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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고게시판 [빈고문학상-작품07] 캐피탈러와 커머너 (지음)

  • 빈고
  • 작성일시 : 2024-12-10 17:11
  • 조회 : 79

캐피탈러와 커머너


기생충은 숙주에 의존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보통은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같이 죽게 된다. 그래서 기생충은 숙주를 이용하고 피해를 입히더라도 숙주가 죽을 정도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생충에게 현재의 숙주가 번식을 위한 목적지인 최종 숙주가 아니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생충은 현재 숙주를 희생해서라도 최종 숙주를 향해 나아가려고 시도한다. 어떤 기생충은 숙주에게 침투해서 숙주의 몸 속에서 영양분을 먹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숙주의 내부에서 성장하고 숙주의 몸을 변형시키고 숙주의 뇌를 조종한다. 기생충에게 감염된 숙주는 기생충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인다. 기생충의 욕망은 단순하다. 증식 더 많은 증식. 기생충은 자신이 가장 잘 증식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가기 위해 숙주를 변형시키고 행동을 유도한다. 원래는 물을 싫어하는 귀뚜라미가 물에 뛰어든다. 달팽이 촉수가 새가 좋아하는 애벌레 모양으로 변형된다. 개미가 다른 동물에게  잡아먹히도록 풀잎 끝으로 기어 올라간다. 쥐가 고양이의 오줌 냄새에 매혹되듯이 이끌려 나온다. 숙주의 이런 비상식적인 행동은 숙주 스스로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기생충은 숙주의 죽음에 아랑곳 않고 최종 숙주로 이동해서 더 많은 증식에 성공하게 된다. 기생충이 항상 숙주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다. 기생충은 때로 숙주에게 협조하고, 이익이 되는 기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생충에게 숙주가 아직 유용하다는 전제하에 그렇다. 


사람들은 원하는 재화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화폐를 사용한다.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돈을 벌고, 번 돈으로 다시 원하는 것을 산다. 그러면 돈은 수단으로서 용도를 다 하고 없어지고 만다. 만약에 시장에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재화를 들고 와서 교환을 하고 원하던 재화를 갖고 돌아간다면, 돈은 시장에서만 잠깐 돌아다니다가 시장이 끝나고 사라져버려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 얘기의 뒷편에는 좀 이상한 사람이 있다. 애초에 돈을 가지고 있었고, 마지막에 돈을 가진 사람. 다른 사람은 원하는 재화를 얻기 위해 돈으로 두 번의 교환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처음에 돈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재화를 잠시 가졌다가 다시 돈으로 바꿨다. 이 사람은 재화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돈을 갖고 있었지만 돈을 원한다. 돈은 돈일 뿐이므로 그냥 갖고 있어도 될 것이었다. 이상한 사람이다. 더 많은 돈을 원하는 것이라면 좀 이해가 될까?  먹을 쌀은 이미 충분하고 쌀이 남아도는 사람이 쌀을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쌀을 원한다? 돈은 교환하는 용도 외에는 쓸모가 없어서, 더 많아진다고 해도 쓸모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당장도 딱히 쓸 용도가 있는 것도 아닌 남는 돈을 이미 갖고 있는데, 더 많은 돈을 원한다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이 이상한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런 교환을 계속 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시장에서는 누구도 손해보고 교환을 하지는 않는다. 다 같이 손해보지 않는 교환을 연쇄적으로 했을 뿐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처음보다 더 많은 돈을 갖게 되었을까? 손해를 본 사람은 누구일까? 뭔가 속임수가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참으로 이상함을 넘어 신비롭다 할만한 무엇인가가 있는 걸까? . 


화폐 자체가 살아 움직이고, 무언가를 흡수하고, 스스로 증식해나가고, 결코 죽지 않는 기이한 생물의 일부라고 한다면 이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생물의 이름은 캐피탈(자본)이다. 자본은 상품과 교환되어 잠시 상품의 모습을 띌 수도 있지만, 곧바로 다시 더 많은 화폐로 돌아와서 애초에 욕망했던 자신의 미래를 실현한다. 자본은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어서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자본은 숙주의 뇌를 조종하는 기생충이다. 사람을 감염시키고 사람의 욕망과 행동을 조종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렇게 자본에 감염된 사람을 캐피탈러(자본가)라고 한다. 캐피탈러는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이고, 자본이 더 잘 증식할 수 있는 곳으로 자본을 움직인다. 자본은 증식이 될 수만 있다면 중간단계에서 어떤 상품을 거치던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공장이든 부동산이든 상품이든 주식이든 채권이든 코인이든 자본은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꿨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렇게 자본은 가장 수익률이 높은 곳으로 이동하고 최대의 수익을 빨아들이는데 성공한다. 자본은 자기 증식에 성공하고, 새롭게 태어난 자본의 자식인 자본수익은 특이하게도 태어나자마자 어미 자본과 결합하고 곧장 자기 증식을 시도한다. 그렇게 캐피탈러는 아직 겉모습은 사람이지만 속은 자본으로 가득차게 된다. 자본을 가득 품어 자본의 색을 띈 캐피탈러는 보통 사람에 비해서 오히려 화려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은 언젠가는 캐피탈러의 껍질을 뚫고 나와 다른 곳으로 가고 캐피탈러는 죽게된다. 만약 캐피탈러가 자본을 증식하는데 실패했다면 그 캐피탈러를 파멸시킨 다른 캐피탈러들이 새로운 숙주가 된다. 만약 이 캐피탈러가 마지막까지 성공적이었다면 주로 그 캐피탈러의 자손이 새로운 숙주가 될 것이다. 어느쪽이든 캐피탈러의 결말은 다르지 않고, 자본은 즉시 새로운 사람을 다시 캐피탈러로 감염시켜 영원한 삶을 연장하게 된다. 자본은 캐피탈러에게 자본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큰 힘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에 감염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더 화려해보이기 때문에 아직 자본이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사실은 유충 상태의 자본이 성체로 성장한 자본을 동경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작은 자본은 큰 자본을 지향하고, 큰 자본은 작은 자본을 먹이감으로 삼는다. 큰 자본에게 작은 자본은 스스로를 더 불릴 수 있는 재료다. 큰 자본에게 흡수당한 작은 자본은 이제 큰 자본의 일부가 되어 큰 캐피탈러에 기생해서 삶을 이어간다. 작은 자본은 별 문제가 없지만, 작은 자본을 빼앗긴 캐피탈러는 이제 껍데기만 남게 된다. 

자본이 대부분의 인간을 감염시켜 버린 인간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이상 캐피탈러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감염된 사람들은 모두가 더 큰 자본을 지향하게 되므로, 큰 캐피탈러는 작은 캐피탈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모든 화폐가 자본은 아니지만, 모든 화폐는 자본 증식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화폐 그 자체가 자본의 잠재적인 형태로서 인식된다. 이는 자본에 감염되지 않았지만 화폐를 쓰지 않을 수는 없는 보통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자본주의 관점에서는 감염되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오히려 아직도 감염되지 못한 프리캐피탈러(미자본가)로 간주된다. 프리캐피탈러는 비효율적이고 미개하고 무식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캐피탈러들이 화폐에 혈안이 되면서 원래 건강했던 사람들이던 프리캐피탈러들이 기존의 방식대로 화폐를 얻는 것은 점 더 어려워진다. 프리캐피탈러들은 이제 화폐를 얻기 위해서 이미 화폐를 가진 캐피탈러들에게 굴복하고 만다. 프리캐피탈러들이 생활수단을 얻기가 더 어려워지면서 그들이 가진 것은 오직 몸과 힘만 남게 된다. 건강한 사람들은 캐피탈러에게 몸과 힘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노동자가 된다. 캐피탈러들은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켜 재화를 만들고, 그것을 판매함으로써 자본 증식에 성공하게 된다. 이제 건강한 사람들은 자본 증식의 도구이자 먹이가 되어 버린다. 아직 이성과 인류애가 남아 있는 캐피탈러들은 노동자에게 일과 임금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모든 것은 자본이 인간을 지배한 결과다. 많은 노동자들은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이제 그들도 자본을 받아들여 감염이 되어 캐피탈러가 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자본의 먹이가 될 것인가 자본에 감염될 것인가? 노동자는 이제 자본을 위해 일하고, 자본의 돈을 받고, 자본의 상품을 사고, 저축을 해서 자기 자신의 자본을 축적한다. 노동자는 프리캐피탈러에서 아주 작은 캐피탈러가 되었지만 여전히 노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제는 노동을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증식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만이 차이점이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큰 캐피탈러와 작은 캐피탈러 그리고 프리캐피탈러가 있지만, 결국 모두는 자본의 증식을 위한 재료로서 차례로 소모될 운명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자본에 감염되었던 노동자의 신체들 중 일부는 강렬한 면역 반응을 일으키며 자본의 세뇌에 저항하기도 한다. 저항에 부딪힌 자본이 노동자의 신체를 장악하는데 실패하며, 사라지지는 않지만 더 성장하지 못하고 맹아적인 상태의 화폐로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이런 노동자들이 결합할 때 독특한 사건이 발생한다. 노동자들이 품고 있는 맹아적인 상태의 화폐들이 결합하며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돌연변이 역시 화폐의 형태를 띄고 있고 자본과 유사한 특징도 갖고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노동자들의 면역과 연대의 힘이 자본의 번식력을 제어해서 숙주를 지배하거나 파괴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더이상 기생이 아닌 공생을 하는 생물종의 탄생이다. 이 생물의 이름은 커먼즈라고 불린다. 그리고 커먼즈와 공생하게 된 노동자를 커머너라고 한다. 커먼즈는 자본처럼 자유롭게 이동하고 결합하고 커머너의 노동과 결합해서 풍요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 풍요를 우선 커머너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커머너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한에서 커먼즈도 발맞추어 성장한다. 만약 커머너가 당장 커먼즈의 풍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커먼즈는 바로 이를 필요로 하는 커머너로 이동할 수 있다. 수백 수천의 커머너가 한 명의 커머너에게 커먼즈를 공급해줄 수도 있다. 커먼즈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자본을 만나서 파괴되거나 흡수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커머너들이 살아 있고 커먼즈를 보유하고 있는 한 자본은 커머너를 감염시킬 수 없다. 그리고 가끔은 기적적으로 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어떤 캐피탈러들은 커먼즈를 삼키지만 이질적인 커먼즈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끝내 원래 있던 자본까지 토해낸다. 그러면 커머너들은 토해낸 자본을 커먼즈로 전환시켜 성장할 수 있고, 캐피탈러 마저 커머너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자본이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흡수하며 점점 소수의 캐피탈러들에게 집중되는 반면, 커먼즈는 커머너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이동하며 영역을 넓혀간다. 캐피탈러는 자본을 소유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그 결과 자본에게 거꾸로 먹혀버리지만, 커머너는 커먼즈를 자신이 당장 필요한 양만큼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네트워크 속에 흘러다니도록 내버려둔다. 커먼즈는 그것이 필요로 하는 커머너에게 흘러가고 또 다시 돌아온다. 그 움직임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커머너의 신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거대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거꾸로 거대한 커먼즈의 바다에서 커머너들이 각자 필요한 만큼 이용하며 함께 유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커먼즈는 커머너가 성장한 만큼 성장하므로 커먼즈의 바다는 곧 결합된 커머너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다. 커머너 역시 언젠가는 생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커머너가 키웠고 또 공유한 커먼즈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커먼즈의 세계를 돌아다닌다. 커머너에 대한 기억을 갖고 때때로 다른 커머너들에게 전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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