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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해방촌 빈집, 빈가게, 빈고 - 빈마을 이야기

  • 지음
  • 작성일시 : 2013-03-01 02:01
  • 조회 : 9,817

얼마전에 <한국도시연구소>라는 곳에서 내는 잡지 <도시와 빈곤>에서, 

청년주거문제와 관련해서 빈집의 얘기를 좀 써달라고 요청이 와서... 

빈마을의 간략한 역사를 정리해본다는 생각으로 작성해 봤습니다. 

원고료는 도서상품권 3장 ㅠㅠ

 

재미로 읽어보시지요. 

나름 빈집을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는 약간의 감을 잡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의견주시면 정말 감사하지요. ^^

 


 

해방촌 빈집, 빈가게, 빈고 - 빈마을 이야기

- 공유, 자치, 환대를 실천하는 공동체들의 공동체

 

지음(우주살림협동조합 빈고 비서)

 

빈집의 시작, 빈집들이

 

2008년 2월 해방촌 게스츠하우스 '빈집'은 아주 단순한 설정으로 시작했다.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상업적인 게스트하우스(guesthouse)가 아니라 손님들이 주인이 되는 손님들의 집 게스츠하우스(guests' house). 시작은 세 명의 백수들이, 방 세 개 짜리 평범한 가정집을 임대해서 살면서 문을 열어 놓은 것이 전부다. 처음 입주한 당일은 이사짐을 나르지 않아서 정말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집에서 파티를 열었다. 보통의 집들이는 집주인이 집을 꾸며놓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파티는 비어있는 집에서 누가 이 집의 주인으로 살 것인가를 얘기하는 자리여서 빈집들이라 했다. 파티는 열심히 놀 작정을 하고 온 친구들 덕분에 2박3일동안 시끌벅적하게 진행됐고 20~30여명이 잠을 자고 갔다. 여기서 빈집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이 때의 에너지와 관계들이 기반이 되어서, 친구들과 친구들의 친구들에게 소문이 퍼지면서, 장기투숙객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빈집은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주인들을 들이는 집으로서, 여전히 빈집들이 중인 셈이다.

 

방은 세 개 뿐이었는데, 장기투숙객들이 살면서도 늘 단기투숙객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여자방, 남자방, 손님방 이렇게 나눴다. 장기투숙객들이 여자방 남자방에 나눠살고, 처음 오는 사람이나 단기로 머무는 손님의 경우를 배려해서 손님방에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손님방은 단기투숙객들이 없을 때는 장기투숙객들이 혼자, 커플끼리, 모임끼리 같이 쓰는 다목적 방으로 활용했다.

 

집은 전세 12000만원이었는데, 두 사람이 살던 집의 전세보증금 4000만원과 대출금 8000만원으로 계약했다. 8000만원에 대한 이자가 40만원이었는데, 여기에 공과금 10~20만원까지 해서 60여만원을 모든 주인/손님이 자율적으로 나눠내기로 했다. 보증금은 당연히 자기 집에 묻어두는 것이므로, 두 사람의 출자금에 대한 보상은 하지 않고, 똑같은 기준의 분담금을 내기로 했다. 첫 한 달 동안의 투숙객 수를 계산해서 대략 계산해봤다. 한 사람당 2000원을 내면 약간 부족하지만 조금 더 내는 사람이 있다면 적자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모두가 주인이므로 모두가 돈을 내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주인이므로 집으로 돈 벌지는 말자는 원칙을 정했다. 다달이 정산을 해서 흑자가 되면 그냥 나중을 위해 쌓아놓고, 적자가 되면 그 달에 산 사람들이 조금씩 더 분담해서 채워넣기로 했다.

 

하루 2000원, 한달 6만원 이상의 분담금은 숙박비로 치자면 극히 낮은 금액이다. 참고로 한국의 일반 상업게스트하우스와 비교하면 약 1/10, 극빈 주거 시설인 쪽방에 비해서도 약 1/2 이하다. 이윤이 없고, 자본을 공유하고, 임금노동이 없고, 나눠 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일상적인 삶들은 각자가 백수들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소비를 줄이자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거의 모든 밥을 해 먹고, 채식을 중심으로 먹고, 전기와 물을 아끼고 재사용하고, 쓰레기더미 속에서 쓸만한 물건들을 노획하고, 이동은 자전거로 하고, 집과 동네와 뒷산에서 놀 수 있는 궁리들을 하면서 지냈다. 채소를 살 돈을 아끼려고 옥상텃밭 농사를 시작했고, 술값을 아끼려고 막걸리와 맥주를 만들어 먹었다. 물을 아끼고, 거름을 얻자고 옥상 직립 변기를 만들었다.

 

구성원들의 나이대는 20~30대가 대부분이지만 10대와 40~50대도 있으며, 성별은 거의 항상 남녀가 비슷한 정도였다. 각자는 분담금을 모아서 낼 뿐, 각자 자기의 일을 해서 수입을 얻었다. 낮은 빈집의 생활비 덕에, 수입이 변변치 않은 백수, 활동가, 상경한 학생, 여행자 등이 많았고, 정규직들도 일을 쉽게 그만두고 같이 놀기를 선택하곤 했다. 커플이 같이 살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고 아기와 같이 살기도 했다. 길에서 살던 고양이들도 여러마리가 들어와서 세 마리는 일찍이 정착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고, 누군가 양육비를 주며 맡겼던 개와, 음식물쓰레기를 먹어주던 지렁이들도 함께 사는 식구였다.

 

 

빈마을의 형성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고, 누구라도 주인이기에, 처음 들어올 때도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거나, 누구도 다른 주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정원이 정해져있지 않고, 좁아도 들어오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들어오고, 살 수 있을 때까지는 살아본다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렇게 8개월이 지나자 10명이 넘는 장기투숙객들이 살게되었다. 손님방은 물론 거실에서도 장기투숙객들이 살게 되면서, 단기 손님을 받는 일이 어려워졌다. 빈집이 꽉 차버렸다. 빈집이 더 이상 빈집이 아니게 되었다.

 

더 이상의 손님, 더 이상의 주인을 받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집을 더 늘일 것인가? 논의 끝에 우리는 2000만원을 더 대출받아서 새 집을 구하기로 했다. 사람이 더 올 수 없으면 빈집이 아니기 때문이고, 먼저 온 주인만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결국 빈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빈집을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 집을 구하기 시작했는데, 살림집을 구하느니 방이 딸린 가게에서 장사하면서 사는게 낫다는 부동산 주인의 제안으로 아예 가게를 구해버릴까하는 제안도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빈가게에 대한 꿈은 부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빈집과 5분도 안 걸리는 동네에 두 번째 빈집을 계약했다. 이번에는 보증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제 전셋집이 아니라 월셋집으로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집은 방이 더 작고, 더 오래된 집이었지만 월세와 이자를 더 하면 첫 번째 집보다 월 주거비는 더 비쌌다. 새 집에는 커플들이 사는 방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커플들이 살면 아무래도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더 강했다. 월세가 부담이 됐는데,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그룹이 결합해서 방 하나를 쓰고, 첫 번째 집과 재정을 통합해서 운영하기로 했다. 집이 두 개가 되면서 언덕 아래 첫 번째 집을 아랫집, 두 번째 집을 윗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석 달이 안 돼서, 세 번째 집이 시작했다. 이 집은 빈집 사람들과 친하고 종종 놀러오던 친구들 세 명이 돈을 모아 집을 근처로 구하기로 하면서 시작했다. 이 집은 커플이 한 방을 쓰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한 명도 곧 커플과 같이 살기로 하면서 두 커플이 두 개의 방을 쓰고, 하나의 큰 방을 공부방 또는 작업실로 개방해서 썼다. 아랫집과 윗집 사이에 있어서 옆집이라고 불렸다. 이 집을 전셋집으로 재정적으로도 독립적으로 운영됐고 운영도 독특한 점이 있었다. 이 집이 생긴 것은 빈집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기 때문에 빈집처럼 운영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취지에는 공감하고 또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빈집이라고 스스로 불리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연이어 한 달이 안돼서, 네 번째 빈집이 생겼다. 이 집은 원래 같은 동네 인근의 이주노동자와 이주백수들이 살던 아주 오래된 낡은 집이었다. 방이 4개인데도 엄청 싸서 각각 독방을 썼다. 두 명이 돈을 모아서 전세금을 내고, 한 두 명이 더 살 곤 했었는데, 아주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여서 어느 정도는 이미 빈집같은 집이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영어를 쓰면서, 미국, 캐나다, 네팔, 콜롬비아, 스리랑카 등 다양한 이주민들과 내국인들도 거쳐갔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이사를 가면서 보증금을 돌려받아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쩌면 집을 빼고 흩어져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 윗집에 살던 한 친구가 보증금을 빌려줘서, 그 돈을 나가는 친구에게 주고 재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빈집 사람들도 자유롭게 오가고 독방을 쓰고 싶은 친구들이 이사가기도 하는 집이 되었다. 집 이름은 원래 계약자의 이름을 따서 닉산재라고 불렸는데, 빈집이 되면서 가파른집으로 바꿨다.

 

이로써 빈집이 시작한지 1년정도만에 집은 네 채로 늘어났고, 장기투숙객의 숫자는 20명을 넘어섰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빠른 확장이었다. 그래서 각 집별 회의 외에도, 모두가 모이는 마을회의를 한달에 한번씩 열기로 했다. 빈마을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에도 친구가 잠시 비어있는 집을 빈집 사람들에게 쓰라고 해서 석달 정도 세 사람이 살았던 참길음집도 있었다. 텃밭 주말 농사를 지으면서 좀 더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밭 근처에 살고 싶어한 네 명이 의기투합해서 독립하며 서울 외곽에 집을 구했다. 이름하여 빈농집. 커플이 독립하면서 구한 작은 집이지만 곧 다시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빈집화된 앞집. 고급 전세 원룸에서 살던 친구가 같은 돈으로 방 두 개 짜리 집을 구해서 이사오면서 작은 방을 독방으로쓰고 큰 방에 장기투숙객을 받으면서 생긴 하늘집 등. 각각의 집들이 제각각의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또 제각각의 이유로 없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빈마을은 계속되면서 한동안 집 4~5개, 장기투숙객 20~30명 정도의 규모가 유지됐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각종 사건과 사고, 놀이와 작업, 모임과 동아리, 우정과 애정, 오해와 갈등 등등은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사실 빈집이라고는 하지만 빈집은 정의된 바가 없다. 각자가 주인이고 각자가 자신의 집에서 살 뿐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각각의 빈집들은 사실 각각 다른 사람들이 다르게 살아가는 다양한 형태의 주거공동체들과 그 공동체들의 관계망인 셈이다. 각각의 공동체들은 여러 경험들 속에서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는데, 그것이 반복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이동하고,  재정적 지원을 하는 등 여러 공동체들의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빈마을금고 - 우주(宇宙)살림협동조합 빈고

 

집이 여러 개가 되면서 다소 복잡한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은 한 집에 모두 모여살 때는 문제되지 않았던 것이 공간적으로 분리되면서 차이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집은 구조적으로 같이 사는 사람들을 가족같은 분위기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자주 볼 수 없는 다른 집에 사는 사람과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다. 각 집별 차이는 때로는 갈등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마을회의에서는 각 집별 재정을 통합하기도 하고 분리하기도하고, 사람들이 집을 옮기기도 하고, 집 별 역할을 조정하기도 하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마을회의가 너무 길어지고 과열되어서 전체가 모이는 자리는 소식을 나누고 파티를 하는 마을잔치와 집에서 한 두명씩 나와서 회의를 하는 집사회의로 나눠졌다.

 

재정문제는 좀 더 복잡해졌다. 보증금은 집 계약과 묶여 있어서 계약자를 비롯한 소수가 내고 있었고, 그에 따른 형평성과 채무감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어떤 집은 전셋집이어서 분담금이 낮지만 어떤집은 월세집이거나 장기투숙객들이 줄어서 분담금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은 보증금과 무관하게 이동할 수 있어서 계산이 복잡해졌다. 또 보증금을 냈다가 나가는 경우에는 돈을 돌려줘야 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로 곤란하고 민감한 상황들이 종종 발생했다.

 

특히 아랫집의 2년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면서 이 집을 재계약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면 누가 계약을 하고 보증금을 낼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논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빈집은 모두가 주인인 공유지처럼 보였고 다들 그렇게 살았지만, 누군가는 돈을 내고 누군가는 계약에 책임을 지는 보통의 사유지라는 사실이 부상한 셈이다. 책임감과 부담감, 가진 돈의 차이, 권력의 차이, 집의 차이, 욕망의 차이가 예민하게 불거졌다. 재계약과 관련된 긴 논쟁에서 다들 지쳐갔고 갈등이 커졌고 결국은 합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집주인이 계약문제를 제기하지 않아서 계약은 자동연장되었다.

 

잠시 진정 국면을 거친 후에, 마을잔치에서 제비뽑기를 통해서 전체 집의 구성원들이 완전히 집을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로써 완전히 뒤섞여 버린 집과 보증금의 소유권 문제는 극적으로 긴 논의 끝에 마을금고를 만들고 여기에서 일괄 관리하고 모든 사람들의 지속적인 출자금을 모으고, 이를 각 집 보증금으로 대출하며, 각 집별 분담금은 대체로 균등하게 조정하기로 했다. 출자금의 액수는 다르지만 모두가 주인으로서 권리는 같은 우주살림협동조합 빈고의 탄생이다. 이로써 모든 사람은 출자를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배당을 받으며, 또 빌렸던 돈을 먼저 갚아서 이자지출을 줄이고, 출자금을 집계약과 무관하게 회수할 수도 있고, 경우 따라서 소액대출도 받을 수 있는 상호부조가 가능해지는 등 작은 은행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빈고의 성립 이후에도 사람들은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고, 집들의 계약과 해지는 계속되었지만 재정적으로는 큰 무리없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구성원의 재배치도 조정위원회를 구성해서 진행한 2차 재배치와 집별 테마를 구성해서 나눈 3차 재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다만 초기에 집들을 계약했던 고액출자자들이 이사가고, 이후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 정도의 보증금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소액출자자가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출자금은 오히려 감소했다. 전셋집을 유지할 수는 없었고, 대신 월세집으로 여러집을 계약하면서, 분담금은 지속적으로 올라갔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되어서 현재는 약 40여명이 살고 있다. 이렇게 생겨난 집들의 이름이 해방채, 계단집, 작은집, 살림집, 구름집, 마실집 등이다. 빈집은 아니지만 함께하는 공동체들의 공간에도 대출을 할 수 있었는데, 그 공동체들이 만행, 까페해방촌, 공룡, 해방촌연구소, 수유너머R이다. 현재 출자금과 차입금을 합친 빈고의 총자산은 2억원이며, 90% 정도를 집 5개를 포함한 총 10개 공간에 보증금으로, 나머지 10%를 개인과 마을사업에 대출하고 있다. 참고로 2억은 서울에서 한 가족이 사는 아파트 한 채의 전세 보증금 정도에 불과한 돈이다. 조합원은 빈집에 살았던 사람들과 빈집과 빈고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120여명 정도다.

 

빈집이 자본으로 집을 구하고 집을 공유했다면, 빈고는 자본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집이 만들어지게 한다. 빈고는 자기 자본을 축적해서 자기 집에 투자해서 점점 더 비싼 집을 갖기 위해 경쟁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발적인 출자를 통해서 공동의 자본을 형성하고, 공동의 공간을 구해서 함께 살아가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더 불러모으는 방식을 선택하는 셈이다. 빈집의 경험이 자본의 흐름과 삶의 전략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마을의 재발견 - 해방촌 빈가게

 

빈집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재능이 모여지면서 수많은 일과 놀이들을 벌여왔다. 이를 통해서 소득수준과 소비수준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풍요로움을 누리곤 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수입을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비롯한 임금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집에서 하는 작업들을 마을로 확대하고, 거기서 적더라도 조금의 수입을 얻을 수 없을까 하는 궁리를 하게됐다. 그렇게 6명이 의기투합해서 동네에 작은 점포를 구했다. 빈고에서 보증금은 대출받고, 인테리어와 설비에 필요한 비용은 조금씩 출자해서 모았다.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은 조금씩 달랐지만, 동네 작은 1층 가게 공간을 활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보자고 덤벼들었다. 기본적으로는 낮에 까페와 저녁 술집이지만, 한 켠에는 공동구매를 할 수 있는 생협코너와 재활용공간을 두었다. 집에서 할 수 없었던 각종 모임과 공연, 장터도 함께 했다.

 

동네에서 가게를 시작하면서 집이 아닌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빈집들이 주로 있었던 지역 해방촌은 서울의 한 복판 남산 아래 있는 마을이다. 1945년 해방 이후로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지역에서 올라온 빈민들이 자생적으로 만든 판자촌이었던 이 마을은 집값이 싸다는 것 말고는 빈집 사람들에게 큰 의미는 없었다. 집들이 늘어나면서 빈집들간의 관계는 해방촌이라는 마을이라는 공간에서 이뤄지게 되었고, 가게를 통해서 새롭게 형성된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들로 인해서 해방촌이라는 마을을 재발견하고 있다.

 

하지만 가게는 결코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쇠락한 마을에서 소자본으로 장사를 해서 충분한 수입을 얻는 것은, 장사만을 목적으로 해도 어려운 것이었다. 더군다나 사업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들이 그것도 서로 싸우고 조율하면서 잡다하게 만들어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러한 스트레스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신뢰와 협력도 위협했고, 생활도 어려워진 탓에 하나 둘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첫 번째 가게는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 포기하면서 그만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 즈음에 나온 더 크고 더 동네 중심지에 있는 가게가 나왔고, 또다시 몇 사람이 홀린 듯 이전했다. 컨셉은 비슷한 협동조합이지만, 이번에는 좀 더 다수의 조합원을 모으고, 빈마을 보다도 해방촌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여전히 장사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도 여러 가지 활로를 찾아서 새로운 모색들을 하고 있다.

 

 

빈집은 무엇이었을까?

 

빈집은 누구나 비용을 내고 올 수 있다는 점에서 게스트하우스다. 실제로 여행을 갔을 때 묵는 도미토리 게스트하우스처럼 낯선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또 헤어지는 장소다. 하지만, 사장도 노동자도 서비스도 없이 모두가 동등한 주인이자 손님이라는 점에서 공동체와 유사하다. 

 

또한 빈집은 분명 삶의 많은 것들을 공유하는 공동체다. 하지만 어떤 동일한 가치로 모인 사람들도 아니고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고 구성원의 변화가 심해서 공동체라고 말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오늘 규칙을 만들어도 내일이면 구성원이 변해있다. 변화가 심하고 서로 바쁠 때는 단지 주거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일 때도 많다.

 

그렇다고 빈집이 단지 주거공간을 같이 쓰는 쉐어하우스같은 형태의 공동주거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보통의 공동주거는 보증금과 월세를 정확히 나눠내고 자기 자본은 명확하게 하는데 비해서 빈집은 자본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보통 자본은 가족끼리만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빈집이 집 식구들과 또 빈고를 통해서 자본을 공유하는 가족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극단적인 개방성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열려있다. 누가 처음 오더라도 집과 자본을 공유한다. 굳이 말하자면 만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물론 현재는 집마다 개방성의 정도와 방식은 다르지만,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고, 새로오는 사람을 환대하는 윤리와 경제적인 시스템은 지속되고 있다. 

 

한편 빈집은 도심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극빈자들의 주거시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빈집 사람들은 국가나 기업, 부자 등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지원받지도 규제받지도 않는다. 또 비용은 최소이고 많은 경우 수입도 최하위에 있지만 꽤나 풍요로운 삶의 질을 누린다. 오히려 빈고는 아직 빈집에 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잉여금의 일부를 기부하기도 한다.

 

또 혹자는 빈집을 주거운동 또는 빈민운동 또는 생태운동, 사회운동 단체로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빈집의 구성원이 외부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빈집 안에서 그 활동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빈집 자체는 그저 살아가는 공간이다. 여기서의 운동은 그냥 대안과 미래를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빈집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구성원들에 따라서 게스트하우스, 공동체, 가족, 공동주거, 극빈주거시설, 운동단체 등등 여러 모습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빈집 사람들은 끊임없이 빈집이 무엇인지를 되묻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빈집들이 모여있는 빈마을은 또 더 큰 수수께끼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 처음만난 사람과 가족으로 함께 산다? 사장, 노동자, 소비자가 아니라 모두가 주인이다? 1000만원을 출자한 사람과 1만원을 출자한 사람이 같은 권한을 갖는다? 오래 살던 사람과 처음 온 사람이 같은 권한을 갖는다? 분명 이상하고 말이 안 되는 얘기일 것이다. 이런 집이 실재한다는 것은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소 이상하고 어이없는 설정이 빈집과 빈마을의 지금 모습을 만들어온 것만은 틀림없다.

 

최근에서야 우리는 이러한 설정을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에서 나오는 도식을 빌려 이렇게 정리해 보기도 했다. A(가족/공동체)도, B(국가/복지시설)도, C(자본/숙박업소)도 아닌 공동주거의 방식으로서의 빈집. 빈집은 각 집과 구성원과 시기에 따라서 A, B, C 중 어느 하나의 형태가 주로 드러날 때도 있다. 그것은 빈집의 구성원이 빈집을 어떻게 생각하고 관계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드러나고 또 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A, B, C 각각의 형태로 고정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빈집이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빈집은 A, B, C의 성격이 혼재해 있으면서도, 각각을 구성하는 원리를 넘어서는 어떠한 실천들이 벌어지고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평등자유빈집.JPG

 

 

형태

위험요소

반대

극복방안

구체적인 실천들

A

가족/공동체

폐쇄, 고립

가족주의

환대

주인/손님맞이, 놀러가기, 마을잔치, 집바꾸기

B

국가/복지시설

통제, 방관

권위주의

자치

집회의, 살림살이, 공동계약, 동아리, 마을활동

C

자본/숙박업소

독점, 경쟁

자본주의

공유

선물, 출자, 상호부조, 협동조합 빈고

D

빈집?

 

 

 

 

 

아마도 빈집과 빈마을이 무엇인가는 질문과 궁금증만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빈집과 빈마을에 접속해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후적으로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빈집이 궁금하다면 당신이 직접 접속하길 바란다. 빈집은 언제나 당신을 환영한다. 또 당신은 언제나 자신의 자리에서 빈집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국가와 자본과 공동체를 넘어서 우리가 함께 자치, 공유, 환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지구라는 커다란 집의 한 식구가 아니겠는가?

 

빈집은 지금 또 한번의 공유, 또 한번의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자본 수익을 혈연가족을 넘어 불특정다수의 식구들 모두와 함께 공유했던 빈집이 첫 번째, 자본 수익을 자기집을 넘어 빈마을의 다른집들과 함께 공유했던 빈마을금고가 두 번째라면, 세 번째는 자본 수익을 만인과 전면적으로 공유하는 것, 자기와 자기집에 돌아오는 자본 수익에 대한 전면적인 공유이다. 우리는 돈을 최대한 공유하고 이를 통해서 함께 살아갈 식구와 친구를 얻는다.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이자 비결이다. 이것은 전혀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자본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식구들을 맞이하지 않았다면 빈집이 가능했을까? 새로운 집들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각각의 집들과 빈마을은 유지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에 동의하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공동체들과 자치, 공유, 환대하며 살아갈 것이다. 개인들이 자신의 삶과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공동체를 만들고, 또 이렇게 만들어진 다수의 공동체들이 다시 연대하고 공유하며 공동체들의 공동체를 만든다. 빈고는 지금 '공동체금고들의 연대체로서의 공동체은행'으로 거듭나는 또 한번의 시도를 준비중이다. 이 역시 우리끼리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같이 하자.

댓글 4

손님 13-03-01 10:37

원고료...ㅠ -우마

성재 13-03-02 04:32

저 없는 동안 파란만장했던 스토리가 구구절절... 빈고의 재정이 탄탄할수록 안정화하게 되는군요! 많이 저금해야겠다...

손님 13-03-29 17:02

잘읽었습니다. 빈고를 좀더 이해하게 되어 좋았습니다. - 먼지

손님 13-07-12 09:49

부분부분으로만 알고있던 빈집의 이야기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해 주시니 빈집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되었어요. -단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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