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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고게시판 [빈고문학상-작품10] 허생원 파종기 (연두)

  • 빈고
  • 작성일시 : 2024-12-19 10:41
  • 조회 : 34

허생원 파종기


영화를 찍으려고 해. J가 말했다. 무슨 영화? 하고 묻자 J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농사영화! 농사영화? 뭐? 리틀 포레스트 같은 거? 하고 묻자 아니 농민가 같은 거, 하고 대답한다. 누가 보냐 농민가 같은 농사 영화. 재밌게 찍으면 되지 않을까? 일단은 공유랑 도경수를 캐스팅 할거야. 보겠지? 보겠다, 야 보겠다 그 농사영화. 그래서 무슨 내용인데?


제목은 허생원 파종기야. 허생원이라는 농부가 있어. 사극이야? 현대물이야. 허씨 성의 청년 농부야. 근데 하도 성격이 점잖고 조용해서 허생원이 별명이야. 허생원 어릴 때 할아버지가 농사를 지었어. 그래서 씨나락 귀한 걸 밥상머리에서 숟가락으로 머리통 맞으며 배웠어. 밥풀 하나가 얼마나 귀한줄 아냐며 한 톨도 남김없이 먹도록 혼나곤 했거든. 어린시절의 허생원에게는 초록과 들판과 흙과 나무가 있었어. 그 사이에서 고독도 배웠어. 외롭고 슬펐지만 고독이 썩 나쁘지 않은 순간들도 있었어. 부모님은 농사랑 상관 없는 상업에 종사하셨고 허생원도 청소년기와 청년기는 도시에서 자라. 하지만 허생원의 마음속에는 이미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어. 돌이 흙이 되고 흙 사이로 물이 흐르고 흐르는 물을 마시고 나무와 풀이 자라고 그것들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 미생물에게 분해되고 또 다른 씨앗이 싹을 틔워. 비는 흙을 거쳐 강으로 흘러가서 바다로 가고, 나무가 마신 물은 공기중에 흡수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내려. 허생원에게 세계는 이미 서로 연결된 거대한 운명 공동체야. 누군가에게 부당한 일이 일어나면 내가 언제든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누가 울기만 하면 그렇게 눈물이 나서 함께 울게 돼. 함께 웃을 때의 행복한 마음은 어떤 슬픔이나 외로움도 지울 수 있어. 그렇게 모든 것이 연결된 세계에 사는 허생원은 청년이 되어 고심 끝에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돼. 농사는 ‘나’를 세계와 잇는 방법인 것 같았어. 먹고 마셔야만 살 수 있는 게 인간이잖아. 먹고 마신 것을 싸는 게 인간의 생인데, 농사만큼 그 인간의 생을, 이 연결된 세계를 온전히 배울 수 있는 직업이 없겠다 싶었어. 워낙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라 흙과 작물들과 나누는 조용한 시간도 좋았어. 바람이 서걱서걱 풀섶을 헤치고 지나가는 소리며 멀리 숲에서 새가 우는 소리며 작은 벌레들이나 짐승들이 오고 가는 풍경도 좋았어. 그렇게 종일 몸을 놀리다가 단잠을 자는 밤도 좋았어. 아침이면 할 일이 있어 내일을 기대하며 잠들 수 있는 것도 좋았어. 허생원은 그렇게 농사가 좋았어. 그래서 서울 가까운 곳의 땅을 찾아가 농사일을 도우면서 청년 농부가 돼. 


허생원에게 농사를 가르쳐 준 건 그보다 10년 일찍 농부가 된 장년의 김선생이야. 김씨 성의 영수씨인데, 하도 인상이 서글서글하고 인품이 곧고 발라서 별명이 김선생이야. 나이가 많은 이웃 농부들도 김선생에게 하대하지 않고 늘 김선생 김선생 하고 불러. 자 여기서 퀴즈야. 이 영화의 갈등 요소는 뭘 거 같아? 요새 트렌드는 퀴어 아니오? 허생원하고 김선생이 사귀다 헤어지나? 아 그것도 흥미로울 텐데 내 능력 밖이라 쓸 수가 없어... 나 나는 개발과 보존의 갈등, 원주민과 이주민의 갈등 이런 정도가 나올 줄 알았는데.. 너 되게 힙하다. 이 영화의 갈등 요소는 땅이야. 땅? 땅. 토지. 대하소설 쓰세요? 아니요 농사 영화요. 자 그래서 아무튼 김선생도 참 반듯하고 좋은 사람이야.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자연에도 덜 해로운 직업을 갖고 싶었대. 깊이 고민하진 않았지만 대학 때 농활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칭찬도 많이 받고 했어서 농사가 적성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대. 직업을 찾다가 고민해 봤는데 자연농 농사가 딱 그래보이더라는 거야. 좀 섣부른 감은 있지만 (농사가 워낙 고되잖아. 농활 경험으로 적성을 운운하다니 김선생도 참 순진하지.) 그래도 성실한 사람이라 크게 후회하지 않고 자기 선택을 믿고 노력하는 농부였어. 들어서 감이 오겠지만 두 사람이 짓는 농사는 돈 되는 농사는 아니야. 요즘 세상에 돈 되는 농사가 어딨냐? 그래도 단일작 크게 하면 돈 좀 되잖아. 근데 이 두 청장년은 다품종 소량생산이야. 종 다양성과 토종, 친환경, 미생물, 땅의 힘, 습지, 생물 다양성, 순환 같은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짓는 농사지. 당연히 돈이 벌리진 않았지만 마음으로 좋아서 짓는 농사였어. 마을에서 소소한 아르바이트 일감을 찾아 하기도 하며 먹고 사는 정도인, 어찌 보면 땅으로 기도하고 작물로 명상하는, 좀 수도승 같은 두 농부가 주인공이야. 너무 현실성이 없지 않아? 그런 농부 본 적 있어? 그리고 여기까진 너무 잔잔한데? 주인공 얼굴이 재밌다고 재밌는 영화가 될 순 없어 친구야. 


일단 재미는 마을 주민들이 담당할 거야. 농사는 아침 일찍 시작하고 해지면 끝난단 말이야. 저녁에는 맨날 오순도순 모여서 같이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나와. 가끔 서로 다투기도 하고 오해도 벌어지지만 대체로 옹기종기 다정다감 웃고 울며 어울려 사는 거지. 정월 대보름엔 악기 치고 마을 돌면서 복 빌고 맛난 거 나눠먹고 집회가 생기면 다 같이 지하철 타고 서울 다녀오면서 울기도 하고 (쌀 값이 10년 전이랑 똑같대. 너무하지 않아?) 젊은이 기획자가 있어서 미각 교실 같은 워크샵도 하면서 농사나 농작물의 가치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활동도 하고.. 도시 사람들 중에 이런 가치나 활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부러 찾아오기도 하는 마을이야. 아, 마을에 비둘기 아줌마가 한 명 사는데 그 사람도 골때려. 재밌을 거야. 그러다 마을에서 같이 재미지게 살던 어르신이 돌아가시기도 하고.. 사람 사는 얘기는 마을 사람들이 잘 채워줄 거야. 


그래서 갈등은? 어 그래. 허생원도 김선생도 땅이 없잖아. 농사는 땅에다 짓는 거야. 이정돈 알지? 근데 땅이 없어. 말이 돼? 다행..인지 불행인지 농촌이 엄청 고령화 됐잖아. 그 둘은 더 이상 농사 짓기 힘든 어르신들이 무상으로 빌려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어. 오 복선. 아까 어르신 돌아가셨다고 했잖아. 맞아, 어르신이 돌아가시면서 도시에 살던 자식들이 땅을 상속해서 팔기로 결정한 거야. 당장 허생원이랑 김선생이 오랜시간 공들여 만들어 놓은 흙이 다 무용하게 될 지경이야. 너무너무 속상하고 슬픈 일이지. 땅 힘을 기르는 게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 그뿐만 아니라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마을엔 개발 붐이 불어서 타운하우스가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었어. 사람들이 다 그 타운하우스 부지로 내 땅도 소용이 있으려나.. 땅값 오르는 소리에 기대에 찬 눈빛이야. 농사 짓는 사람들은 자기 농사 지어야 해서, 농사 안 짓는 사람들은 팔 생각에 신나서 허생원하고 김선생한테 빌려줄 땅이 없는 거야. 어우 야. 이거 슬픈 영화야? 아니 투쟁 영화야. 들어봐.


그래서 김선생은 실의에 빠져서 매일 술을 마셔. 김선생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야. 벌써 세 번째 땅을 옮겼는데 거기까지도 다 감수했다고. 그런데 이번에는 옮길 땅 마저도 없어. 슬퍼 안 슬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질 않잖아. 나이도 있고. 이제와서 다른 일을 하기도 애매하고 하고 싶지도 않고.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어. 막노동판에 나가는 것 말고는. 하지만 그것도 기술이 있어야지.. 써주지도 않는 거야. 절망 뿐이지. 그런데 허생원은 좀 다른 방향으로 가. 봄이 오고 씨를 뿌릴 계절이 되자 허생원은 보이는 노는 땅이란 노는 땅은 다 찾아내. 찾아서, 아무리 자투리 땅이더라도 씨앗을 뿌리기 시작해. 하천 부지, 빈 공터, 타운하우스 공사 부지의 담장 밖 등에 마구 작물을 심기 시작해. 처음에 사람들은 걱정도 하고 혀를 차기도 하고 말리기도 하고 위로를 하기도 했어. 하지만 뭐에 홀린 듯이 허생원이 씨를 뿌리고 다니고 여기저기 싹이 트기 시작하자 문제가 심각해져. 거두지도 못할 씨를 뿌린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고 얼마나 마음이 안 좋으면 저러겠냐며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남의 땅에다 뭐 하는 짓이냐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어. 관공서에서는 하천법을 어겼다고 과태료를 물리겠다고 했고 공사장에서는 무단 침입으로 고발하겠다고도 했어. 그래도 허생원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아침이면 나가서 여기저기를 헤매며 씨를 뿌리고 싹을 고르고 물을 주고 생태계 교란식믈울 뽑았어. 사람들이 김선생한테 달려갔어. 허생원 좀 말려보라고 해.


보기가 아주 안쓰럽고 저러다가 진짜 감옥에라도 가면 어쩌냐고 걱정들이야. 김선생은 처음엔 무슨 일인지 잘 이해를 못 했어. 그즈음 늘 술에 취해 있었으니까. 몇 번이나 마을사람들의 채근이 있고서 김선생도 슬슬 걱정이 돼. 조용하고 얌전하던 허생원이 왜 갑자기 저렇게 아무 말 안 들리는 미친놈이 됐는지 알 수 없었어. 말리자면 무슨 말을 해야 말려지는지도 알 수 없었지.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일단 아침에 허생원의 집을 찾아갔어. 이야기를 나눠볼까 했는데 허생원은 김선생에게 꾸벅 인사만 하고는 제 갈 길을 가. 하는 수 없이 김선생이 쫓아가지. 그렇게 종일 허생원의 뒤를 쫓아 어르고 달래고 때때로는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면서 초여름의 하루가 지나가. 저녁에 김선생이 저녁을 좀 같이 먹자고 해. 허생원은 땀에 절은 옷을 펄럭이며 말없이 쫓아 가. 둘은 동네의 밥집에 들어가. 막걸리 한 사발을 놓고 이야기를 나눠. 그리고 어스름이 내릴 때 둘은 어깨를 걸고 춤을 추며 집으로 돌아가. 


일단은 여기까지야. 뭐??? 여기까지라고. 그러니까 너 지금 뭐라는 거야? 어떻게 여기서 끊어? 어떻게 이렇게 끝내??? 미쳤어? 허생원이 왜 그랬는데? 뭐라 그랬는데?? 그리고 이게 왜 농민가 같은 농사 영화야? 뭐가 투쟁이야? 계속 농사 짓잖아. 아 그리고 둘이 마지막에 춤추잖아. 그게 뭐!!!! 농민가 마지막에 그렇게 끝나.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 있다.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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