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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이진경, <헝그리정신과 궁상, 혹은 돈없는 부자와 돈많은 빈민에 대하여>

  • 빙고
  • 작성일시 : 2013-09-11 06:49
  • 조회 : 7,286

참 좋은 글이어서 공유합니다. 

빙고의 모든 조합원들과 함께 읽고 싶네요. 


궁상과는 구분되는 헝그리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은행이 필요할까요?

궁상에서 헝그리로 넘어가는 과정이 개인의 단련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면, 

헝그리한 사람들의 공동체, 헝그리한 사람들이 연대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을 고안해야 하지 않을까요?

빙고는 그런 은행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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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 http://cafe.naver.com/mhdn/72321



헝그리정신과 궁상, 혹은 

돈 없는 부자와 돈 많은 빈민에 대하여


이진경 <삶을 위한 철학수업>


97년인가 98년인가, 아마 박사학위논문을 쓰던 때였던 것 같다. 학위논문을 쓰던 때라, 그나마 얼마 안 하던 강의도 하지 않아서, 수입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꽤 팔리던 책(『철학과 굴뚝청소부』)이 있었지만, 출판사가 그 96년엔가 부도가 나서 인세 한 푼 받지 못하고 있은 지 오래였다. 그걸 아는 다른 출판사에서 찾아오기도 했지만, 부도나서 힘들어 하는 선배에게 그 책을 빼서 다른 데서 내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 부도난 출판사의 사장은 초기에 ‘상도연구실’(김진균 교수가 해직되었을 때 제자들과 만든 연구실)에서 함께 공부하던 선배였을 뿐 아니라, 지하운동마저 같이하던 이였던지라, 돈이 좀 아쉽다고 등을 돌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여, 나중에 갚지 머 하곤 돈을 조금 빌려 그걸로 생활하던, 지금 생각해보니 우찌 살았누 싶은 시절이었다. 

그 빈한한 시절의 어느 날, 대학 이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당시 인조 다이아몬드 회사를 다니던 친구가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만나서 밥을 얻어먹고 술도 한잔 했다. 뭐 힘든 일이 있나 싶어 물어봤더니, 그런 건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꽤 오래 열심히 하던 그 일이 그땐 힘들었는지, 술 마시며 내가 부럽다고 한다.

“뭐가 부러워? 한 달에 40만 원도 못 벌고 사는 인생인데. 더구나 요샌 빚을 내서 생활하는 걸.”

“그래도 넌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잖아?”

잘 알고 있었지만, 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그 얘기가 그날 가슴에 들어와 박혔다. 

‘맞아, 난 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지. 쟤는 한 달에 400만 원도 넘게 받겠지만, 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아니잖아. 내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면서 저 친구만큼 돈을 잘 벌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도둑놈 심보지. 좋은 건 자기가 다 가지려고 하는.’


확실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의 돈을 받으려면, 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돈 주는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때 결심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려면, 돈을 적게 벌어야 하고, 그러려면 돈을 적게 써야 한다. 적게 벌고, 적게 쓰고, 내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자!’ 그땐 영화 <넘버 3>에서 나왔던 송강호의 대사들이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라서, 이런 생각에 거기서 들은 ‘헝그리 정신’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후 내 삶의 ‘이념’에 대해 말할 일이 있으면 농반진반으로 ‘헝그리 정신’이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 삶도 ‘헝그리’해졌다. 사실 이전이라고 ‘돈벌이’하며 살 생각이 있던 것도 아니고, 헝그리하지 않게 살았던 것도 아니지만, 하나의 이름을 붙여서 명시적으로 정리를 하니, ‘이념’이라고 할 만하지 않나 싶게 그럴듯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헝그리하게 산다는 것은 단지 결핍을 뜻하는 것으로서의 ‘가난’이나 ‘빈곤’ 속에 산다는 걸 뜻하진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부유하게’ 사는 법이다. 역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나 ‘부유함’만큼 오해되고 있는 게 없는 것 같다. 부란 그저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대개는 돈으로 환원되거나 계산되는 경제적 자원의 양이라고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자본주의와 부에 대해선 속속들이 연구했던 맑스는 이런 ‘경제적 부’ 개념과 대비하여, ‘실질적인 부’란 필요노동시간(먹고사는 데 필요한 비용을 버는 데 사용되는 시간) 이외의 가처분시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정치경제학 비판요강』, II, 383쪽). 쉽게 말하면, 돈을 버는 데 투여되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부’라는 것이고, 그런 시간이 많은 이들이 ‘부유한 자’라는 것이다. 이 경우 ‘부유함’이란 자신이 선택한 삶의 크기, 아니 자신을 위한 삶의 질을 뜻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말 그대로 삶의 ‘풍요로움’을 뜻하는 것이 될 것이다. 돈이 많다고 삶이 풍요로운 게 아님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다. 돈 버는 것 말고는 별로 하는 게 없는 삶처럼 단조롭고 빈약한 삶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분명 더없이 빈곤한 삶이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그것만으론 그 단조로움과 빈곤함을 벗어날 길이 없다.


잘 알다시피, 한때 ‘부자 되세요’가 인사말이 되고,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대조하면서 부자 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이들이 목청을 높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방금 본 것처럼 상반되는 두 가지 다른 부의 개념이 있는 만큼, 부자가 되는 방법 또한 상반되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해야 한다. 부를 오직 경제적 부만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부자가 되기 위해선 돈을 버는 시간을, 즉 필요노동시간을 최대한 늘리려 할 것이다. 반면 부를 맑스가 말한 ‘실질적 부’라고, 삶의 풍요로움을 위한 자원이라고 믿는다면, 그 최고의 자원인 시간을 벌기 위해 필요노동시간을 최대한 줄이려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내 하고 싶은 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돈 버는 시간을 극소화하려는 헝그리 정신이야말로, 부유한 삶을 위한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사태가 이처럼 단순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선 시간만 필요한 게 아니라 돈도 필요하고 그걸 할 수 있는 조건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하고 싶다고 언제나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지금 사회에서라면, 돈 버는 걸 접고 하고 싶은 걸 하며 산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공상처럼 들리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공상’을 할 수 없다면, ‘현실’이란 단어에 짓눌려 그저 돈 버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지루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현실’의 중압감이 아니라 공상하는 능력이다. 지배적인 삶의 방식, 강요되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다른 삶의 가능성이란 언제나 공상과 함께 온다. 공상은 현실감 없는 무능력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이 무거운 현실에서 벗어날 길을 상상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에서 생겨난다. 그럴듯한 공상이란, 그런 능력이 창조하는, 다른 현실로 안내하는 상상의 지도다. 가면서 계속 고쳐 그릴 수 있는 지도.


부유함이란 점에서 보면, 자본가만큼 역설적인 존재도 없는 것 같다. 지금 사회에서 자본가들은 누구보다 돈이 많은 이들이지만, 그들만큼 돈이 부족한 사람들도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토끼가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어’ 하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것처럼, 그들은 ‘돈이 없어, 돈이 없어’ 하며 어딜 가나 돈을 찾아다니고 언제나 돈을 빌리러 다닌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이들만 그런가? ‘돈의 증식’을 위해, 좀더 많은 돈을 버는 데 인생을 건 사람들은 모두 그렇다. 그런 이라면, 돈이 없어도 모두 일종의 ‘자본가’다. 돈이 많든 적든 모두 항상 ‘돈의 결여’를 느끼고 종일 돈 벌 생각을 하며, 항상 돈 버는 일을 하며 사는 이들이다. 돈 버는 데 돈을 쓰려 하는 한, 돈은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 가까이에 있으면, 자칫하면 그들의 ‘머니게임’에 휘말려 졸지에 인생 망치기 쉽다. 돈을 빌려주거나 보증을 섰다가 졸지에 집을 날리고 빚쟁이 신세가 되는 이들을 주변에서 발견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잘나간다고’ 그들의 덕을 보는 이는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아무리 잘 벌어도 언제나 돈이 부족하기에 신세진 이들에게조차 돈을 여유 있게 쓰지 않는다. 굳이 성정이 악한 이가 아니어도 그렇다. 아마도 좀더 번 뒤로 미루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 연기(延期)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영원한 빈민이다. 이들은 우리에게 돈을 많이 갖고도 빈곤하게 사는 법을 알려준다.


부에 대한 경제주의적 관념은 부유함에 대한 또다른 편견으로 이어진다. 즉 자신이 사용하거나 처분할 수 있는 상품의 풍부함이 부유함을 뜻한다고 믿는 오해가 그것이다. 이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는 것을 통해 부유함을 정의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자원과 결부되어 있고, 그래서 실질적 부와 직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옷이 아무리 많아도 동시에 그 많은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아무리 비싼 명품 옷이 있다고 해도 그게 꼭 멋진 분위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는 게 더 쉬워 보인다. 좋은 미감을 갖고 있는 이들은 ‘별것 아닌’ 옷으로도 멋진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반면 그런 나름의 미감이 부족한 이들이야말로 명품이 필요한 이들일 것이다. ‘명품’의 딱지가 증거하는 남들의 평가, 남들의 미감으로라도 자신의 결여된 미감을 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처분할 수 있는 비싼 상품의 양이, 옷으로 표현되는 삶이나 패션 감각의 풍요로움을 보여주진 못한다. 그것은 그저 돈 있는 자임을 드러내는 ‘표시’일 뿐이며, 돈 있는 이라면 다들 입고 다니는 뻔한 스타일을 소비하는 것일 뿐이다. 지식도 그렇다. 수많은 유행하는 사상가들의 이름이나 개념(사상계의 명품이다!)을, 소화되지 않은 채 화려하게 늘어놓는 분들을 보면, 지식의 풍부함이나 지성의 풍요로움보다는 그것의 결여를 느끼게 된다. 


부유함에 대한 이런 관념은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처분시간을 대개 뻔한 방식으로 패턴화된 소비를 위해 사용한다. 밀리는 자동차 속에서 시간을 보낼 게 뻔함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자동차를 끌고 나서는 것은, 다른 돈 있는 이들처럼 여가나 레저를 즐기고 있다는 관념을 향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잘 알려진 관광지를 돌며,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 거기 있음을 확인하고, 이미 익숙한 방식의 소비와 향유방식을 반복하는 그 패턴화된 소비는 이제 일종의 ‘의무’가 된 것 같다. 모두가 하고 있기에 나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핍감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어 어떻게든 동참해야 할 것 같은, 또 다른 ‘일’이 된 듯하다. 


나는 실질적 부를 돈을 비롯한 ‘가처분 자원’이나 맑스가 말한 ‘가처분시간’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을 자신의 삶을 위해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가처분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 있고 돈이 있어도, 능력이 없다면 그것들은 자유를 위한 자원이 아니라 단순한 소비와 소모의 대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소비와 소모의 능력이 아니라, 삶을, 자유로운 삶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능력, 이것이 실질적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런 능력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다른 능력과 마찬가지로 배우고 연마해야 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길 수 있는 능력도, 음악을 듣고 촉발을 받을 수 있는 능력도 배우고 반복하여 익히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도, 돈이나 재화를 사용하는 방법도 배워야 하고 실패를 감수하면서 반복하여 훈련해야 한다. 그리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하고 싶은 것, 없는 돈을 모으고 모아서라고 하고 싶은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하기 위한 감각을 형성해야 하고, 그것에 필요한 지식을 얻어야 하며, 그것을 즐기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가령 영화를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면, 주말이라고 굳이 자동차 끌고 ‘여행’을 떠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고, 사람들이 몰리는 영화를 그 인파 속에 끼어 볼 이유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남들 보라고 걸친 비싼 옷이 눈에 들어올 리 없을 것이고, 좋은 자동차를 자랑하는 이들이 관심거리가 될 리가 없다. 그는 무언가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는 충분한 부자인 것이다.


이는 돈을 쓰는 능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버는 법을 배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수많은 책들이 그것을 가르쳐주겠다며 화려한 깃발을 흔들고 있으며, 그런 방법을 가르치는 지식이 대학 안에 자리잡고 있고 그것이 다른 지식들을 압도하고 있다. 그래서만은 아니겠지만, 전에 잘 나가는 대학 학생생활연구소에서 설문조사를 한 것을 보니, 대부분 강남의 부잣집 출신인 대학생들인데도 그들의 장래에 대한 주된 관심은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돈이 많아도 다시 돈 벌 생각밖에 없는 것이다. 집에서 배운 게 돈 벌어야 한다는 것밖에는 없었던 것일 게다.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쓰면 잘살 수 있는지 하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돈이 없는 이들이 돈 벌 생각하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돈이 많이 있는 이들이 돈을 더 벌 생각밖에 안하는 것은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 아닐까?


돈 버는 법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이들은 많지만, 돈을 쓰는 법을 배우겠다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돈 쓰는 법은 돈 버는 법보다 결코 쉽지 않다. 돈을 잘 쓰면 사람들의 삶과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고 멈추고 고인 것을 움직이게 하지만, 잘못 쓰면 선의를 가진 경우에도 사람들을 의존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나마 있던 활력을 잡아먹고 안이하게 만들 수도 있다. 절약이 지나치면 가능한 활동의 폭을 좁히고 사고의 범위를 제한하지만, 도를 지나치면 애초의 동력이 돈에 잡아먹히기도 한다. 투약의 기예만큼이나 돈 쓰는 법 또한 어떤 기예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어디나 적용되는 일반이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사용한 돈이, 경우와 조건에 따라 아주 다른 결과로 귀착되곤 한다. 이는 실험과 실패의 경험을 통해 배워가야 할 기예일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에서도 돈 쓰는 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딱 두 가지만 가르친다. 돈을 좀더 벌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앞서 말한 패턴화된 소비의 방법이다. 이는 아무리 능숙해도 나를 위해, ‘자신의 삶을 위해’, 혹은 실질적 부의 풍요함을 위해 돈을 쓰는 법이 아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돈을 쓰는 것, 이는 맑스가 자본을 정의해주는 일반적 공식이라고 했던 것이다. 즉 이런 돈의 사용법이란 내가 아니라 자본을 위한 사용법이다. 이렇게 돈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자본의 논리를 충실히 따르는 꼭두각시가 된다. 패턴화된 소비 또한 내가 아니라 자본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소비해주지 않으면, 미친 속도로 생산해내는 상품들이 창고에서 썩어갈 것이고, 자본은 파산의 위협에 시달리게 될 것이기에. 그 소비를 통해 우리는 이른바 ‘내수시장의 형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돈의 마력에 대해, 혹은 그 악덕에 대해 비난하는 글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이 있을까? 확실히 돈은 그 자신의 힘만으로 사람들을 홀리게 만든다. 그래서 돈을 잘 쓰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그러나 돈에 미쳐 돈 버는 데 인생을 바치고, 돈을 위해 삶을 희생하는 것을 단지 돈의 탓으로만 돌릴 순 없을 것 같다. 돈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실질적 부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잘만 쓰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자원이고,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자원이 된다. 실질적인 자원의 결핍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기도 하고, 새로운 실험적인 시도를 위한 여유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잘 쓰기 위해선 돈이 마력을 이겨낼 강한(!) 힘과 의지가 있어야 하고, 돈을 쓰는 원칙이나 ‘철학’이 분명해야 한다.


‘헝그리 정신’은 돈을 쓰지 않는 법이 아니라 돈을 쓰는 법이다. 돈을 잘 쓰기 위한 삶의 원칙이고 ‘이념’ 내지 ‘철학’이다. 헝그리 정신은 부에 대한 태도, 돈 버는 활동에 대한 태도일 뿐 아니라, 돈을 쓰는 것에 대한 태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된 돈의 사용법이다. 여기서 헝그리정신을 ‘궁상을 떠는 것’과 혼동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돈을 버는 방식만큼이나 돈을 쓰는 방식에도 ‘스타일’이 있다. 격조 있고 품위 있는 스타일이 있다면 천박하고 경박한 스타일이 있다. 많지 않은 돈을 쓰는데도 여유 있게 느껴지는 스타일이 있고 적지 않은 돈을 쓰는데도 인색하고 쪼잔하게 느껴지는 스타일이 있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스타일도 있고 이타적이고 ‘소모적인’ 스타일도 있으며, 돈 쓰는 티를 내지 않고 쓰는 스타일도 있고 지금 내가 왜 이렇게 돈을 쓰는지를 충분히 알려주는 스타일, 생색을 확실하게 내는 스타일도 있다.


헝그리정신과 궁상은 상이한 삶의 스타일, 아니 상반되는 삶의 스타일에 속한다. 돈을 버는 것과 쓰는 것 모두에 관련된 삶의 스타일이다. 헝그리정신이 ‘능동적인’ 것은 무엇보다 돈에 대해 ‘능동적’임을 뜻한다. 돈에 대해 능동적이라 함은 돈을 자기 뜻대로 부리며 사는 것이다. 돈을 부릴 수 있는지, 돈의 부림을 받는지는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돈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돈이 별로 없음이 분명함에도 돈을 부리며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돈이 많아도 돈에 끄달리고 돈에 끌려다니는 이가 있다. 전자가 돈에 대해 능동적인 것을 요체로 한다면, 후자는 돈에 대해 ‘반동적인’(돈의 작용에 반작용하는) 스타일이다. 돈이 많든 적든, 헝그리정신이 전자와 결부된 것이라면 궁상은 후자와 결부된 것이다.


궁상을 떠는 것은 ‘대타적으로는’ 남들 앞에서 없는 티를 내는 것이고, ‘대자적으로는’ 궁핍 앞에서 사고나 행동이 위축되거나 빈약해지는 것이다. 궁상은 궁핍에 짓눌려 찌든 삶이고, 남들에 대해서는 궁핍을 드러내 동정을 구하거나 인색함을 변명하려는 태도다. 반면 헝그리정신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삶을 위해 능동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가난 앞에서 당당하다. 없으면서 있는 척 하지도 않지만, 있는 것 이하로 궁핍을 과장하지 않는다. 나보다 잘 버는 친구와 만나면 엔간하면 얻어먹지만, 나보다 못 버는 이들과 만나면 가능한 한 내가 사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을 위해 쓸 때에는 최대한 신중하지만, 남을 위해 쓸 일이 있으면 최대한 과감해져야 한다. 항상 검소하게 살고자 하고 엔간하면 돈 쓸 일을 안 만들지만, 써야할 일이 있을 땐 머뭇거리면 안 된다. 그렇기에 작은 돈을 쓰는 데는 민감하고 쫀쫀해지지만, 큰돈을 쓸 때에는 과감해져야 한다. 이럼으로써 돈에 부림을 받는 삶이 아니라 돈을 부리는 삶이 가능해진다. 


궁상은 이와 다르다. 나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내 음식값을 내게 하며, 돈을 내야 마땅한 일 앞에서 빈손을 내밀거나 궁핍을 드러내는 것, 혹은 돈을 내야 마땅한 처지임에도 거꾸로 돈을 받아가려고 하는 것, 돈이 많지만 항상 돈 벌 생각만 하며 돈에 주린 자처럼 사는 것, 자신이나 자기 가족들을 위해선 아낌없이 쓰지만, 남을 위해선 인색하게 구는 것, 돈이 될 일이다 싶으면 자기보다 가난한 이웃을 젖히고 독차지하려 덤벼드는 것, 이런 게 궁상을 떠는 것이다. 이것만은 아니다. 한 술 더 뜬 궁상은 자기가 돈을 조금이라도 더 낼 일이 될 듯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 일 자체를 ‘필요 없다’고 사래치거나 안 좋은 일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헝그리정신이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이들의 삶의 방식이라면, 궁상은 없는 자뿐 아니라 있는 자들에게서도 쉽게 발견된다. 아니 돈 많은 자들에게서 오히려 빈번히 발견되는 것 같다. 가령 지난(2012년)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크게 부각되었던 ‘복지’나 ‘증세’ 등의 문제에 대한 재벌이나 전경련의 태도를 보면, 정말 궁상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법인세나 부자들의 세금은 십조 단위의 거대한 규모로 줄여주면서, 그나마 가난한 이들에게 주던 생활보조금이나 장애인보조금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줄여서 죽음으로 내몰던 정부야 애초에 천박하고 궁상스러웠다고 해도, 매년 수십억에서 수조원의 이윤을 얻고 있는 재벌들이 ‘보편적 복지’에 대해 비난하고, ‘증세’가 자신들에게 돌아올까 두려워 엄살을 떠는 모습을 보면 정말 궁상스럽기 짝이 없다. 엄청난 수익을 올리면서도 세금을 깎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쓰고, 그것도 모자라 탈세의 기교를 구사하기에 정신없는 자들…… 


회사가 아니라 개인으로 보아도 그렇다. 나 같은 사람은 비교도 할 수 없을 큰돈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그 돈들을 남 좋은 일을 위해 쓸 줄 아는 부자들은 정말 보기 힘들다. 모든 일에서 모범을 삼아 따라 배우자고 하는 미국에는 거대한 돈을 타인들을 위해 과감하게 쓸 줄 아는 부자들이 쌨건만, 그런 건 따라 배우지 않는다. 그저 궁상을 떨며 없는 이들을 위한 사업을 비난하는 기교만 배운다. 그러니 누구도 그들을 부러워할지언정 존경하지 않으며 좋아하지 않는다. 여당후보 진영에서조차 ‘재벌개혁론’ 같은 게 나왔을 때, 그들은 반문한 바 있다. 왜 그렇게 재벌들을 미워하느냐고. 이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몰라서 물어요? 이 궁상들아!”


차라리 가난하게 살자. 헝그리정신으로 살자. 그게 돈이 없어도 부유하게 사는 길이다. 저들처럼 궁상떨지 말고 살자. 헝그리정신과 궁상을 혼동해서 안 되는 건 이 때문이다. <끝>

댓글 2

손님 13-09-11 11:56
마지막 끝에 빵 터짐
일독했고 곱씹어 읽고 나누고 싶은 내용이네ㅎ
손님 13-11-14 20:49

저는 헝그리정신대로 살고 있다고 느껴져 기쁜데요?!?!?

하지만 한때는 궁상스럽게 산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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