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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고게시판 [빈고문학상-작품11] 구르는 집 -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 (연두)

  • 빈고
  • 작성일시 : 2024-12-19 10:43
  • 조회 : 32

ㅇ은 부스스 깨어나 창문을 쳐다봤다. 눈은 먼지가 낀 것처럼 버석거리고 입이 바짝 말라 입맛을 한 번 크게 다셨다. 창밖은 벌써 환했다. 느적느적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고 입김을 불어 보았다. 하얗게 입김이 인다. 방은 그럭저럭 따스했고 바깥의 공기는 쨍하게 얼어 있다. 겨울이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나가려는데 발끝에 뭔가 채인다. 내려다보니 어제 처음 만난 누군가의 발이 이불 밖으로 비죽 나와 있다. 그래 우리는 어제 처음 만났지. 이런 사이에 발을 차고 지나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너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구나 이름 모르는 자여. 용서해다오. 방을 둘러보니 벽쪽에 누군가 찰싹 들러붙어 웅크리고 자고 있다. 저자는 아는 자다. 한 달 전 ㅇ이 이 집에 처음 온 날 만났다. 그날 이후로 그들은 매일 같은 방에서 잠들고 일어나고 같은 집에서 밥을 나눠 먹는다. 친구가 됐다. 서로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거실로 나오니 풍경은 더욱 가관이다. 가관이고 장관이다. 소파며 바닥에 이불을 깔거나 덮은 사람이 너댓 자빠져 있고 두 명은 외투를 입은 채로 잠들어 있다. 표정을 보아하니 다행히도 다들 단잠을 자고 있는 것 같다. ㅇ은 지끈거리는 머리로 어젯밤을 회상했다. 집에 들어온 게 몇 시더라.. 그래 열시에 퇴근을 했으니 자정보다는 전에 도착을 했을 것이다. 춥고 어두운 거리에서 돌아온 집은 김이 서릴 정도로 후끈했고 거실엔 주정뱅이들이 가득했다. 이 집의 주정뱅이들은 상상 이상의 낙관주의자들이다. 날마다 축하할 거리를 잘도 찾아낸다. 아니나다를까. 어제도 뭔가를 잔뜩 축하하면서 혀가 꼬부라진 자들이 거실에 모여있었다. 노래하고 춤추는 행복한 거지들. ㅇ은 도착하자마자 자연스레 자리에 합류했다. ㅇ의 자리는 언제나 여기다. 사람들의 곁. 웃음이 많고 마음이 따듯하고 가난하고 시끄러운 술고래들의 옆. 그렇게 우리는 뭔가를 한참 축하하다가 또 뭔가를 한참 의논하다가 하나는 분노하고 둘은 잠들고 셋은 싸우고 넷은 여전히 웃고 떠드는 밤을 보냈다. 이게 다 뭔가. 날마다 이런 생활을 잘도 하고 있군,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며 싱크대 앞에 선다. 놀랍게도 설거지가 모두 되어 있다. 주정뱅이의 새벽 설거지를 믿지 못하고 그릇 몇 개를 들어 확인해 본다. 생각보다 깨끗하고 뽀드득하군. 그렇다면 내가 밥을 할 차례인가. 다시 한 번 거실을 휘 둘러보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도대체 몇 인분을 해야해.. 이 밥솥은 10인분 짜리다. 이 밥솥은 분명히 작다. 작고 모자르다. ㅇ은 일단 누구도 깨우지 않기로 결정한다. 저 한량들 가운데 몇은 달콤한 밥 냄새를 맡고 좀비처럼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살아난 좀비들과 먼저 밥을 먹어야지. 그러고 나면 누군가 다시 부스스 살아나 새로운 밥을 지을 것이다. 이것은 이 이상한 집이 둥글게 굴러가는 방법이다. 냉장고에는 지난 주말 반찬팀에서 만들어 집집마다 나눠준 반찬이 들어 있다. 반찬은 조금 아껴먹어야겠다. 오늘은 생각보다 좀비들이 많다. 저 좀비들은 이 따스한 밥과 달콤한 반찬을 먹어야 다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면 좀비였다가 사람이 된 술고래들이 청소하고 수다를 떨며 이 집을 수런거림으로 다시 가득 채우겠지. 그리고 우리는 또 무언가 축하할 거리를 찾아내어 신나게 서로를 축하하고 축복하겠지. 같이 놀고 같이 자고 같이 미래를 계획한다. 이 집은 이렇게 굴러간다. 네모난 집에 네모난 티비는 없고 네모난 책상과 네모난 소파가 들어차 있지만 이 집은 이런식으로 둥글게 굴러간다. 멈춰있는 법을 모른다. 멀미가 나면 잠시 내린다. 영영 다른 네모난 집으로 갈아타 멈춰있기를 선택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이 이상한 낙관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굴러가기를 선택한다. 다람쥐 쳇바퀴를 잘도 재밌게 탄다. 다람쥐가 늘어나 쳇바퀴가 비좁아지면 새로운 쳇바퀴를 구한다. 그렇게 늘어난 쳇바퀴들을 다람쥐와 좀비와 술고래들과 사람 몇이 오고 가며 굴리고 노래한다. 멈추는 법을 모른다. 이게 다 뭔가. 사는 건 무엇인가. 다람쥐 쳇바퀴 구르는 일인가? 나를 찾는 여정인가? 목표를 세우고 이루는 과정인가? 누군가의 비명에 함께 아파하는 일인가? 행복의 의미를 깨닫는 일인가? 잘먹고 잘사는 일을 구현하는 일인가? 함께 웃는 일인가? 토하고 치우고 타인을 위해 밥을 짓고 먼지를 터는 일인가? 묻어둔 도토리를 잊어버려 숲을 창대하게 만들어버리는 일인가? 우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인가? 이제 ㅇ에게 사는 일은 그 모든 것이다. 멈추지 않고 구르는 이 집에는 그 모든 것이 다 있다. 집이 계속해 구르면서 사람들을 어디론가 데려간다. 그들은 구르는 집 안에서 술고래가 됐다가 다람쥐가 됐다가 좀비가 됐다가 사람이 됐다가 한다. 수시로 교대하고 변화한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가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가 우리가 누구냐고 싸운다.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다가 문득 이해하더니 갑자기 서로 끌어 안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어 인상을 쓴다. 이 구르는 집에서는 달리는 다람쥐도 드러누운 술고래도 어쨌든 앞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돌아가며 쳇바퀴를 굴린다. 작은 다람쥐는 자라서 노래하는 법을 배운다. 쳇바퀴 타는 법을 배운다. 혼자만의 쳇바퀴를 구르기도 하고 함께 구르다 멀미를 하고 내리기도 한다. 흐르는 건 시간이 아니다. 시간은 개념일 뿐이다. 이 집에서 흐르는 것은 존재다. 존재들의 마음이다. 그것들은 계속해 구르며, 만나는 것들을 튕겨내기도 하고 크게 끌어안기도 하고 세상을 헤맨다. 우리는 누구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네모난 집 네모난 침대에서 편안하게 고민해봐도 좋겠지만 결론은 나지 않는다. 흐르는 건 시간이 아니라 존재이기에, 결론은 일단 굴러봐야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은 다람쥐들은 신이 난다. 쳇바퀴를 신나게 굴린다. 집이 함께 구른다. 즐거운 주정뱅이들의 노랫소리가 날마다 울려 퍼진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미래. 함께 웃을 때 우리의 빛은 훨씬 밝고 따스하다. 그 밝고 따뜻한 빛 아래에선 우리의 그림자가 짧아진다. 비로소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되어 본다. 나여도 괜찮다. 당신이어도 괜찮다. 같이 구르자 이 쳇바퀴. 재밌어.


구르는 집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구르는 집에 사는 이 이상한 낙관주의자들은 넘치는 사랑 때문에 이끼마저 기르고 가꾼다. 그리고 종종 말려 죽이기도 한다. 집이 구른다. 그래서 그러려니.. 구르는 집에는 이끼가 끼지 않으므로, 여긴 이끼를 기르기엔 조금 어려운 집이려니... 그렇지만 몇몇 좀비는 분명 사람이 되기도 하는 집. 여기는 구르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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