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차 거주자 햄이 아는 만큼만 소개하는 핀란드 ④ 사회 시스템은 다정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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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정함이 좋습니다

어쩌다 보니 네 번째가 되었지만, 핀란드에 대해서 처음으로 쓰고 싶었던 주제는 다정함이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주로 저에게 건네지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나 몸짓에서 다정함을 느꼈습니다. ‘너의 다정함의 기대치는 너무 낮아’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연한 곳에서 다정함을 발견하게 되는 날에는 저는 좀 덜 구겨지고, 덜 흐려질 수 있었습니다.

일상 속에서 제게 다정함을 건네는 사람들은 보통 아는 사람들입니다. 별 이유 없이 안부를 물어봐 주고, 좋은 것이 생기면 가끔이라도 저를 떠올려주는 소중한 사람들이죠. 이런 소소한 다정함을 좋아하면서도, 저는 막상 용건이 없으면 연락을 못 하는 종류의 인간이라, 정말이지 그이들의 다정함은 제게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여러 긴장 사이에서 잠깐이나마 누리는 평화지요.

아는 이들을 중심으로 채워졌던 다정함을 핀란드에 와서는 얻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핀란드 사람들은 잘 웃지 않고(겪어보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비즈니스 미소가 없을 뿐), 개인주의적이고, 커서는 친구를 사귀기가 어렵고 등등의 이야기를 들은 터라 별 기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정함은 가까운 데 있었습니다.

첫해 겨울에 빵 사러 나가기 추워서 직접 빵을 굽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 먹습니다. 남이 해준 빵 최고!) 밀가루 종류가 많아서 식빵용 밀가루를 찾는데도 한참이 걸렸는데, 다음 난관은 이스트였습니다. 한 종류만 있으면 고민이 없을 텐데… 제가 이스트가 있는 선반 앞에서 꽤나 서성이긴 했습니다. 그때 어떤 분의 “Tämä on hyvää.(이게 좋아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한테 말한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시 한번 더 말하길래 뒤돌아보니 아시아계 남성분이었습니다. 딱 그 한마디만 하고 갈 길 가는 바람에 그나마 할 줄 아는 Kiitos(감사합니다)도 말해보지 못했지요. 덕분에 고민의 시간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분은 여러 종류의 이스트를 써보고 시행착오를 겪으셨겠죠. 좀 오버같이 들리겠지만, 그날 저는 다정함 게이지를 꽉 채우고, 근 20년 만에 일기도 썼습니다.

이스트 제품 사진
핀란드에 오시면 요 이스트를 써보세요~

처음보다 나아졌지만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차가 제가 지나갈 때까지 멈춰주는 것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습니다. 운전자와 제가 서로 먼저 지나가라고 수신호를 주고받게 될 때는, 아예 좌우를 살피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곳에서 제가 불필요한 교통체증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사람이 길을 건널 때 차가 멈추는 게 당연하고, 잠깐 멈춰봤자 운전자가 보행자보다 훨씬 빨리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 뻔한데도 멈춰주는 차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후다닥 뛰어서 길을 건넙니다. 제가 만난 모든 운전자가 특별히 더 보행자를 챙기는 사람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겠지요. 그냥 법을 지킨 거니까요. 한국 도로교통법에도 차는 보행자의 통행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쓰여있지만, 길을 걷다 차의 경적 소리에 깜짝 놀란 경험을 한 사람이 저만은 아니겠지요.

누군가의 배려와 호의를 받는 것은 감사한 경험이지만, 사회적으로 정해진 합의나 법도 호의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다정함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들에서 종종 다정함을 느낍니다. 이때는 감사함과는 다른, 존재에 대한 인정으로 느껴져서 안정감을 얻는 것 같습니다. 다정함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은데 떠오르는 단어가 없어서 고민하다 딱 맞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인권입니다.

핀란드 헌법에서 발견한 것- Jokainen

핀란드 헌법(https://www.finlex.fi/fi/lainsaadanto/1999/731)을 찾아보았습니다. 모든 국내법의 기준이 되는 법이고, 여기도 민주주의 법치국가이니 한국과 큰 차이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꽤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으로서 가지는 권리와 의무를 명시하고, 국가 기관은 ‘노력’해야 하는 것이 많은 반면, 핀란드 헌법은 개인의 구체적인 권리를 서술하고, 국가 기관은 ‘노력’보다는 실제로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자세하게 쓰여있었습니다. 또한 제한적인 부분에서만 ‘국민(kansa)’이라는 표현을 쓰고 (제2조. 핀란드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기본권을 설명한 제6조부터 23조까지는 국민이 아닌, ‘인간(ihminen)’과 ‘모든 사람(jokainen)’이라는 표현이 주로 쓰였습니다. 항목에 따라 ‘국민’과 ‘합법적 체류 자격을 가진 외국인’이라는 표현도 있기에, 그냥 뭉뚱그려서 사람이라 썼다기보다는, 국적과 자격에 상관없이 권리를 보장/보호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시스템이 다정해지려면 일단 법이 보편 인권을 목표로 해야겠구나 싶었습니다.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법으로만 해결하는 것은 쉽지도 빠르지도 않은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려울 때 기댈 법이 없는 건 또 다른 문제고, 구성원의 다정함 만으로 모든 존재들을 제자리에 살아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법에서 공유한 가치들은 곳곳에 있고, 그것들은 일상에 녹아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유아차로 어린이와 동반한 성인은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합니다. 버스의 경우 운전석이 있는 좁은 앞문으로 승차하고, 버스 가운데에 있는 넓은 문으로 하차하는 방식인데, 유아차는 넓은 뒷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지정 좌석이 정면에 있습니다. 함께 차에 탄 성인은 요금을 낼 필요가 없으니 유아차를 놔두고 버스 요금을 결제하러 이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아차와 함께 보호자가 버스에 오르는 사진
유아차와 함께 버스에 오르는 모습. 사진의 문 옆쪽에 노란 버튼을 누르면 문이 열리면서 버스가 기울여집니다. (사진 출처 https://www.nysse.fi/esteettomyys.html)

의료 서비스의 경우, 환자는 자신이 받는 처치에 대해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의료인은 쉬운 언어(selkokieli)를 써야 합니다. Selkokieli는 어려운 표현 대신 쉬운 표현을 써야 하고, 긴 문장으로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selkokieli 설명 영상, https://youtu.be/wRs5D0w9Dik?si=k1fbpKJA9iREZxvV)

쉬운 언어가 사용되었다는 로고
다양한 곳에서 이 마크가 있는 책이나 홈페이지 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는 시력이 약한 사람을 위해 큰 글자로 인쇄된 책을 비치해 놓고(주로 인기 있는 소설책이 많습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쉽게 작성된 selkokieli 책 서가도 있습니다(여기는 주로 청소년들과 이민자들이 많이 활용합니다). 또한 도서관에서는 운동기구(야구 방망이, 스케이트 신발 등)와 악기, 보드게임과 닌텐도같은 것들도 책과 동일한 방식으로 대여해 주고, 재봉틀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도서관이 지원하는 취미생활 https://www.tampere.fi/kirjastot/kirjaston-tilat/sampolan-kirjaston-tekomo)

교육받을 권리에 따라 스스로를 발전시킬 권리가 경제적으로 방해받지 않아야 하기에, 새로운 기술을 배워 다른 직업을 갖기 원하는 사람은 무상으로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고, 이 기간 동안 하루 37유로 정도의 현금과 상황에 따라 추가로 교통비 9유로와 무상 점심을 받습니다. 저도 지금 이 돈을 받으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이주민 통합 정책 지수(MIPEX)를 소개한 기사에 따르면 핀란드는 유럽에서도 이민자의 사회통합이 성공적인 나라에 속합니다. 그리고 기사에서 통합정책의 성공은 교육과 고용을 지원하고, 사회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고, 편견을 줄인다고 설명합니다. (관련기사 https://yle.fi/a/74-20184855) 핀란드는 노동시장 개방과 이민자의 노동권리에 대한 이해, 건강권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점수가 높기는 하지만 핀란드가 받은 점수와 실제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그 예로 영주권 획득은 쉬운 편이나, 시민권을 얻는 것은 다른 상위권 나라들에 비해 어렵고, 이주민의 정치 참여를 위한 제도는 유럽 국가들 중 가장 열려있으나, 다언어 지원을 축소함으로서 실질적 정치 참여를 어렵게 한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핀란드가 보수 정권으로 바뀌고 나서 통합의 방향과 질이 많이 바뀌고 있는 중이라 이후 조사에서는 순위가 낮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순위가 낮아지지 않는다면, 아마도 유럽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되어 아래쪽으로 평행이동하는 것이겠죠. (자세한 항목이 알고 싶으시다면, https://www.mipex.eu/what-is-mipex)

내가 느낀 시스템의 다정함

과거(10년 전)보다 지원 기간과 지원 방향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저는 사회통합 프로그램으로 많은 경험을 하는 중입니다. 지금이야 제게 필요한 도움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활용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호의는 부담스럽고, 아무도 묻지 않는데도 내가 받을 자격이 있나 계속해서 스스로를 점검했습니다. 내가 내는 세금이라고는 부가세뿐인데 그 나라 세금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듣는다는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한국에서 외국인을 세금을 낭비하게 만드는 존재로 여기는 댓글들을 볼 때,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은연중에 여기서 제가 그런 존재가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핀란드의 시스템에서 받은 첫 번째 다정함은, 교육 시작 전 담당자와의 면담 자리였습니다. 면담은 이제까지 무엇을 공부했고, 어떤 일을 했고, 핀란드에는 왜 왔으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물어보는 것이 큰 부분인데, 저는 이 면담이 좀 지연됐습니다. 한국어 통역사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통역을 제가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어 통역사를 찾고 있다고 하니 면담에 대한 부담이 확 줄었습니다. 사무실에서 담당자와, 전화로 연결된 통역사와 함께할 수 있어서, 제가 전달하고 싶었던 내용을 무리없이 전달했습니다. 담당자도 형편없는 영어를 듣는 수고를 줄이고, 면담 시간도 단축됐을 테니 서로에게 이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도 중간에 점검을 받았습니다. 점검이라고 했지만 성취 정도를 엄격하게 체크한다기 보다 초반의 얼기설기한 계획을 좀 더 실현 가능한 방향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핀란드어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과 직업 상담을 해주는 상담사, 그리고 통합프로그램 담당자와 함께 한 모든 면담 내용과 평가는 문서로 작성돼서 저도 바로 열람할 수 있었습니다. 면담 때 한 번도 저의 출신, 성별, 나이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지레 위축된 적이 많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고요. 면담은 웃음기 없이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진행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들보다 덜 배려를 받고 있다던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을 받는 데는 감정 노동이 필요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건강상담도 받았는데 (학생의 권리 중 하나입니다) 상담 간호사가 공부를 다 마친 후에도 계속 핀란드에 살 것인지, 다른 나라에서 직장을 구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는 좀 놀랐습니다. ‘너 계속 핀란드 살 거지?’하는 뉘앙스로 묻지 않았거든요.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제가 하고 있었다는 것, 모두에게 좋은 것이 결국에는 나라에도 좋은 것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는 혐오

지난 8월 초, 핀란드의 재무 장관 Riikka Purra(현재 내각 연합 파트너인 극우 정당 PS의 당대표이기도 합니다.)는 정부 내 합의 없이 대규모 긴축 예산안을 발표했습니다. 심각한 국가 부채를 줄인다는 명분하에, 국가교육위원회(opetushallitus) 폐지, 대학 보조금과 지방정부 지원금 축소, 개발도상국 협력 예산 삭감, 난민 할당제 폐지, 정착 지원 보조금 전면 폐지가 주요 내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소득세 감면을 유지하면서 국방비를 기존의 6배로 올리는 것도 역시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난리가 났고, 이 내용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유럽 밖에서 오는 이민자에 대한 혐오의 말들이 정치인의 입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PS당의 부대표(Teemu Keskisarja)는 방송 토론에서 상상할 수 없는 혐오 발언을 쏟아냈고(그 내용을 여기 글로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바로 다음날 재무 장관이 이를 지지하면서, 총리(연정 중인 Kok. 당 소속)가 이를 규탄하는 지경까지 갔습니다.(관련기사 https://yle.fi/a/74-20180805)

실제 예산안에서는 대부분 축소되거나 배제되는 형태로 합의되었습니다만, 이 사건으로 PS 당의 지지율은 눈에 띄게 올랐습니다.(지난 지역선거에서 PS는 참패했습니다.) 특히 이민자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SDP(사민당)에서 PS로 지지정당을 바꾸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실제 정책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지지율을 얻을 수 있는 쉬운 방법을 빠르게 학습하고 있습니다.

25년 9월 핀란드 정당 별 지지율 이미지
25년 9월 각 정당의 지지율. 월 별 지지율 변화는 다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yle.fi/a/74-20186114

있을 수 있어야 뭐라도 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안전하게 있을 자리는 중요합니다. [있기 힘든 사람들]의 저자 도하타 가이토는 이 책의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에 “각자의 ‘있기’를 지키기 위해 국경을 열기 보다 닫고 있”고,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인지 여부에 따라 ‘있기’가 손쉽게 박탈되고 있”다고 썼습니다. 여기 ‘있기’위해 저도 애쓰고 있는지라 바로 동의가 됐습니다. 일단 있을 수 있어야, 뭐라도 될 상상을 할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있기’가 힘들어질 때 쯤이면 다른 곳은 괜찮을까 싶은 걱정이 들기는 하지만, 아직은 당연하게 있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법에 기대 좀 더 있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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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핀란드 헌법은 1995년 EU가입 후 대대적인 개정이 있었습니다. 이 때 기본권을 시민에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개정되었습니다.
참고 2. 핀란드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은 다음과 같습니다;
평등, 생명, 개인의 자유, 신체의 완전성에 관한 권리, 형사사건에서 법적합성의 원칙, 이동의 자유, 사생활권, 종교와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정보 접근권, 집회와 결사의 자유, 선거권과 참정권, 재산권 보호, 교육을 받을 권리, 언어와 문화에 관한 권리, 근로권과 상업 활동의 자유,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환경에 대한 책임, 법률에 따른 보호, 기본권과 자유의 보호, 비상사태 시 기본권과 자유의 제한 (굵게 표시된 것은 95년에 추가 또는 강화된 기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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