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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남태령 발언 기고

  • 알록
  • 작성일시 : 2025-01-08 10:13
  • 조회 : 139

부깽의 고마운 제안으로 남태령에서 했던 발언을 뉴스레터에 싣게 되었습니다. 발언문 자체는 짧은데, 발언하게 되었던 과정을 함께 적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글이 길어졌네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광화문 집회를 마치고 따뜻한 국수 한 그릇 먹으며 배를 채웠는데, 남태령에서 계속되고 있는 대치 상황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집으로 그냥 돌아가기엔 무언가 마음에 걸려 친구와 남태령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트랙터는 자동차가 아니라 농업용 기계라서 도로를 주행하면 바퀴가 많이 상하고, 그 비용이 꽤 많은 부담이 된다고 들은 적 있습니다. 진격하는 트랙터는 상징적이기 때문에 강하고 멋져 보이지만, 가로막힌 상황이 농민들 안에서 또 좌절의 경험으로 쌓이고 마는 것 아닐까, 경제적 부담까지 떠안은 채로 춥게 돌아가는 일이 될 것 같아서 안타깝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경찰이 위협적으로 나오고 있어서 시위 피켓을 숨겨 가라는 등의 조언이 인터넷 상에서 공유되기도 했습니다.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채로 남태령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미 너무도 많은 인파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고 응원봉과 함께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트랙터는 반짝이는 조명을 트리에 걸듯이 둘러놓았고, 마이크를 들고 올라서면 임시로 만들어진 무대가 되었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고, 자리에 앉아서 자유발언을 들었습니다. 광화문에서도 자유발언대에 오른 시민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들으면서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무대에 서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남태령에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제 안에서도 하고 싶은 말들이 점점 샘솟았습니다. 저에게는 농사가 관심이 있고 소중한 영역이라 그런지 몰라도 여러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과 농업을 연결 지어 말할 때, 농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말을 덧붙일 때 정말 놀라웠습니다. 이렇게 멀리서 상경하는 농민들과는 그동안 농민대회에서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민대회에서 답답함을 느낀 적도 많았어요. 농사를 가치가 아닌 가격으로만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벗어날 순 없을까, 좀 더 재밌게 우리의 문장을 구호로 만들 순 없을까. 농업 안에서도 결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늘 있었습니다. 그날 밤, 다양한 시민들의 참여를 보면서 그 고민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꼭 농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았습니다. 이곳으로 달려온 마음에 대해 들을 때마다 경찰에게 가로막힌 자리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계속 넓어지는 것이 좋았습니다. 기존의 농민대회에서 자신을 퀴어라고 소개하거나, 농업 종사자가 아닌 사람이 바라보는 농업에 관한 이야기, 생계가 아닌 다른 이유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까요. 농민들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이야기 자리가 시민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커지고,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트랙터에서 내려와서도 마음 속에서는 말들이 계속 솟아올랐습니다. 할 수 없다고 느껴서 꺼내지 못한 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구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이 이렇게 다양한 시민들과 만난 경험은 처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태령은 농업이 안고 있는 과제들을 농민들만의 투쟁으로 고립시키지 않고 연결의 가능성과 연대의 상상력을 일깨워 준 시공간이 되어주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유발언을 했어요. 이곳으로 와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걸 농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꿉놀이로 치부되진 않을까, 그런 고민들은 남아있지만, 이 날은 농사를 짓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습니다. 두려움보다는 설레는 마음으로요. 맛집 줄처럼 길었던 자유발언 줄을 기다리며 핸드폰에 써 내려간 글을 옮깁니다. 


안녕하세요. 양평에서 왔습니다. 농사가 일상인 것이 좋아서 반은 농사짓고 반은 돈을 버는 다른 일을 합니다. 윤정부는 저와 친구들을 농부로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땅도 없고 농사의 규모도 작기 때문에요. 계엄령이 터지기 전, 지난 2차 농민대회를 마을 농부님들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수입 농산물은 마구 늘리면서 자국의 농부를 보호하지 않는 정책에 목소리를 내고 싶었습니다. 농부를 헐값에 넘기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날 목소리를 낸 일은 의미있었지만 아까 말씀하신 것 처럼 농민의 수가 현저히 줄어서 외로운 싸움이 된 것 같았습니다. 오늘 트랙터 끌고 오신다고 하셔서 걱정이 됐습니다. 그련데 이 자리에 너무나 많은 시민 분들이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감동입니다. 농사에서, 생태계에서, 사회에서도 다양성이 생명입니다. 농업에 대해, 시민이 살기 좋은 사회에 대해 농민들만이 아닌 모두가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1

살구 25-01-09 09:34

하고 싶은 말이 샘솟게 된 이야기까지 있어서 읽으면서 가슴이 벅차오르네요. 

알록이 그 곳에서 느꼈던 것을 저도 조금은 느낄 수 있을거 같아요. 

힘들지만 즐거운 투쟁하고 있다는 것도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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