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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고게시판 [읽기자료] 몬드라곤, 그 이후

  • 우마
  • 작성일시 : 2015-06-17 11:01
  • 조회 : 5,443

몬드라곤 탐방기

[협동담론] 거기에 몬드라곤이 있었네

문 제 갑

라온제나협동조합 감사

 

세계적인 직원협동조합그룹인 몬드라곤그룹. 협동조합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그룹의 태동과 성장의 역사를 공부한다. 수 년 전부터 ‘몬드라곤’을 공부해 오면서 활자 이면에 있음직한 사연이 궁금할 때마다, 형편이 된다면 직접 현장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마침 조선대학교와 몬드라곤대학이 서로 만나는 일정이 있어 동행하게 되니 도착도 하기 전에 이미 한껏 마음이 부푼 것은 당연지사.

 

산 속의 작은 마을, 몬드라곤에 가다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 지 2년 반만에 7,000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설립되었으니 가히 ‘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반면 성공한 협동조합-아직 성공을 말하기에는 매우 이르다는 반론이 있지만-을 찾기가 어려운 실정을 고려하면, 협동조합경영학을 가르치는 교육과정은 하루라도 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다. 그 요청에 조선대학교가 부응하고 몬드라곤대학이 화답을 한 셈이니 이 자체만으로도 우리나라 협동조합 발전에 공헌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었다.

 

공항에서 몬드라곤 시까지는 차를 몰고 1시간 30분쯤 달려야 한다. 차 창 밖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가옥들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온통 드넓은 초지와 숲 천지인데 그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지리적으로 대서양 연안에 있기도 하거니와 지반이 융기되어서인지, 아주 험하지는 않더라도 크고 작은 산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이 일대가 드넓은 산악지대임을 알게 해 주었다. 멀리서 보자니 온 산야가 거대한 골프장 같았다. 아무 곳으로나 공을 쳐도 OB 낼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드넓은 초지. 그리고 그 사이에는 밀밭들도 있어 밀들이 한 뼘씩 자라고 있었다. 다만 무리를 지어 풀을 뜯어야 할 말이며 양이며 소들은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목축업이 발달했다고 했는데 이 자(?)들은 대체 어디 있는 것인가? 더 깊은 산 속으로 숨은 것일까.

 

저녁 9시가 지나도 날이 어둡지 않았다. 아침 해는 7시 전에 떴다. 우리가 방문하는 동안 날씨는 내내 흐렸는데 3박5일 지내는 동안 해를 본 시간이라고는 구름 사이로 반짝 비친 10분이 전부였다. 간혹 이슬비가 내리기도 했다. 대서양이 코 앞이었지만 일정상 바다를 볼 수 없었다. 마지막 날 틈을 내어 인근의 항구 구경이라도 가보려 했더니 동행한 마틴(Martin) 교수 왈, “한국 때문에 조선 산업이 망해서 지금 항구는 매우 볼 품 없이 변했다”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공항에 도착해서 차량을 빌렸고, 산 길로 난 고속도로를 따라 차를 몰았다.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라도 지날 때면 갈색 지붕의 다가구주택들이 즐비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공동주택’ 정도 되는 듯했다. 의례 ‘언덕 위의 집’이나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을 기대했다면 여기는 분명 그런 곳이 아니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고풍스런 단독주택은 보기 어려웠다.

 

곰곰 생각해 보니, 산골마을에서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통하여 ‘가난을 벗어나 유럽에서 가장 평등한 마을을 만들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느 곳에서도 홀로 가난을 견디지 못해 쓰러져가는 초옥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으리으리한 대궐집도 볼 수 없었다.

 

사진1) 몬드라곤그룹 언덕에서 본 몬드라곤 시 전경.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이 바로 용의 산, 몬드라곤이다.

 

우람할손 용산(龍山)이여!

 

우리 말로 ‘용의 산(龍山)’이라 불리우는 몬드라곤은 해발 1,100미터에 달하는 큰 산으로 멀리서도 그 자태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산 정상은 하루 종일 구름에 싸여 있어 그 위용을 몰라보았으나, 언뜻 해가 비친 틈새로 잠깐 보았던 몬드라곤의 정상은 마치 정삼각뿔처럼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우뚝 솟은 기상이며 주위의 산을 휘하에 거느린 모양새를 보니 ‘용의 산’이라는 이름 그대로 명실상부하고 위풍당당했다. 몬드라곤 시는 계곡을 따라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게 자리 잡은 작은 산골마을이었다. 인구는 대략 3만이 조금 안된다고 했다. 1950년대 『울고』가 태동할 당시 인구가 8,000명 남짓 했다고 하니 지난 60년 동안 2만명 정도 인구가 늘어난 셈이다.

 

몬드라곤의 첫 인상은 평화로웠다. 작은 도시에 세계적인 협동조합그룹이 있어서 그런지 지나는 사람들에게서, 협동조합 안에서 살아온 자부심과 넉넉한 마음이 전해져 왔다. 초행 길인 데다가 네비게이션조차 스페인어로 된 것을 잘못 장착하는 바람에, 우리 일행은 내내 길을 찾아 헤맸다. 그때마다 길 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는데 한결같이 친절했다. 급기야 어느 연인 커플은 우리랑 말이 통하지 않자, 아예 우리 차에 동승하여 몬드라곤 대학 앞에 데려다 주고는 한참을 되돌아가기도 했다. 간간히 가로등이 비추는 밤은 고즈넉하고 평온했다. 서울의 가장 후미진 동네에서조차 흔히 볼 수 있는 네온사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밤을 수놓는 조용한 음악조차 들리지 않았다. 자연(自然)에 순응하고, 사람들은 그 품에 안겨 행복한 꿈을 꾸는 마을, 몬드라곤.

 

다만 우리나라 여느 시골 마을처럼 이곳에도 노인 인구가 많았다. 젊은이들은 아마 마드리드니 바로셀로나 같은 도시로 떠났을 것이다. 그리하여 몬드라곤은 청춘이 약동하는 젊은 도시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오히려 익숙하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젊은 일자리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가장(!)의 일자리 정도는 보장되어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돈 호세 신부님이 협동조합을 만들 때부터 ‘일자리’를 염두에 두고 추진해 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몬드라곤은 역사의 도시이며 이곳 사람들에게는 인생이 오롯이 녹아있는 삶의 터전 그 자체라 할 만하다. 마치 협동조합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갈 뿐 다른 선택은 생각할 수 없다는 듯이. 협동조합의 산실이자, 이 곳에 사는 누구라도 그들의 심장에는 협동의 피가 흐를 것만 같은 곳-우리가 만난 몬드라곤의 첫인상은 이랬다!

 

우리 식대로 협동조합을 돕는다

 

우리의 첫 방문지인 바스크주정부는 빌바오에서 보자면 몬드라곤 시를 지나 30분 정도 더 가야 한다. 34세 훤칠한 키의 젊은 여성이 주정부 사회적경제 책임자라고 했는데, 그녀는 이번 총선거에서 몬드라곤 시장으로 출마하여 거의 당선이 유력하다고 했다. 한국의 협동조합 현실을 설명하고 주정부의 지원정책이나 법 제도 등에 관해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의 후임이라고 했던가 전임이라고 했던가, 하여튼 알프레도라는 분이 하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외부의 지원은 협동조합에게 오히려 해가 된다. 우리가 하는 지원이란 협동조합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이며 직접적인 지원은 하지 않는다.” 옆에서 잠잠히 듣고 있던 마틴 교수가 이 대목에서 갑자기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협동조합에 돈을 직접 지원하는 정책은 “매우 나쁜 정책(Very very bad!)”이라면서 입을 삐죽거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마치 자동차 와이퍼처럼 검지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흔들어댔다.

 

오후에 바스크주정부를 떠나 몬드라곤 시로 들어오자, 책으로만 접하던 『라군아로』며 『이켈란』 같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반가움이란! 오늘 내일 일정 중에 이 곳에 다시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사진 한 장 찍어놓지 않은 것이 뒤늦게 후회됐다. 이번 일정에 『라군아로』며 『이켈란』 같은 곳은 방문 예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곳을 본 것만큼은 진짜 사실이다. 간판이나마 분명히 봤다! 몬드라곤그룹은 마을을 사이에 두고 용산(Mon Dragon)과 마주하는 산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들이 모여 있는 산언덕에 도착하니 『노동인민금고』 기업국을 모태로 하여 만들었다는 『몬드라곤HQ(헤드쿼터)』 관계자가 나와 영접해 주었다. 이 곳 역시 협동조합이다. 서울 남산의 절반 높이나 될까, 언덕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산 중턱에 몬드라곤의 여러 기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보니 건물들이며 거리며 모든 것이 마치 우리가 사는 작은 동네처럼 친숙하게 다가왔다.

 

사진2) 바스크주정부 책임자는 협동조합 정책에 있어서 바스크주정부는 몬드라곤 시와 완전 별개라고 말했다. 바스크주정부 산하에 몬드라곤을 포괄하고 있다. 사진 가운데 여성은 이번에 몬드라곤 시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바스크주정부 사회적경제 담당관이다.

 

몬드라곤HQ와 파고르(FAGOR) 연간 수십조 매출을 올리는 그룹치고는, 적어도 건물이나 간판만으로는 전혀 그런 낌새조차 알 수 없었다. 우리나라 유수의 재벌 그룹들을 생각하면 안 된다. 으리으리한 건물에 삼엄한 경계를 두고 뭇 사람들의 시샘어린 부러움을 사는 광경을 예상했다면 그건 오산이다. 소박하고 조용한 건물들이 오히려 내면으로만 알차게 속살을 채워가고 있는 협동조합의 민낯을 보는 듯하여 더없이 흐뭇하고 반가웠다. 벽돌로 별 치장 없이 세워진 건물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알뜰하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몬드라곤협동조합그룹은 모두 네 개의 다리가 나 있는 테이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 들어 익히 배운 바 있는 내용이다. 미켈 레자미즈(Mikel Lezamiz)라는 분의 설명을 듣고 있을 때 건물 안 기둥 앞에, 작지만 매우 신령스런 흉상(胸像)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서 보니 말로만 듣던 아리즈멘디아리에따 신부 흉상이 아닌가! 벅찬 가슴 안고 일행에게 사진을 찍어주도록 부탁했다. 이 때 찍은 사진을 숙소에 돌아와 보았더니 찍을 때 흔들려서 화면이 끔찍했다. 돌아가 다시 사진을 찍어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바스크주정부』와 『몬드라곤HQ』에 이어 『파고르전자』를 방문했다. “파고르전자가 망할 때 조합원들은 뭐했습니까?” “처음에는 연대기금을 풀어 도와주더니 다음에는 왜 안 도와주었습니까?” “회사가 어려워지는 신호가 분명 많았을 텐데 경영진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내 속 마음은 이와 같았지만, 물론 이렇게 대놓고 묻지 않았다. 최대한 정중하고도 매우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가며 살살 물었다.

 

“조합 평의회가 다소 강성이었던 것도 있었고…” 이 대목에서 더 많은 질문을 하고자 했으나 옆에 있던 마틴 교수가 유권해석을 내놓는 바람에 얘기는 더 진전되지 않았다. “조합평의회 성향이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90%의 원인은 이미 가전 산업 부문이 국제적인 경쟁으로 인해 수지가 회복불능 상태로 악화됐다는 점에 있다.” 파고르 연구소는 현재 파고르 가전부문 파산의 원인을 찾기 위해 조합원과 경영진 등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하는 노력은 앞으로 새로운 도전을 할 때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사진3) “몬드라곤그룹은 네 개의 다리 위에 선 테이블 구조와 같습니다.” 몬드라곤HQ 레자미즈씨의 설명은 마틴 교수가 이미 소개한 그대로이다. 하몽과 ‘한많은 대동강’의 밤 사진4) 이 분의 성함을 여쭈어보지 못했다. 노동인민금고에서 30년 동안 일하고 은퇴하여 지금은 돈 호세 신부님 기념사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5) 주인장은 만찬 내내 쉬지 않고 음식을 내왔다.

 

직접 담근 술까지 내오자, 일찍 마치고 들어가 자야겠다는 희망은 물거품이 됐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마음에 담아 왔다. 이 날 저녁에 뜻밖의 초대를 받았다. 『노동인민금고』에서 30년 넘게 일하다가 은퇴한 뒤, 돈 호세 신부님을 기념하는 기관에서 일한다는 분이 자택으로 우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것. 자택이라고는 하나 우리가 방문한 곳은 건물 주차장을 비집고 들어가 계단을 내려간 지하 벙커였다. 사면에 수 백 장의 사진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집집마다 파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구비해 놓고 사는데, 집이 큰 사람은 집 안에,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공간을 임대하여 행사를 치르곤 한다고. 거기에 비하면 지하 창고에 이 같은 파티 공간은 매우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주인장의 표정에서 그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는데 공간도 공간이려니와 이 분의 요리 솜씨가 정말 대단했다. “여기 남자들은 이 정도 음식은 누구나 할 줄 안다”고 해서 우리들 기를 죽인 것 빼고는 모든 것이 훌륭했다. 내오는 음식마다 정성이 들어있고 맛도 좋았다.

 

특히 차고 넘치게 내온 ‘하몽(돼지 뒷다리에 소금 간을 하여 말린 것)’은 알맞게 숙성되어 쫄깃하면서도 그다지 짜지 않아 모두들 실컷 먹었다. 와인이며 직접 담근 술까지 내놓는 바람에 예정 시간보다 훨씬 늦게까지 먹고 마시며 놀았다. 그런데 이 분이 궁금하다며 우리에게 한 질문이 조금 의외였다.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뭔가 부정적인 의견들이 오갈 듯한 분위기여서 다소 곤혹스러웠던 차에, 슬쩍 일어나 한 마디 거들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것, 생사를 모르고 헤어진 수백만 이산가족과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동포들의 심정을 담담하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는 음식에 대한 사례 겸 애틋한 심정을 담아 노래 한 곡 선사하겠노라고 했다. “Korea Traditional Music, So call as BBong-zzak!”이라는 소개와 함께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이런 것이었다.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철조망이 가로막혀 다시 만날 그때까지

아, 소식을 물어본다 한 많은 대동강아

 

그는 앞으로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며 따뜻하게 환송해 주었다. 날이 캄캄했으니 아마도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날 일정을 생각해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일과 공부를 함께,

 

알찬 몬드라곤 대학 둘째 날에 이번 여행의 주 행사인 『조선대학교』와 『몬드라곤대학』 간 MOU 체결식이 있었다. 모두들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나왔다. 스페인어로 된 네비게이션 때문에 운전에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우리는 오로지 감(感)에 의지한 채 몬드라곤 시내에 들어와 몇 바퀴를 헛돌아야 했다.

 

몬드라곤대학의 Atxa 총장은 생각보다 매우 젊었다.(Atxa를 어떻게 발음할까요? 정답은 ‘아싸’입니다!) 그리고 영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미스터 빈’을 쏙 빼닮았다. 그는 준비된 홍보 자료를 통하여 몬드라곤대학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뒤이어 조선대의 홍보영상과 비교해 보니 새 발의 피였다. 사실 조선대학교가 그렇게 훌륭한 대학이었는지는 이날 처음 알았다.

 

몬드라곤대학은 우리의 대학과는 규모나 시설 운영방식에서 매우 달랐다. 캠퍼스라고 할 것도 없었다. 작은 도로에 인접해 있는 건물이 몇 동 있고 건물들 사이에 그다지 넓지 않은 정원이 있었는데 그 한 가운데 돈 호세 신부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외형만으로 대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매우 지나친 오해이자 결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몬드라곤대학은 적어도 협동조합 관련 분야에서 세계 최고수준의 대학인만큼 그에 합당한 예우는 당연한 것이었다. 몬드라곤대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학문과 노동을 병행한다는 점일 것이다. 확실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바를 해석하자면, 대개의 학생들은 어느 한 두 군데의 협동조합에 소속돼 있으면서 일과 공부를 병행한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조선대 관계자 분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아싸 총장은 내내 조선대 현황을 궁금해 했고 질문이 많았다. 아마도 조선대와 MOU 체결에 큰 기대를 거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흐뭇한 일이었다. 이대로만 잘 진척되면 내년에는 조선대학교에 협동조합 전문가 양성과정이 개설될 수 있을 것이다.

 

아싸 총장이 주재하는 점심 식사를 위해 우리는 다시 몬드라곤 언덕에 올랐다. 음식점은 몬드라곤그룹이 있는 산 꼭대기에 있었는데 일반 가정집을 식당으로 개조한 것 같았다. 식당 주인은 지금의 몬드라곤 그룹이 있는 땅의 원 주인이었다고 한다. 멀리 용산이 보이고, 아래로는 몬드라곤 시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언덕 위의 작은 집에서 몬드라곤 시를 내려다 보며 꽤 긴 시간 동안 식사를 했다. 이 때 나온 음식이 무엇이었는지는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주 밖으로 나와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담소를 나누었고 시 전경과 용산에 취해 있는 동안,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관심조차 가지 않았다.

 

사진6) 언덕 위의 작은 집에서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셨지만 정작 우리는 용산의 자태에 취해 버렸다.

 

사진7) 몬드라곤 대학 교정에서 아리스멘디아리에따 신부와 함께. 협동조합 간 협동의 산실, 『오이나리』

 

사진8) 협동조합끼리 서로 돕는 협동을 ‘연대’라고 부른다. 우리의 신용보증기금과 같은 『오이나리』는 ‘연대’의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오후 3시가 넘어서 우리 일행은 『오이나리(Oinarri)』를 방문했다. 일종의 신용보증기금이었는데 스페인에서 대략 3등정도 하는 매우 큰 단체였다. 이곳이 바로 스페인 협동조합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나라는 물론 이곳 스페인에서도 협동조합들에게 자금 부족은 고질적인 어려움이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서 협동조합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구상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터였다.

 

“협동조합들을 위해 어떤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까?” “사업자금이 필요할 때 여기서도 은행 대출은 쉽지 않습니다. 은행이 대출 가능하도록 신용을 보증하는 업무를 합니다. 수 백 개의 협동조합들이 매년 우리를 찾아옵니다.” “보증 심사 때 주로 어떤 면을 평가기준으로 하나요?” “물론 재무제표나 사업실적 같은 지표를 살펴봅니다.” 보통 보증 업무는 사업성이나 상환 능력 같은 것을 검증하기 위해 재무제표나 사업실적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협동조합이라면 돈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인 기업이니 최고경영자의 의지나 생각이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물었다. “협동조합 경영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사업 성패에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런 점을 평가 지표로 고려하기도 하나요?” 이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마틴 교수가 “Good question!”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최고 경영자의 신용이나 사업 의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도 그런 점을 고려하여 심층 인터뷰를 통해 최고 경영자의 의지와 신용도를 확인합니다.”

 

『오이나리』를 이용하는 업체는 협동조합에 국한되지 않았다. 일반 주식회사 신청자 수도 매년 100개 업체가 넘는다는 것을 도표로 보여주었다. 얘기가 무르익을 무렵 『오이나리』의 이사장이 등장하여 얘기를 거들었다. “성격으로 볼 때 어떤 유형의 협동조합들이 이 기관의 도움을 요청합니까?” “90% 이상이 직원협동조합입니다. 바스크 지역 말고도 여러 곳에서 우리를 찾아오죠.” “기금은 어떻게 조달하셨습니까?” “바스크주정부가 자금의 일부를 대 주었습니다. 유럽공동체(EC)도 산하 기관을 통해 자금을 지원했고요. 그러나 무엇보다 각 분야의 협동조합연합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돈을 모아 기금을 조성한 것이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협동조합의 힘이었다. 협동조합 간 협동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로서는 요원한 이야기이나 언젠가는 우리도 스스로 자금을 모아 기금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나 자치단체도 이런 기금 조성에는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직접 지원하는 것을 피하는 대신, 법과 제도로써 얼마든지 협동조합들을 도울 방법은 있다. 당장 귀국하면 광주시청에 이 제도의 도입을 적극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의회는 “협동조합 지원책을 내 놓으라”고 성화인데, 무턱대고 사업자금을 지원할 수도 없는 바에야 신용보증기금 조성을 위한 예산 편성은 충분히 타당성 있는 제안이 될 것 같았다.

 

『오이나리』는 몬드라곤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도시에 있는데, 그 도시라고 해 봐야 허허벌판에 듬성듬성 건물이 몇 개 놓여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여의도를 보자면, 빼곡히 금융기관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과는 전연 딴판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여기는 산촌 마을이니 대도시가 있을 리 만무하고 공장이든 금융기관이든 밀집해 있을 이유도 없다.

 

몬드라곤 광장에 서다

 

사진9~12) 몬드라곤 광장과 성당의 모습

 

『오이나리』를 끝으로 짧은 공식 일정은 마무리됐다. 이미 저녁시간을 넘겼는데 마틴 교수는 그 다음날 다른 팀을 이끌고 일정을 소화해야 하므로 일찍 마무리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에게 몬드라곤은 너무나 먼 당신이기에 한번 온 김에 촌음을 아껴 다녀볼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꼭 한 군데 더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었으니, 돈 호세 신부가 계셨던 성당이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을 보지 않고 귀국했다가는 반드시 후회할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몬드라곤 시로 향했고 마틴 교수는 우리 일행을 성당이 있는 몬드라곤 광장으로 안내해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비로소 몬드라곤 주민들을 만난 셈이다. 공식 일정을 소화하느라 주민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들여다 볼 기회가 없었다. 광장을 거니는 사람들,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건물들 사이 골목길 풍경까지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았다. 광장은 몬드라곤 시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곳이다. 그다지 넓은 곳이 아니었으나 아이들 뛰어노는 모습이며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 정겨웠다. 요란한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가지런한 간판과 반듯반듯한 건물 그리고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참 평화롭다고 느꼈다.

 

그러나 조용하기만한 광장 한 쪽에서 전혀 뜻밖의 사람들을 만났다. 마틴 교수 설명으로는 이른 바 ‘테러리스트 가족’들의 항의 시위라는데, ‘테러’를 당한 가족들의 시위가 아니고, ‘테러리스트 가족’들의 시위라고 해서 의아했다. “바스크 분리독립주의자들의 가족입니다. 아마도 불법적인 테러 행위를 한 것 같은데 그 가족들이 면회 금지에 항의하여 시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호를 외치거나 집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조용히 광장을 빙 둘러서 샌드위치 판넬을 목에 걸고 서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귀국하여 인천공항을 빠져 나오자마자 확성기로 노래를 틀어놓고 시위를 벌이는 우리네 현실과는 무척 달랐다. 사연을 자세히 묻고 싶었으나 이미 시간이 제법 흘러 하는 수 없이 자리를 옮겨야 했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아리스멘디아리에따 신부가 봉직했다는 성당은 건물 벽면에 작은 팻말 하나가 있을 뿐, 특별히 기념될 만한 곳이 없었다. 그나마 문이 닫혀 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잠시 고개를 숙여 추념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내부에 신부님의 흔적을 구경하지 못한 실망감도 컸다. 빌바오에 있는 숙소로 돌아온 시각은 대략 밤 9시가 넘었을 때였다. 날은 아직 훤해서 돌아다닐 만했지만, 조선대 대학원장님과 담당 교수님 방에 찾아가 그간의 수고로움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얘기하다 보니 밤 11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고국에서 가져온 컵 라면으로 그날 저녁을 때웠다.

 

『에로스키』, 내 다시 너를 만나리 사진 

 

13) 우리 사업과 가장 밀접한 『에로스키』를 만나지 못하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차 창 밖으로 스친 에로스키 매장의 모습.

 

짧은 일정과 내부 사정 때문에 『에로스키』를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스치듯 에로스키 매장을 보았을 뿐이다. 일정이 촉박하다 보니 방문한 곳마다 대화시간이 부족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특히 몬드라곤HQ가 그랬다. 연합협정에 대한 내용이며, 협동조합 간 협동의 실제 사례들 그리고 위기의 순간마다 경영진과 조합원들이 어떤 논의를 통해 이를 극복해 왔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번 방문을 결산해 보자면, 역사의 땅 몬드라곤을 직접 보았다는 것 말고는 오히려 그에 대한 궁금증이 더했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협동조합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한 가지 방편일 뿐, 결국 그 내면을 보자면 그들의 삶 속에 뛰어들어 보는 수밖에 없다.

 

다음에 다시 온다면 몬드라곤의 주인들, 몬드라곤협동조합의 주인공들을 만나 얘기하고 싶다.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는 몬드라곤협동조합의 역사만큼이나 후학들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생한 산교육이 될 것이다.

 

멀기도 멀지만, 특별한 위락시설 하나 없는 이곳에 온다고 결심하기 위해서는 오직 협동조합의 역사적 현장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열망 하나만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과 꿈꾸는 미래에 관심을 갖는다면, 이곳의 경험은 스페인 그 어느 곳보다 보람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다.

 

이참에 <몬드라곤 여행>을 위해 계를 부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14) 빌바오 최대의 관광지이자 세계적인 미술관인 구겐하임 미술관 앞에서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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