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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귀족적인 맑스 - 맑스의 경제관념

  • 지음
  • 작성일시 : 2010-09-08 10:54
  • 조회 : 5,958

오늘 운영위원회 때 같이 읽어 볼까요?

 

아. 아래 책은 현민의 병역거부 후원회에서 선물로 보내 준 책입니다.

보고 싶으신 분은 저에게 말씀을...

언제 같이 면회라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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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칼 맑스 - 혁명적 삶의 어떤 유형>, <<부커진R3 맑스를 읽자>> 중

 

나는 잠정적이지만 맑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혁명가의 한 유형을 이렇게 표현하려고 한다. 그것은 귀족적이고, 공공연하며, 무자비하고, 소속 없는, 그리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그래서 희망적인 삶이다. 맑스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혁명가는 복종과 예속, 한마디로 노예적인 것을 거부하며, 미래에 대해서 오직 공공연하게 선포된 음모만을 꾸미며, 비판에 있어 그 바닥까지, 아니 바닥 아래까지 내려가고, 소유와 소속에서 추방되면서 동시에 탈주하고, 삶의 변혁을 쉼 없는 물음의 대상으로, 공부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 공부로부터 그는 현재의 배치가 품고 있으나 현실화하지 못한, 미래를, 희망을 발견하고 끌어온다.

 

귀족적인 맑스

 

맑스의 삶은 확실히 '귀족주의'라 부를 만한 면모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귀족주의는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떠올리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을 의미한다. "맑스는 귀족적 삶을 살았다." 맑스의 사상과 삶의 불일치를 고발하기 위해, 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관계를 이간질하기 위해, 비방가들은 맑스가 얼마나 사치스럽게 살았고 또 그렇게 살려 했는지를 떠들어 댔다. 가령 맑스는 귀족신분에 대한 선망 때문에 트리에르의 베스트팔렌 남작의 딸과 결혼하려 했고, 런던의 고급 주택가에서 살았으며, 딸들을 고급 사립학교에 보냈다는 식의 비방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맑스의 귀족주의를 고발했다.

 

그러나 맑스의 귀족주의는, 마치 니체의 귀족주의가 귀족명부에 등장하는 이들과 무관했듯이, 어떤 작위나 재산과는 무관한 것이다. 오히려 맑스의 귀족주의는 "권력과 부를 향해 기어오르는 원숭이들"(니체)로부터 거리를 두는, 그것으로부터 삶을 방어하려는 고상한 태도이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의 이미지와 상반되기는 커녕 그것에 상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자크 아탈리가 쓴 전기에는 맑스의 이런 측면을 적실히 묘사한 대목이 있다. "맑스의 착취에 대한 고발 속에는 귀족에 대한 이상화가 나타나고 있다. 돈에 의한 착취에서 벗어나는 것은 부르주아처럼 돈을 버는 것을 통해서도 아니며 귀족처럼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처럼 돈의 권력과 싸움으로써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의 지배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부르주아가 택한 길은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통해 지배자가 되는 것,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 돈에 대한 적응, 돈에 대한 복종을 전제한다. 부르주아는 노예 중에서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려는 노예, 그래서 다른 노예들에게 주인 행세를 하려는 노예이다. 프랜시스 윈의 전기에 따르면, "맑스는 부르주아적인 금전적 신중함을 경멸하여 자신이 설교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했다. 집안에 돈이 없으면 숨고 피하고, 허세를 부리고, 거짓말을 하며 버텨 나갔다. 그러다가 돈을 한 움큼 움켜쥐게 되면, 내일 일은 생각하지 않고 무모하게 써 버렸다."

 

그에겐 젊은 시절부터 돈에 대한 경제적 관념이 없었던 것 같다. 예니의 어머니는 맑스가 돈 문제에 별 가망이 없음을 예감하고는 결혼 허락의 조건으로 재산 문제에 대한 서약서를 요구한 바 있다. 재산은 부부가 공동 소유하고 결혼전에 진 채무는 각자가 알아서 갚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맑스의 행태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자본>을 집필할 때도 종이 살 돈이 없어 무언가를 전당포에 맡겨야 했다. 심지어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는 길에 입을 옷이 없어 엥겔스에게 돈을 부쳐 달라고 부탁했다. 외출복과 시계가 전당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돈이 들어오면 언제든 써 버렸다. 새 가구를 사고, 휴양지를 찾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빚쟁이들한테 시달리면서도 아이의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열어 주었다. 이 점에서는 예니도 마찬가지였다. 부부가 모두 "돈을 자잘한 데 찔끔찔끔 써서 없애는 것보다 이런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맑스의 돈 씀씀이를 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많다. 그는 분명 가난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런던의 소호 시절 그는 스스로 '지옥'이라고 부른 상황을 여러번 겪어야 했다. 예니는 당시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족이 "죽음과 비참한 삶 사이를 떠돌고 있다"고 했다. 집달리가 와서 침대, 이부자리, 옷가지 모두를 압류했고, 갓난아이의 요람까지 빼앗았기 때문이다. 집을 비워야 했고 아이들은 덜덜 떨었다. 맑스는 숙소를 구하기 위해 비오는 거리를 헤맸고, 약방, 빵집, 정육점, 우유가게 주인들은 그나마 집에 남은 것들을 챙겨 갔다. 이로부터 불과 2년 뒤에 맑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 지옥같은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내도 큰 딸도 아파 누워있는데 약을 살 돈이 없어 의사에게 연락도 못하고 있었다. 맑스는 자기 가족이 빵과 감자를 구하는 것도 이제는 어렵다고 썼다.

 

그러나 맑스는 '가난'이라는 위협에 절대 굴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예니는 '아무리 무시무시한 순간'에도 명랑한 기분과 굳은 신념을 가진 남편에 감탄할 정도였다. 그는 여전히 돈을 꼼꼼히 계산하고 저축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과연 이 '생각 없음'을 페리클레스가 칭송했던 아테네 시민들의 덕목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체면을 지키기 위해 분에 넘치는 소비를 불사하던 궁정귀족의 어리석음으로 볼 것인가. 확실한 것은 맑스의 '생각 없는' 씀씀이가 '생각을 넘어선' 씀씀이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맑스는 1849년 자신이 반대했던 무장 봉기에 나선 친구들이 맨손으로 가는 것이 걱정되어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의 거의 전부(6천 프랑 중 5천 프랑)를 무기를 구해주는 데 써 버렸다. <신라인신문>을 내기 위해 자기 재산의 상당액을 쓴 직후였는데도 말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독불연보>를 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맑스와 루게는 돈에 대해서 아주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프란츠 메링에 따르면 돈 문제에 무관심해 보였던 맑스와 달리 루게는 구멍가게 주인과 같은 쫀쫀함을 보였다. 그래서 맑스에게 약속한 급여를 주는 대신 <독불연보> 몇 권을 주는 식이었다. 루게는 자기 돈이 조금이라도 더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자주 화를 냈다. "비슷한 상황에서 맑스는 자신의 돈을 걸었다. 그러나 루게에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맑스가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부자나 빈자가 아니라 "노예"였다. 그가 '부'의 착취적 성격을 해명했다고 해서 '가난'을 찬양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사야 벌린에 따르면 맑스는 "가난을 증오했고 이러한 가난에 노예근성만큼이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부도덕한 굴종과 타락을 혐오"했다. 가난은 돈의 위협에 매우 취약한 상태이다. 빈자들이 가난을 이유로 돈에 굴복할 때 그들은 노예가 된다. 맑스의 저작에 자주 등장하는 쇠사슬은 노예적인 것의 상징이다. 물론 "로마의 노예가 두른 쇠사슬"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맑스가 <자본>에서 언급하듯, 그 쇠사슬은 이제 '보이지 않는 끈'으로 대체되거나 '금사슬'로 바뀐 것 뿐이다. 그 역사적 형태가 무엇이든 사슬은 항상 우리에게 노예일 것을 요구한다.

 

맑스의 귀족주의 - 우리가 노예적인 것에 대한 그의 거부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 는 이 점에서 빛난다. 그는 사슬에 묶인 채로, 사슬로 묶어 둘 수 없는 귀족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묶은 자들의 세계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거기서 어떤 매혹도 느끼지 못했다. 부르주아들의 자본도, 국가도, 민족도, 가족도 그를 유혹하지 못했다. <공산당 선언>에 나타난 것처럼, 그는 그것을 원하기는 커녕 없애려 한다. 돈과 권력, 가족, 박애에 대한 결핍감이 사실은 자신의 자유를 막는 사슬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 독특한 귀족주의를 '프롤레타리아 귀족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부르주아가 그 어떤 재산으로도 구매할 수도 매수할 수도 없는 삶의 지향을 그렇게 부르고 싶다. 맑스가 좋아했던 '프로메테우스'나 '욥'은 그런 삶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와의 거래를 넌지시 권유하는 헤르메스에게 말한다. "나는 이 불행을 너의 종살이와 바꾸지 않겠다." 이 말을 맑스는 자신의 박사논문 서두에 적어두었다. 1858년에는 자기를 진단한 의사들의 처방에 이런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는 욥처럼 신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또한 욥처럼 핍박당하고 있다. 이 신사 양반들의 제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같이 ...... 가난한 악마가 되어서는 안 되고 성공한 고금리 생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가 '생각 없음', '불행', '어리석음', '악마적임' 등을 기꺼이 자처하는 것은, '계산하고 영민한 자기만족적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귀족주의란 이처럼 힘이나 부의 객관적 양과는 관련이 없다. 귀족주의는 권력과 부를 어떤 양 이상으로 가졌을 때가 아니라, 그것을 재는 척도의 노예이기를 거부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그가 딸들과 종종 즐겼던 '고백 놀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웅으로 '스파르타쿠스'를 꼽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노예'를 영웅으로 꼽은 게 아니다. 스파르타쿠스는 '노예'가 아니라 '노예이기를 거부한 노예'이다.

맑스는 노동자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사회 개혁은 절대 강한 자들이 약해짐으로써 이루어지지 않고, 늘 약한 자들이 강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약한 자들은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가. 최소한 그들은 부르주아 왕에게 '당신은 내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댓글 2

손님 10-09-08 14:00

"사회 개혁은 절대 강한 자들이 약해짐으로써 이루어지지 않고, 늘 약한 자들이 강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약한 자들은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가. 최소한 그들은 부르주아 왕에게 '당신은 내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 무엇의 노예도 되지 말자.

'고백놀이'라... 우리의 '진실게임'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놀이겠지?

현민 면회 콜!!  -우마-

손님 10-09-09 02:39

나를 불편하고 무겁게 하는 좋은글.  j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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