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해 봅시다.
_ 멕시코 치아파스의 어느 원주민 여성
화상회의로 진행하는 총회는 흥미로웠습니다. 갇혀 있는 몸이라 채팅으로밖에 참여하지 못해서 아쉬웠지만요.
참여 못 하신 분들을 위해 전해드리자면 총회는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총회가 마치고 같은 화상회의 방에서 뒷풀이도 진행이 되었는데요.
그 자리에서 오간 몇몇 말이 마음에 걸려서 여기에 글을 씁니다.
마음에 걸린 말들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빈고는 그동안 어린애처럼 도움이 필요하고, 배려를 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계속 어린애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서 도움이 필요한 곳들에 도움을 줘야한다.'
(어린애/어른에 대한 비유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어 이런 발언을 하신 분은 '도움이 필요한 곳 /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으로 표현을 정정했습니다.
다만 이 표현을 옮기는 게 말들의 뉘앙스를 더 잘 전달하는 것 같아 굳이 옮겨적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총회 안건과도 관련이 있었는데요. 잉여금 분배안에 대한 토론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잉여금 분배안은 총회때면 전통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하는 주제입니다.
빈고가 지향하는 가치, 그리고 조합원들이 빈고가 지향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라, 매번 흥미로운 토론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활동가 입장에선 한번 시작됐다 하면 총회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타임테이블을 어그러뜨리는 원흉이지만...)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바깥에는 당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은데,
잉여금 분배안의 원안으로 올라온 항목 중 지구분담금 10%, 공동체 기금 10%의 비율이 너무 낮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해서 올해만 한시적으로 빈고적립금의 비율을 29.9%에서 19.9%로 줄이고,
지구분담금과 공동체 기금을 각각 15%씩으로 올리자는 수정안이 제안된 것이었죠.
한편 수정안에 반대하는 의견을 종합해보자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구분담금과 공동체 기금은 매 해마다 다 써야하는 예산이 아니라, 적립되는 기금이다.
그런데 작년까지 쌓인 공동체 기금과 지구분담금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 이유는 조합원들의 활동이 저조했기 때문이다.
공동체 기금도, 지구분담금도 어딘가에 기부하고 끝내는 식으로 사용되는 게 아니라
조합원이 연대활동을 할 때(지구분담금) 혹은 공동체가 지원 요청을 할 때(공동체 기금) 사용되는데,
작년 한 해는 코로나로 대부분의 연대활동과 공동체활동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기금 사용도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미 쌓인 기금이 많이 남아있으니, 기금을 늘리는 게 아니라
조합원/공동체 활동을 늘릴 방법을 궁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 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반론의 반론으로 나온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 기금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여져야 하는 돈인데, 아직 많이 쌓여 있다면 그건 빈고의 잘못인 게 아닌가.
얼마나 절박한 필요를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런 사람을 위해 기금을 쓰려할 때 기금이 부족하면 안 되니,
작년까지 얼마나 써왔는지와는 별개로 많이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 라는 이야기였죠.
반론의 반론의 반론이랑 반론의 반론의 반론의 반론도 있었던 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기억이 안 나니까 궁금하신 분들은 앞으로 올라올 회의록을 참고하시면 되겠어요.
아무튼 이런 토론을 통해 잉여금 분배안은 의결권자 49명 중 수정안(12표), 원안(25표)로 원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뒷풀이에서의, '빈고는 이제 도움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은 이런 맥락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어요.
그 말의 취지도 이해가 돼요.
코로나 시국 속에서 당장 수십 만원이 절박한 사람들이 많은데,
아니, 코로나 시국이 아니더라도 당장 수십 만원이 절박한 사람들은 많아 왔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를 반대한다면서도
정작 빈고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한 빈고 적립금(29.9%)에 지구 분담금(10%)의 세 배를 분배한다는 건...
말하자면 집단 이기주의...? 로 느껴질 수도 있고...
꼭 그렇게까진 안 가더라도 이제 빈고는 제법 안정적으로 운영이 되고 있으니까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잉여금이 더 돌아가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취지에서 나온 말인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빈고가 일종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 같고,
그런 배경에서 이제 빈고가 도움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 거라고, 저는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 말에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기 위해서, 혹은 빈고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빈고에서 활동해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도움과 배려를 받기 위해서 빈고에 출자하고, 빈고를 이용했던 것도 아니었던 거 같구요.
빈고를 종종 여러 형태로 이용해왔고, 이용분담금은 제가 다른 곳에서 대출할 수 있는 돈의 이자보다 적을 때도 많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용분담금이 대출이자보다 더 많은데도 빈고를 위해서 빈고에서 이용을 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고,
이용분담금이 더 적으니 빈고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어요.
다만 제가 낼 대출 이자가 환경을 망가뜨리는 데 쓰이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는 데 쓰인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서 빈고를 이용해온 거죠.
건강계에 오랫동안 가입돼 있었고 다행히 지금까진 아픈 일이 드물어서 건강계에 낸 돈보다 지급받은 돈이 훨씬 적지만,
그렇다고 그 곗돈을 건강계의 다른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우리가 아프면 언제라도 의지할 수 있는 안전망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돈을 써온 거죠.
지구분담금도 그래요.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기 위해서라면 지구분담금보다 나은 길이 많을 거예요.
같은 돈을 자선재단에 기부하는 게 지구분담금을 쓰는 것보다 간편하고 어쩌면 더 효과적이겠죠.
하지만 빈고가 10년간 이런 불편한 과정을 거쳐서 사용해온 것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지구분담금을 사용하는 걸 기부가 아니라 '연대활동'이라고 부득불 불러왔던 것과도 관련이 있을 거예요.
연대라는 말을 써야만 도움을 주는 입장과 도움을 받는 입장이 그렇게 명확히 나뉠 수는 없다는 것을,
도움을 주는 일은 동시에 도움을 받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의 입장이 결국에는 동등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같거든요.
이런 생각들로 저는 빈고가 도움이 필요한 곳이었다는 말에도, 이제 도움을 줘야하는 곳이라는 말에도, 아무래도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이야기가 나온 뒷풀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채팅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말을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하다가 화제가 바뀌어서 결국은 못 쓰고 약간의 자괴감을 느껴야만 했는데요..
나중에 문득 이 말이 생각나더라구요. 위에 인용한 말이요. 스크롤 올리기 귀찮을 거 같아서 다시 한 번 옮겨보자면,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해 봅시다.
_ 멕시코 치아파스의 어느 원주민 여성
우리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기 위해서나 우리 안에 있는 어렵고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 우리가 빈고에 온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빈고에 출자하고, 빈고에서 이용하고, 빈고를 통해 연대하는 게 우리가 반대하는 세상의 바깥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바깥을 통해 우리가 조금쯤 해방되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건 분명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임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빈고에서 함께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빈고 활동을 하는 거라면.. 그건 시간을 낭비하는 걸지도요.
어쩌면 빈고가 말하는 자치, 공유, 환대라는 가치 중에 자치라는 게 이 이야기에 닿아있지 않은가 해요.
(빈고에 가입한지 거진 십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저 세 개가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우리는 도움을 받기 위해서나 도움을 주기 위해서 빈고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를 위해서 빈고를 하는 거죠.
단지 그 '우리'의 범위가 살짝 넓어서,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간 이들과 아직 오지 않은 이들을 포함하는 거고요.
그러니 지구분담금을 사용하더라도, 그건 우리가 누굴 돕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쓰는 게 될 거예요.
음... 써놓고 보니 자치랑은 별로 상관 없는 거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총회를 마치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걸 나누고 싶었습니다.
총회 준비해주신 분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들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