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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하승우, <왜 지금 빈집인가?> 강연원고 및 속기록

  • 지음
  • 작성일시 : 2012-12-17 03:43
  • 조회 : 5,605

지난 13일 화요일에 있었던 하승우 선생님의 강연 자료입니다. 


하승우 선생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원고와,

크트와 경목이 기록한 강의록,

그리고 제가 빈집 소개 겸해서 작성한 간단한 표를 파일로 첨부합니다.


20121213 하승우 왜 지금 빈집인가.hwp

하승우 강의록-20121213.hwp

20121213 지음 왜 지금 빈집인가.hwp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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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3 ‘해방촌 빈마을 길을 묻다’ 세 번째 자리


왜 지금 빈집인가? : 소유에서 공유로, 하나에서 여럿으로



하승우



빈집과의 만남
주인없는 집, 빈(貧)집, 비어있는 집, 손님들의 집. 빈집의 홈페이지에 처음 접속한 날 충격에 빠졌다. 아니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었다니... 2009년 3월에 다중지성의정원에서 아나키즘 강좌를 할 때 마지막 시간을 빈집에서 가졌다. 그 때의 설레임이란... 낯선 풍경의 해방촌 거리를 걸어가며 빈집의 모습을 상상했다. 빈집에 막 들어섰을 때의 그 충격은.... 별로 없었다. 그냥 집이었다. 수시로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특이했을 뿐, 곳곳에 붙은 알림판이 눈에 들어왔을 뿐, 맥주가 맛있었을 뿐, 집은 평범했다. 그 기억은 그렇게 간직된 채 지나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우연 또는 필연으로, 아나키즘 강좌 마지막 워크숍을 빈가게에서 하게 되었다. 빈집이라는 이름을 주제로 내걸었지만 나는 외부인이기에 빈집에 관해 말할 게 별로 없다. 빈집 홈페이지를 스토킹하고 빈집에 관한 논문을 읽고 빈집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몇 개의 보고서들을 읽었지만 빈집에서 생활하지 않는 내가 체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빈집은 그냥 미끼일 뿐이다. 내가 할 얘기는 그냥 내가 아는 이야기, 내가 생각하는 삶, 내가 생각하는 사상, 내가 느끼는 바에 관한 것이다. 어쩌면 빈집과 우리집 사이의 어떤 다양한 변주에 관한 것일지도... 변주이기에 이 글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그냥 느낌이다.

우리집, 빈집, 한국사회: 소유에서 공유로
우리집은 빈집이 아니다. 문이 열려 있지도 않고 같이 사는 사람도, 당연히 장투, 단투도 없다. 나랑 각시랑 애기 셋이 산다. 셋이 살기에 넓은 집이라 가끔씩 사람들을 재운다. 모르는 사람들이 자지는 않고 주로 아는 사람들이 잔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도 원래부터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고 지금도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잠만 자는 건 아니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런다. 자기 공간이 아니니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며 돈을 내지는 않는다(애가 생기고 나서는 집에 사람들이 잘 안 온다).
우리집에서는 ‘우리’라는 범주가 문제인데, 관계가 없으면 우리로 묶이지 않는다. 더구나 나는 손님을 좀 가린다. 좀 까칠한 성격이다. 관계가 생기면 우리가 되고 같이 먹고 자고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남이다. 남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남을 굳이 포함하고 싶지도 않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되고, 남에서 점 하나 빼면 님이 되고, 인간관계는 그런 거라 생각한다. 점을 빼고 찍을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되는가는 관건이지만...
뭐라 정당성을 부여해도 너는 네 집에서 산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미안하게도 우리 집 권리는 각시에게 있다.^^ 게다가 나는 우리집 서열 3위이다. 솔랑군, 각시, 나. 내가 우리 속에 있지만 나 없는 우리는 없다. 뭐, 그런 주의이다.
아이가 생기면서 집에 짐이 많아졌다. 우리 집엔 책장을 빼면 가구가 없다. 있는 가구는 원래 있던 것이었다. 그런 공간에 애가 태어나고 동네 사람들이 책, 장난감, 옷 등을 주면서 짐이 계속 늘어난다. 그래서 물려받은 걸 다시 물려줄 생각도 하는데 받을 사람이 마땅히 없다. 우리 애가 늦은 탓도 있지만. 우리는 원하니 왕창 받고 원하는 사람은 없으니 ‘순환’이 안 된다. 우리의 문제일까?
예전에 아는 사람들과 ‘지행네트워크’라는 단체를 만들고 공간도 구했다. 3층 공간이었는데 2층이 중국집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참 따뜻했다. 단체를 만들면서 처음부터 한 생각은 우리만의 공간으로 만들지 말고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며 자연스레 섞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공간을 쓰고 싶다면 무조건 열쇠를 복사해서 나눠졌다(지금도 누군가는 그 열쇠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아무런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어느 날 문을 열고 난장판을 목격했을 때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잘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한 때는 쥐가 출몰해서 다른 사람들의 격한 반응을 유발하기도 했다. 그 때도 문제는 순환이었다. 열쇠를 물려받을 사람이 줄어들고 책임을 분담하지 않다보니 스트레스가 쌓여 갔다.
그러다 돈 많은 건물주에게 계속 월세를 주는 건 부자들을 살찌우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공간을 뺐다. 공간에 있던 짐들은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이 싣고 갔다. 그렇게 실험은 끝이 났다. 하지만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빈 공간이 아니라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이었다. 공간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형성될 거라 여겼던 관계는 잘 형성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는 건 사람이다. 지금도 그때 만난 사람들이 가끔씩 보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는 건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적’인 것을 강요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할 뿐 아니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고 이긴 자만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러니 가진 게 중요하다. 이런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빈집은 ‘섬’이 된다. 그리고 섬은 육지 것들의 식민지가 되기 쉽다.
흔히 소유를 바꾸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유를 내세운다. 그런데 공유가 뭘까? 공유는 公有이면서 共有이어야 한다. 公이 私를 배제한 개념은 아니다. 그건 私와 다른 개념일 뿐이다. 다르다는 것이 차별과 배제를 뜻하지 않듯이, 공유는 사유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공유는 그 있음(有)의 방식이 다르다. 사유가 홀로 가지는 거라면, 공유는 함께 누리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마을에서 공유지는 같이 경작하고 함께 나눠 쓰기 위한 것이었다. 나도 아는 사람들과 지방으로의 이주를 위해 곗돈을 붓고 ‘마을지갑’이라는 형태로 활용하는데, 그것도 일종의 공유지이다. 쓰임새는 사람들이 모여 결정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빈집과 빈마을에서 마을활동비의 의미가 궁금하다. 제목은 마을활동비인데 그 쓰임새는 마을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빈집이 생각하는 마을의 범주가 매우 크다는 건데. 정말 빈마을이 존재한다면 마을활동비가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최근 빈집이 청년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얘기되는데, 빈집이 그런 공간일 수 있지만 꼭 그래야 하는지도 궁금하다. 만약 서울시나 다른 곳이 싼 주거공간을 제공하면 그곳으로 갈 건가? 어찌 보면 빈집의 정체성은 주거를 ‘통한’ 새로운 관계 만들기, 자기변화가 아닌가? 자본주의를 거스르는 삶이 아닌가? 그냥 주거공동체는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위기를 지속시키는 것이기도 한데... 빈집이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빈집의 대안은 무엇일까? 빈집의 정체성이 사람들로 만들어지지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있는 것은 다르다. ‘누구의’ 빈집일 필요는 없지만 ‘어떤’ 빈집인가에 관한 고민은 필요할 텐데... 그리고 우리는 규정되고 싶지 않아도 규정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꼭 손님을 환대해야 하나? 도로시 데이는 『환대하는 삶』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오, 어쩌면 우리는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에서 거울 속을 응시하면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서로에게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 짓고 있는 죄 말입니다. 점심시간에 우리를 찾아오는 손님을 포함해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물러서 있지 않으려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서는 것이어야 함을 깨달았던 어느 날이 기억납니다. 평소 같으면 잘 해냈을 일로부터도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죠. 누군가의 너그러운 마음은 그 사람의 교만함을 가려 주는 가면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 이제 기도합시다. 기도가 싫다면 다른 건 뭐가 있을까? 빈집에는 어떤 과정이 있을까?

그래, 문제는 정치야!
올해 근 10년을 다니던 대학을 관뒀다. 이런저런 이유가 많았지만 타율적인 노동을 하기 싫어서였다. 어쩌면 목표가 눈앞에 있어서였을 수도 있다. 외부 프로젝트가 아니라 대학이 주는 월급을 받았던 때가 2011년이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만 하면 공부를 ‘직업’으로 삼은 이들이 목표로 삼는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런 때였기에 나는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라는 게 꼭 회의에서만 구현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니, 민주주의는 회의나 생활만이 아니라 노동에서도 구현되어야 한다. 남의 밑에서 굴욕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이 일상에서 민주적인 시민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건 모순이다. 학교에서 시민교육이라는 걸 맡았는데, 나는 시민으로 대우받고 있나, 시민으로 살고 있나, 지는 그렇게 못 살면서 학생들에게는 뭐라 그러고, 이게 무슨 뭐같은 경우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확 관둘 수 있었다.
예전에 돈을 좀 벌 때는 ‘보험’이라는 걸 들었다. 보험회사에 드는 보험은 아니고 사람들에게 든 보험이었다. 돈을 많이 벌었어도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이 별로 없었다. 후배들이 밥 먹고 싶다면 밥 사주고 술 먹고 싶다면 술 사주고 형편이 어렵다 그러면 그냥 돈을 줬다. 시민사회단체들에 후원도 많이 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겠지, 사회가 좀 좋아지면 내가 살기도 편하겠지, 그게 보험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즐겁고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었기에 보험을 드는 과정이 즐거웠다. 물론 위험부담은 크다.^^ 그리고 요즘처럼 벌이가 없을 때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학교를 관둔 후에 계속 모임을 만들었다. 같이 공부하는 모임을. 여러 개의 모임을 하고 있는데, 즐겁다. 그런데 모임을 통해 돈을 벌진 말자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뭘 하냐? 알바를 한다. 이게 은근 악순환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전혀 생뚱맞은 알바를 하는 건 아니고 내가 관심 있는 자치나 풀뿌리 쪽 일을 하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흔히 우리는 스타일을 중시 여긴다. 나는 그런 스타일이 없다. 머리 깎으러 갈 때마다 난감한 질문이 “어떻게 깎아드릴까요?”이다. 그러면 그냥 알아서 깎아주세요라고 답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헤어스타일이 내 정체성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런 거 따질만한 외모도 아니다). 하지만 누가 나의 인간됨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는 좀 진지해진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슷하다고 본다. 자치는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집요하게 던지는 과정에서만 가능하다. 회의를 자주, 많이 한다고 자치하는 건 아니다. 그 이전에 자신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우리가 정말 동료인가? 동료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런 물음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일이 놀이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정치이다. 목수가 집을 짓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지만,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이다. 목수의 기술이 아니라 그 집에서 살 사람들의 욕구가 집을 성격을 결정한다.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놀이를 통한 즐거움과 일을 통한 보람이 반드시 달라야 할 필요도 없지만 꼭 같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몇 일 밤을 새면서 한 일의 성취감과 몇 일을 놀았던 즐거움은 좀 다른 결이다.
예전에 무슨 3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봤는데, 무박 몇 일로 훈련을 하는 군인들이 나왔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그런데 그 훈련을 마친 군인들은 엄청난 동료애와 자기만족감을 보였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저런 느낌을 왜 군대에서 받아야 할까? 어느 순간 우리는 힘든 것을 피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꼭 피해야 하나? 누군가는 소도 키우고 뭘 치우고 해야 할 텐데...
관건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삶을 이어가는 방법이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여러 사람의 힘이 모여야 한다. 빈집은 그럴 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구상을 하고 있나? 빈고가 그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빈고가 뭔가 새로운 자급양식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빈고는 그냥 빈집을 유지하고 늘이는 역할을 할 것 같다. 요샛말로 얘기하면 ‘착한 자본’?(미안!^^;;) 착한 자본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착한 자본은 누군가에게 그냥 자본일 뿐이다. 착함은 내부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평가일 뿐이다. 빈고의 지향은 뭘까?
그리고 빈집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좀 궁금하다. 한국사회는 너무 주인이 분명한 곳 아닌가? 주인 없는 빈집의 투숙객들이 공간을 공유할 뿐 아니라 삶을 공유하는 존재라면, 빈집은 반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런데 내 속에 스며든 자본주의, 내 속의 꿈틀거리는 욕망을 조절하는 건 쉬운 과정이 아니다.
그리고 삶을 공유하는 과정은 무척 피곤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 피로함을 좀 줄이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과정이다. 모든 공동체에는 탈퇴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아울러 탈퇴한 사람이 잠시 머물 수 있거나 이주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준비가 필요하다. 빈집은, 아니 빈집의 투숙객들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옛날식으로 얘기하면, 아나키스트들은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이 바뀌지 않으면, 먹고 일하고 생활하는 장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는 단지 우두머리만 바꿀 뿐이다. 무정부주의라는 말이 가리는 또 다른 의미는 아나키즘이 임금제도와 사적 소유권, 대규모 공장노동, 지나친 도시화를 반대하는 사상이라는 점이다. 우두머리 없는 사회는 왕이나 대통령의 목을 벤다고 실현되지 않는다. 존엄하게 일하고 자유와 자율성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만 아나키즘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

함께 살자?
빈집이 꼭 마을이어야 하나? 정주하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이라 여긴다면 그곳이 꼭 마을일 필요는 없다. 빈집, 빈가게, 빈마을을 잇는 결정적인 동선은 무엇일까? 지켜보는 나로서는 그 동선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사는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지...
사실 공동체는 하나이지만 코뮨은 하나일 수 없다. 아니, 코뮨은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아나키즘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작은 공동체’라는 생각이다. 권력이 없어져야 하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사는 작은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사상이라는 편견이다. 하지만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작은 공동체가 아니라 국가와 전 지구의 변화를 꿈꿨고, 지구상의 단 한 명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면 나는 자유로운 게 아니라는 바쿠닌의 얘기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먼 거리를 돌아다니며 혁명의 불씨를 지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꼼뮨들의 꼼뮨을,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을 꿈꿨다. 아나키스트들이 꿈꾼 건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들의 꼼뮨이었다. 꼼뮨에서 인간의 자아와 자유는 제한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자아와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꼼뮨들의 꼼뮨을 통해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고, 억압적이지 않고 존엄한 노동질서를 만들며, 더불어 살고 함께 누리는 관습과 문화를 지키는 것, 그것이 아나키즘이 꿈꾼 세상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왜 작은 공동체들이 지속될 수 없고 실패하는가라고 물으면서 종교적인 규율이나 소수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공동체들이 결코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자율적인 삶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꼼뮨은 작아야 하지만 그것이 폐쇄적이거나 물리적인 거리로 측정될 수는 없다. 프루동이나 크로포트킨이 연방주의를 궁극적인 대안이라 봤던 건 공동체의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어야 버틸 수 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어야 흘러넘치지 않는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람들이 다양해질수록 다양한 성격의 빈집이 필요하다. 도시는 그런 공간이다. 함께 살자는 구호가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여럿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여럿을 누가 선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국가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그럴싸한 형태를 자본이나 국가가 제공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하나도 여럿도 아니다. 비어 있으면서 열려 있는 삶이 그렇게 실현될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는 고정된 경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런 경계를 만든다. 경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도 경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명제가 모순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자연적이지 않은 사회에 살면서 자연스러움을 기대하는 것도 비슷한 모순에 빠진다. 똥인지 된장인지를 알려면 찍어 먹어봐야 한다. 모순을 깨는 사유는 불가능하다. 한번 찍어먹어 봐야지. 찍어먹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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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3 ‘해방촌 빈마을 길을 묻다’ 세 번째 자리

왜 지금 빈집인가? 왜 지금 빈집이 아닌가?
지음



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 세가지 교환양식, 자본=네이션=국가


 

통제

 

불평등

B : 재분배

A : 호수

평등

C : 교환

D : X

 

자유

 


A

증여와 답례

네이션

우애

공동체

국가사회주의(공산주의)

생시몽, 라살

B

탈취와 재분배

국가

평등

국가

복지국가자본주의(사회민주주의)

사민주의

C

상품교환

자본

자유

도시

리버럴리즘(신자유주의)

고전경제학

D

X

X

X

X

어소시에이션 / 꼬뮌

프루동, 맑스


    각각의 상호관계 
    자본=네이션=국가(A=B=C)의 삼위일체, D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바가 없다.
    B가 약해지면 D도 약해진다.
    D에 대한 실망이 A, B, C로 향한다.



빈집?


 

통제

 

불평등

B : 복지시설

A : 공동체

평등

C : 숙박업소

댓글 2

손님 12-12-25 01:25

강연 정리된 글, 속기록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한해 마무리 건강하게 하고, 크리스마스 파티 중이려나? 즐겁게 놀고. ㅋㅋ 새해 복 많이 받고~  -우마

손님 12-12-27 04:13

보고만 가면 어떻게? 놀러와야지!! 연구소에도 와봐야지! 엄청 반갑네. ^^ 27일 김신양샘 강연은 그냥 와라! - 지음


  • 전화  010-3058-1968 계좌  기업은행 010-3058-1968 (예금주 : 빈고) 이메일  bingobank.or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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