거나 취업을 하면 다른 이민자들과 동일한 비자를 새로 발급받을 수 있었던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시보호 기간은 핀란드 체류 기간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5년 이상 살아도 영주권을 신청할 수 없습니다. 임시 보호 기간은 최근 연장되어 2022년 3월 4일에서 2027년 3월 4일까지입니다. (EU는 2026년 3월 4일까지로 연장, 관련내용)
같이 수업을 들었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어서 나이가 좀 있을 줄 알았는데 21살이라고 해서 모두를 당황시킨 ’나지프’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핀란드로 왔습니다. 하지만 난민 자격으로 핀란드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형과 누나가 핀란드에 정착해서 살고 있고, 마지막으로 자신과 부모님이 핀란드로 이주한 것이었습니다. 총 13남매인데 다른 형제자매들은 핀란드 말고도 이란, 터키 등에 살고 있대요. 이제 아프가니스탄에 남아있는 자신의 가족은 아무도 없다고, 우크라이나는 욕할 러시아라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같은 나라 사람끼리 싸우고 있어서 어디 말하기도 그렇다며 시무룩해질 때는 위로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아는 거라곤 탈레반 정부와 여성들의 삶이 쉽지 않다는 정도밖에 몰랐으니 더 할 말이 없었지요.
‘자흐라’는 20살이라고 하길래 부모님과 핀란드에 왔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라고 강조하면서, 남편과 같이 산다고 해서 역시나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자흐라의 아버지가 저랑 동갑이더군요. 허허.) 자흐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핀란드 국적의 아프가니스탄인과 결혼해서 이주한 경우였습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는 여자라서 할 수 없었던 자전거 타기가 지금은 그이의 주말 취미입니다.
아무 말 대잔치였던 ‘청소년기의 체육활동은 왜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말하기 시험을 마친 후 집으로 가는 길에 자흐라에게 근황을 물었습니다. 자흐라는 요새 계속 잠을 못 잔다고 했습니다. 자흐라의 원가족은 모두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현재 이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때 한참 이스라엘과 이란이 미사일 보복 공격을 하던 때였거든요. 가족들이 걱정돼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계속 뉴스만 보고 있다고, 원래는 지금 배우는 과정이 끝나면 이란에 가족들을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비행기 노선이 다 취소돼서 표를 살 수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BBC에서 생중계로 보여주는 미사일 격추 장면에서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게 저런 건가 하는 생각 정도였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누군가의 삶을 떠올리지는 못했습니다. 부끄럽게도 그이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야 미사일 공격에 대한 두려움이 실감됐습니다. 다행히 가족들에게는 별일이 없었고, 자흐라는 8월에 가족들을 잘 만나고 핀란드로 돌아왔습니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기
작년 북한에서 한국으로 오물 풍선을 날리고 있을 때, 그래도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굉장히 원했겠지만!!) 대남/대북 방송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고통도 그 방송들이 중단되었다는 뉴스를 보고서야 떠올렸지요. 핀란드 오고 초반에 방사능 피폭에 대비해서 초등학교에서 약을 나눠준다는 기사를 봤을 때도, 러시아랑 접하고 있는 동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괜찮겠지 했던 기억도 납니다. 자세히 보려 하지 않고, 공감하려 하지 않고, 감지하더라도 나한테까지 영향을 미칠까 정도만 생각했던 것까지 떠올리면 여기 다 쓸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일이 지나갔습니다. 아마 제가 이주민이 아니었다면, 직업이 없는 이주민이 듣는 교육과정을 듣지 않았다면, 한국 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에 살았다면, 어쩌면 지금도 ‘나만 아니면, 내 가족만 아니면, 내 친구만 아니면 괜찮아’ 하고 살고 있겠지요. 20년 전 제 소원은 세계평화였는데 말이죠. 웹소설 속으로 현실도피하는 시간을 좀 줄이고, 좀 더 예민하게 살아야겠다는 반성과 다짐을 해 봅니다.
그럼 다음 달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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