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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이진경, <공동체주의와 코뮨주의>

  • 빙고
  • 작성일시 : 2013-11-18 15:29
  • 조회 : 7,871

원출처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두가지 공동체를 비교한 얘기가 있는데 재밌습니다.

강의 전에 같이 봤으면 좋았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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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주의와 코뮨주의 (이진경-글)

1. 코뮨주의




코뮨주의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단박에 대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가능할 수도 있다. 스피노자 말처럼 ‘단박에' 본질적인 정의에 도달했거나, 아니면 오랜 숙고 끝에 그에 도달했거나 간에. 그러나 그것을 단박에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한마디로 단박에 그 본질을 포착할 것도, 오랜 숙고의 결과를 단박에 알아챌 것도 기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면. 차라리 코뮨주의란 무엇이 아닌가를 말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코뮨주의를 구성하는 개념적 요소들을 찾아가기 위한 질문이라면.

일단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코뮨주의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공동체주의와 어떻게 다른지를, 그것의 상이한 ‘공간성’이란 측면에서 검토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우리가 사용하는 코뮨주의라는 말에 관해 약간의 해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코뮤니즘의 번역어고, 따라서 ‘공산주의'를 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일말의 ‘두려움’조차 섞인 의문이 운명처럼 따라 다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렇다. 코뮨주의라고 번역되는 원래 단어는 communism이고, 이 말은 통상 ‘공산주의'라는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렇다면 코뮨주의는 공산주의의 다른 번역어거나, 잘해야 번역어의 뉘앙스를 이용한 말장난으로 공산주의라는 ‘낡은' 개념을 되살려내려는 시도는 아닌가?

이러한 발생적-어원학적 사실을 대체 누가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communism을 “함께 생산한다”는 뜻의 ‘공산주의(共産主義)’로 번역한 것은 과연 어원학적으로 정당한 것일까? communism이란 말을 ‘공동의’를 뜻하는 형용사 commun에 ‘주의ism'을 결합하여 만든 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가령 생산은 물론 생활이나 활동, 그리고 그것을 위한 조건 등 모든 것을 함께 하고 함께 나눈다는 의미일 것이고, participation이라는 말이 뜻하듯 ‘참여’와 ‘분유(分有, 나누어 가짐)’라는 말처럼 어떤 집합적 과정에 참여하고 그것을 나눔으로써 그 집합체의 일부part가 되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이는 “함께 생산하는 함께 소유하는 생산양식”이라는 경제학적-경제주의적 공산주의 개념으로 환원불가능한 아주 다양한 공유와 공속, 공생의 양상을 포함한다.

그런데 코뮤니즘communism이란 코뮨commune이란 말에 ism을 붙인 것이라고 해선 안 되는 것일까? 그 경우 어원학적 의미는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집합체로서 ‘코뮨’이라는 말로 소급된다. 코뮨이란 ‘함께’, ‘묶음’ 등을 뜻하는 cum과 ‘선물’을 뜻하는 munis가 결합된 것이다. 즉 선물을 주는 방식으로 결합된 관계가 바로 코뮨인 것이다. 선물의 본질은 ‘타인에 대한 배려’고, 선물을 주는 사람은 그러한 배려를 통해 자신의 기쁨을 얻는다. 또한 그것은 그러한 배려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로서 자신을 배려한다. 코뮨주의란 이처럼 타인과의 상호적인 배려, 아니 심지어 되돌아오는 결과에 대한 계산 없이 일방적으로 선물을 줌으로써 상생적인 삶을 추구하는 관계를 지칭한다. 이는 이미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함께 생산한다고 함께 소유한다”는 의미의 공산주의에 갇혀버린 코뮤니즘에서 벗어나 코뮨적 관계, 상생적 삶을 추구하는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 공산주의와 좀더 명확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commune-ism이라는 용어를 거꾸로 ‘코뮨주의’라는 개념에서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코뮨’이라는 말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또 다른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11세기를 전후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중세의 자치도시를 뜻하는 명사가 아닌가? 혹은 통상 ‘공동체’라고 불리는, 근대 이전의 집합적 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코뮨주의란 흔히 접하게 되는 ‘공동체’나 ‘공동체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그 경우 외국어와 한문을 섞어만든 그 어색한 번역어를 고집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는가? ‘공동체주의’라고 번역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다시 ‘코뮨’이란 말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소급’은 코뮨주의라는 단어의 단순히 어원학적 정당화를 위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공동체 내지 공동체주의와 코뮨주의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어떤 철학적이고 원리적인 문제가 관여되어 있다. 그것으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공동체’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 {파라다이스}는 이 두 가지 상이한 '공동체'의 양상을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대비하여 보여준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일단 코뮨의 발생지점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코뮨




크로포트킨Kropotkin은 생존경쟁으로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다루는 통속적 진화론자들에 반하여 ‘상호부조mutual aid'라는 개념을 통해 자연과 역사를 포착하려고 하면서, 중세의 도시들이 바로 그런 점에서 상호부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의 중요한 사례였다고 말한다. 다른 이유에서지만, 맑스주의 역사학에서 도시란 자본주의의 발생지로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봉건제를 뒤엎은 싹들이 배태된 곳으로 서술한다. 반면 신중한 중세사가들은 그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역시 서양의 중세에 ‘도시’란 기이한 현상이고, 빈축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현상이었음을 분명하다고 인정한다.

물론 도시는 그 이전에도 있었고, 중국이나 이슬람 지역에도 마찬가지로 광범위하게 존재했었다. 그리스와 로마, 혹은 북경이나 교토를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서양의 중세에 나타난 도시들은 대부분 이러한 도시들과 연속성이 없으며, 이 도시들이 형성된 것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우마다 상이한 경로를 밟긴 하지만 대개는 공간적으로, 혹은 직업적으로 가까운 이웃들의 집단이 ‘조합’을 형성하고, 그러한 조합이 나중에 서약을 통해 가입하고 서약한 바에 따라 공동의 활동을 형성하는 ‘코뮨’이 됨으로써 시작되었다(이런 점에서 도시와 코뮨을 근본적으로 구별하지 않는 크로포트킨의 논지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러한 서약을 통해서 이들은 서로 간에 형제적인 관계, 평등과 우애로 특징지어지는 그런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결사체를 통해서 그들은 다양한 공동의 활동을 조직했을 뿐 아니라, 영주나 외부인들의 억압이나 착취에 대항하는 방어체를 결성했다. 12세기말 교회 연대기 작가인 길베르 드 노장은 이렇게 말했다. “코뮨이란 상호부조의 서약을 의미한다....가증할 신조어다. 농노는 그것을 통해 모든 예속에서 해방된다. 법을 범해도 법의 범위에서만 처벌된다. 지금까지 농노가 항상 지불해왔던 변상의 의무는 없어져 버렸다.”

평등주의와 상호부조적인 결합, 그것을 통한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바로 이것이 도시라는 현상의 ‘기이함’과 ‘새로움’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혁명적인 요소는 원시적 도시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결합시키는 서약이, 하급자를 상급자에게 예속시키는 주종관계의 계약에 비해 평등주의적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수직적인 봉건적 위계 서열 사회를 수평적인 사회로 대체하거나 그것에 적대적이었다.” 앞서 인용한 드 노장은 “코뮨, 그것은 무서운 이름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마도 이것이 일반성을 띤 명사로서 ‘코뮨’이라는 단어의 ‘역사적’ 기원일 것이다. 코뮨이라는 말이 평등와 우애를 기초로 한 자유로운 결사체를 뜻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발생적 역사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코뮨이라는 말에 자치도시라는 의미가 남아 있는 것도 바로 이 동일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이런 점에서 코뮨은 흔히 말하는 공동체와 다른 혈통, 다른 발생적 계보를 갖는다. 동일한 시기의 서양의 농촌에는 이미 공동체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혈통 단위의 공동체든, 촌락이라는 지역단위의 공동체든, 이 모든 공동체에 공통된 기초는 공유지라고 하는 공동체 전체 소유의 토지였다. “촌락공동체는 ‘공유지’를 구성하는 목양지와 산림지를 할당하고 관리하고 보호했다. 이 공유지의 유지는 대부분의 농가에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들이 돼지와 염소의 먹이, 땔감 등을 이곳에서 얻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공동체는 대부분의 경우 공유지에 기초한 것이거나 공동 노동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토지와 노동의 조건에 의해 불가피하게, 그런 만큼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였다. 대개는 자연적 위계를 내포하며 농촌의 공동노동으로 표상되는 공동체라는 개념과, 평등주의적이고 우애적인 관계의 도시적이고 인위적인 ‘공동체’로 표상되는 코뮨이라는 개념은 다른 발생학적 혈통을 갖는다. “도시공동체는 전혀 새로운 중세 고유의 창안물이다.”

하지만 코뮨이 도시적 현상이었다고는 해도, 그리고 중세의 도시가 그 자체로 하나의 ‘공동체’였다고는 해도, 도시와 동일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먼저 도시는 코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서구에서 도시는 일차적으로 그리스의 폴리스나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자리잡았던 현상이고,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부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 중세의 도시의 경우에도, 나중에 그 자체가 경제력에 기초한 정치적 권력을 통해 통치하는 확실히 국가장치로 발전한 도시국가들이 있었고(베네치아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등), 다른 양상이긴 하지만 한자Hansa 동맹을 비롯하여 대개는 상인적인 권력과 결부된 그런 도시들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로포트킨이 도시를 “길드들의 길드”라고 했을 때, 그것은 도시 일반이나 중세 도시 전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내부조직으로 보아 도저히 국가라고 부를 수 없는” 초기의 도시에 국한된 것이다.

또한 코뮨 역시 도시와 동일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농촌에 존재하던 광범위한 촌락공동체와 구별되는 것으로, 마을조합에서 발전된 농촌 코뮨이 적지 않게 존재했다. 이는 도시 코뮨과 거의 같은 시기에 탄생했으며, “12세기 퐁티외와 라오네에서는 코뮨 봉기가 도시와 농촌에서 동시에 발생했다.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촌락과 부락의 연맹에 기초한 코뮨 연맹을 형성했다.” 이는 다른 다수의 지역에서도 공통되게 발견된다. 또한 코뮨적 성격의 조합들은 도시 자체만이 아니라 직업에 따른 조합과 지역에 따른 조합들로 구분되며, 도시가 길드들의 길드라고 하는 경우에도 도시는 최소한 직업적 조합과 지역적 조합의 복합체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도시의 조직원리가 조합이나 길드의 그것을 그대로 반복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것은 포위한 영주나 외부 세력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재정과 군사력을 갖추어야 했고, 이를 위한 독자적인 재원을 축적하고 확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장치의 맹아적 요소들은 도시가 처한 상황과 주변 조건에 따라 행정적 권력의 집중과 조세권을 강하게 발전시키면서 도시국가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중세 도시는 물론 나중의 많은 도시들에서도 시민들의 직접적인 집회가 중요한 규칙과 법령의 입법 및 그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는 역할을 했고, 자치적 법률에 의한 자치 재판이 대부분의 경우 행해졌다. 이런 점에서 초기 중세 도시가 코뮨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 도시의 역사는 도시적 코뮨이 국가장치화되는 과정과 별도로, 고립되고 폐쇄되어 결국은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도시가 자신의 경계에 집착하여 그 외부에 대해 배타적이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들은 이방인과 관련된 제도와 개념을 적대시했다. [그들 생각에] 선은 이웃으로부터 오고 악은 이방인으로부터 온다.”

가령 길드는 내부 성원 사이에는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관계에 따라 상호부조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이는 외부에 대한 공동의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 “1100년경에 공포된 성 오메르의 길드규약은 길드조합원이 결투를 신청받았을 때 사람들은 길드 조합원만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배타성은, 이후 외부자나 새로운 신입자들에 대해 배타성을 행사하고 특권적 힘을 독점하려는 태도로 변모한다. “...이윽고 길드는 일종의 특권단체가 되었다. 나중에 자유도시도 흘러들어온 외부자를 길드에 들어오지 못하게 힘쓰는 한편, 해방 당시부터 시민이었던 소수의 ‘가족’이 거래에서 생겨나는 이익을 가로채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태는 도시의 경계선을 성벽으로 물리적으로 가시화하면서 더욱더 극명하게 된다.

사실 중세 도시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외적 특징은 성벽이었다. 도시의 코뮨들은 영주를 위시한 봉건 귀족계급으로부터 대개는 힘과 투쟁을 통해 독립을 획득함으로써 성립했으며, 특허장이라는 일종의 ‘계약서’가 그 징표였다. 하지만 특허장은 세력관계에 따라 빈번하게 취소되고 무시되었으며, 그것을 되찾기 위해선 투쟁과 희생을 필요로 했다. 가령 캄브라이는 907년에 최초의 혁명을 일으켰지만 그 뒤에도 3, 4회의 봉기를 거듭하여 1076년에야 특허장을 획득했고, 그나마 그것은 1107년과 1138년 두 번에 걸쳐 취소되었고 1127년과 1180년 다시 두 번 획득되었다. 리용의 경우에는 1195년과 1320년 두 번에 걸쳐 다시 특허장을 얻어야 했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말한다. “12세기에 특허장은 자유를 향한 디딤돌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도시는 획득한 독립성을 방어하고 유지하기 위해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모든 도시는 독립적인 세계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15-18세기에 이르면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도시들에 성벽이 있었다.” 그로 인해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호를 위한 것으로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를 경계짓고 제한하는 한계가 된다. “성벽을 세우고 성벽을 다시 재건하더라도 그것이 도시를 감싸 안고 또 도시를 제한하는 것은 언제나 같았다. 성벽은 보호물인 동시에 한계이자 경계였던 것이다....성벽은 [도시의] 경제적.사회적 경계선이 되었다.” 적어도 대포의 발명 이전까지는 말 탄 기사들이나 병사들의 화살로부터 도시를 지켜주던 이 성벽은, 일단 그것이 만들어지면서 도시인에 하나의 동일성/정체성을 부여하고 그 동일성을 지키는 경계로 내면화된다. “도시의 성벽은 그 당시에 알려진 경계 중 가장 넘나들기 힘든 경계였다. 성탑과 성문이 있는 성벽은 두 세계를 갈라놓았다.”

그 두 세계는 바로 도시와 농촌이었다. 도시는 스스로를 해방했지만, 자신의 외부인 농촌 또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영주나 귀족들을 대신해 자신들이 농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인근 농촌지역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한 것은 물론, 농촌의 생산물을 염가로 구입하고 자신들의 상품에는 세금까지 붙여 구매를 강요했고, 도시 민병대조차 농민층에서 선발된 병사들로 구성했다. 그 결과 도시들은 “인근 농민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광활한 농촌 지역의 영주들이 그들의 성채 안에 바리케이드를 쳤듯이, 도시들도 밤이 되면 도개교를 올리고 성문 앞에 사슬을 쳤으며 성벽에 보초를 배치했다.”

이러한 배타성은 신참 직인들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 코뮨과 길드를 적극적인 상호부조의 형식으로 평가하는 크로포트킨조차 이렇게 말한다. “이점에서 중세도시는 처음부터 가공할 과오를 범한 것이다. 성벽의 보호 아래 모여든 농민과 직공을 그들 나름대로 도시 형성에 공헌한 조력자로 보지 않음으로써 본래의 시민 ‘일족’과 신참자 간에 날카로운 분열이 발생했다.

공동의 장사나 공동의 토지에서 생겨나는 모든 이익을 손에 넣는 자는 전자고, 후자는 오직 그들 자신이 익힌 기술을 자유로이 쓸 수 있는 권리만을 갖는데 불과했다....

이전에는 공동이었던 거래도 이제는 ‘일종’의 상인과 직인의 특권이 되었다.“




요컨대 자유로운 개인들의 평등하고 우애적인 결사체로 시작했던 도시의 코뮨은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의 내부에 안주하면서 그 외부에 대해 배타성을 행사하고 그 외부자들을 착취함으로써, 그리고 그 내부에 들어온 이후에도 그들을 역시 착취하고 억압함으로써, 또 다른 종류의 배타적 특권단체로 ‘발전’해갔다. 이로써 그들은 도시를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농촌으로 코뮨적인 관계를 확장해가지 못했고, 관계 자체 또한 새로운 종류의 양상으로 펼쳐가지 못했다. 반대로 도시는 자신에 적대적인 영주와 농촌의 바다에 둘러싸인 고립된 섬이 되었다. 거기서 도시가 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몇몇 특권적인 가족, 가문이 지배하는 국가적 포획장치가 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립과 폐쇄 상태에 갇혀 서서히 몰락하여 영토적 국가체제 안에 포섭되는 것이었다.







3. 공동체주의와 내부성




토니 모리슨의 소설 {파라다이스}는 인접한, 그러나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 공동체를 다루고 있다. 하나는 ‘루비’라는 이름의 흑인공동체고, 다른 하나는 이름도 없고 ‘공동체’라는 정체성도 없는, 다만 수녀 없는 낡은 수녀원에 모여 사는 여자들의 무리다.

먼저 흑인들의 명시적인 공동체 루비. 하지만 그보다 먼저 헤이븐의 공동체가 있었다. ‘빅 파파’라고 불리는 흑인 재커라이어가, 해방된 동료 노예들과 함께 만들어낸 공동의 ‘세계’가 바로 헤이븐이다. 살던 곳에서 쫓겨난 아홉 가구의 대가족, 하지만 이르는 곳마다 하룻밤 머무는 것조차 ‘불허’되는 고통을 겪으며 여행하여 도달한 곳이 헤이븐이었다. “헤이븐의 세대들은 모든 것을 공유했으며, 아무도 부족한 사람이 없도록 배려했다.” 면화농사를 망쳤다면 “사탕수수 농가들이 면화농가들에게 자기네 이윤을 나누어주었다.” 돼지들이 이웃의 밭을 망쳐놓았다면 몰려가 보상해주었고 돼지 잡을 때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고, 헛간이 불탔다면 누군가 그에게 다른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1890년 오클라호마를 향한 여정에서 온 세상의 괄시를 받았던 헤이븐 주민들은 서로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고, 누구 하나 궁핍하거나 부족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살펴주었다.” 그렇게 하나의 공동세계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자식들이 결혼할 때마다 분할되는 토지는 유일한 자급적 능력을 시간이 감에 따라 취약하게 만들었고, 면화산업의 붕괴 또한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 결과 오클라호마 지역에서도 꿈의 도시였던 헤이븐은 급속히 몰락해, 많은 땐 5백명에 이르던 주민이 2백명으로, 80명으로 줄게 된다. 제커라이어의 손자인 두 쌍둥이 형제를 위시하여, “헌신적인 향토애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마을의 몇몇 젊은 사람들은 “다시 한번 고향을 일으키겠다는 결심으로 새로운 땅을 찾아 공동체를 건설한다. ‘루비’라는 이름의 공동체.

자신들만의 세계를 찾아 떠났던 그 여행은 흑인이라는 사실의 고통을 더없이 겪는 과정이었다. ‘해방된’ 이후에도 지속되는 노예적 모욕. 그러나 새까만 피부색의 ‘원단’ 흑인인 그들을 핍박하고 그들의 정착은 물론 머묾조차 ‘불허’했던 것은 단지 백인만이 아니었다. 연한 피부색의 흑인들로부터도 그들은 차별과 ‘불허’를 받아야 했다. 이는 그들에겐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민 대 노예, 부자 대 빈민의 대치구도에 대항해 투쟁한다고 믿어왔다.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은 흑인 대 백인 구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새로운 차별의 장벽에 부딪친 것이다. 연한 피부색 대 흑인이라는. 아, 백인들이 내심 차별하고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깜둥이들 스스로까지 영향을, 그것도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312쪽) 그래서 그들은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에 저장하며 여행했다. “잇따른 불행을 겪으면서 점점더 단단해지고 더욱더 오만해졌다. 그리고 이 불행한 사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쌍둥이의 기억 속에 낱낱이 각인되었다.”(33-34쪽)

탄광의 깊디깊은 암층을 뜻하는 제8암층(eight-rock), 그것은 이 쓰라린 기억 속에서 자신들의 새카만 피부를 새로운 자존심의 징표로 삼았던 이들에 대해, 처음에 떠났던 아홉 가족에게 패트리시아가 붙인 기호다. 그것은 백인들에 대한, 아니 인종차별에 대한 증오와 원한 속에서 자신들의 순수한 혈통을 새로운 차별의 준거로 삼는 사람들의 징표기도 하다. 이제 이들이 만든 ‘세계’에서도 혈통의 법칙이 기정 사실이 되어 지배한다. 그래서 그들은 메누스가 데려온 백인 아가씨를 쫓아버렸고, 메누스를 술에 절어 살게 했으며, 혼혈아를 아내로 맞은 로저 부부나 그 딸 패트리시아를 따돌렸다. 패트리시아의 딸 빌리 델리아가 아기 시절의 ‘실수’로 평생 ‘헤픈 년’ 취급을 당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그들은 제일 먼저 백인 소녀를 쏜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인종차별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공동체를 세웠지만, 자신들만의 순수성을 또 다른 차별의 축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패트리시아가 아버지에게 말한다. “피부색이었죠? 그렇죠?/ 뭐가?/ 이 마을에서 사람들을 선택하고 계급을 정하는 기준 말이에요.”(348쪽) 고통의 행로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이렇듯 원한과 미움을 감정을 응어리지어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낸다. 백인들의 차별과 정확히 대칭적인 차별. “그들은 자기네들이 머리싸움에서 백인들을 능가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백인들을 모방할 뿐이다.”(483쪽)

이는 외부자에 대한 적대와 불신의 다른 양상이다. 이들에게 모든 이방인은 적이며, 모든 외부자는 경계와 배제의 대상이다. 그래서인지 루비는 “1마일도 채 안되는 간격을 두고 교회가 세 개나 있으면서도 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하나도 없는”(30쪽) 마을이다. “루비 사람들은 하나같이 외지인에 대해서 얼음처럼 냉랭한 불신을 품고 있었다.”(259쪽) 이는 앞 세대인 헤이븐의 창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재커라이어는 손자인 쌍둥이 형제에게 “헤이븐의 창건자들과 그 후손들이 어째서 끼리끼리 모여 살며 외부인을 그토록 못 견디게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밝혀주는 이야기를” 거듭하여 해준다(32쪽).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지키려는 백인들의 분리주의와 정확히 대칭적인 분리주의가 이방인에 대한, 이질적 성분에 대한 저 강한 적대감 속에 자리잡고 있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적은 아니란 말이요”라고 말하는 미즈너 목사에게 패트리시아는 대답한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그 두 단어가 같은 뜻이랍니다.”(341쪽) 그래서 쌍둥이 중 형인 디컨의 처인 소앤은 심지어 루비 바깥의 그 어떤 곳보다 차라리 “군대가 더 안전할 거라고”(164쪽) 생각해서 두 아들을 군대에 보냈고, 둘 다를 잃는다.

여기에 사적 소유와 가족적 족보라는, 공동체와 반하는 요소들이 끼어들면서 사태는 더욱더 악화된다. 심지어 어려움을 공유하고 나누었던 헤이븐의 가장 중요한 장점마저 사라진다. 루비의 사람들은 이제 타인들의 어려움을 나누기보다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에 급급하며, 그것은 공동체 내부에 새로운 분열과 대립을 야기한다. 이전에는 서로의 불화를 평범한 것으로 생각했고, 이웃의 성취를 기뻐했고, 게으름을 비웃는 것도 너털웃음으로 넘겼었다. “지금은 어쩐지 한때 외지인에게만 국한되었던 얼음 같은 경계심을 점점 더 서로를 향해 돌리는 느낌이다.”(260쪽) 그것은 어쩌면 헤이븐이 이사의 형식으로 붕괴되고 해체되었듯이, 루비를 내부로부터 해체하고 붕괴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위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대신 그들은 그 모든 해체와 붕괴, 불안의 요인을 또 다시 외부 탓으로 돌린다. “저 개망나니들이 오기 전엔 이 마을이 평화로운 천국이었단 말일세. 최소한 그 전에 있던 여자들은 종교 비슷한 거라도 있었잖아. 이 걸레들은 자기네끼리 똘똘 뭉쳐 살면서 교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을걸.”(438쪽)

다른 한편 공동체의 ‘정체성’을 위협하거나 공동체를 시작한 선조들--그들을 상징하는 신성화된 장소로서 화덕과 거기 새겨진 글--을 흔들려는 시도로 사람들의 차이가 드러날 때, 그것은 공동체 자체의 근간을 뒤흔들려는 것으로 간주하여 비난하고 억압한다. 미즈너 목사는 화덕을 둘러싼 토론장에서 “자기 말만 하자는 게 아니라 남의 말도 들어보자”면서 젊은이들의 편을 들지만, 그것은 “만약 네 놈들 중에 한 놈이라도 화덕 입구에 새겨진 말씀을 무시하거나 바꾸거나 없애거나 덧붙이려는 수작을 하면 방울뱀 쏴 죽이듯 머리를 날려버릴테다, 알겠냐?”는 협박으로 끝난다. 변경도, 제거도, 추가도,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차이도 허용되지 않는다.

요컨대 백인들의 국가, “단 한 명의 학생--깜둥이 소녀--를 위해 아예 법대 하나를 새로 지어가면서까지 분리정책을 고수하려는 이 나라”(95쪽)에서, 혹은 흑인이나 다른 이질적 요소의 침투로부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보호’하고 지키려는 백인들의 차별과 억압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던 시도는, 자신들이 받은 모든 상처와 모멸을 고스란히 기억하며 원한과 미움, 혹은 두려움 속에서 모든 외부자, 외부성 자체를 적대시하는 것으로 나아갔고, 그 결과 모든 혼혈과 잡종, 이질성을 적대시하고 차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 역시 자신들만의 공동의 세계를 만들고자 했고, 외부자들이 끼어 들 수 없는 순수하고 동질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순수주의를 꿈꾸었다. 그리고 모든 외부적이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배제하려고 했던 백인들의 인종주의적 차별과 정확하게 대칭적인 차별을 스스로의 내부에 만들어냈고,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상이한 목소리, 상이한 생각도 허용하지 않는 억압을 스스로 만들어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지는 모든 동요와 해체, 붕괴의 요소들을 다른 소수적인 외부자 탓으로 돌렸다.

외부성, 그것은 고향의 편안함과 친숙함을 사랑하기에 그것의 순수성을 고수하고 보호하려는 공동체주의의 적이다. 그것은 친숙함과 편안함을 뜻하는 ‘안에-있음’을 본질로 하는 만큼 그에 반하는 모든 외부성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내부성을 본질로 한다는 생각은, 그것이 역사적이든 이론적이든, 혹은 사실적이든 문학적이든 모든 종류의 공동체가 외부에 대해 적대하고 폐쇄적이 되며, 내부에서 자신들만의 동질적인 세계를 건설하려는 꿈과 직접 결부되어 있다. 공동체의 정체성/동일성에 대한 집착, 공동체의 전통과 그것의 기원, 그것에 결부된 모든 고통의 기억, 이 모든 것이 외부에 대해 스스로의 문을 닫게 만들고, 자신들만의 내부적인-친숙한 세계에 정주하려는 그런 태도를 표현한다. 내부 내지 내부성은 이러한 폐쇄적 공동체주의를 특징짓는 귀착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내부성이란 그런 순수하고 폐쇄적인 ‘공동체주의’의 공간성을 표현하는 개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5. 코뮨주의와 외부성




또 하나의 ‘파라다이스’는 수녀원에 있다. 그들은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받아주었을”(28쪽) 뿐이다. 그래서 갈 곳 없는 사람들, 아니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의식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유지하고 보호할 어떤 동일성/정체성도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새로 옴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에서 살아갈 뿐이며, 이전의 친숙한 ‘세계’를 유지하려는 관심도, 혹은 꿈꾸는 어떤 미래 세계에 현재를 맞추려는 관심도 없다.

거기는 수녀들도 모두 떠난 뒤에 수녀원장이던 메리 마그나와 더불어 콘솔레이타(코니)가 살던 곳이다. 하지만 지나던 길에 스친 인연만으로도, 힘겨운 삶을 놓아버리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소망이 있는 저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머물고 정박하게 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친숙한 사람들 안에 닫혀 있지 않았으며, 반대로 낯설고 거친 외부인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아니, 이곳은 태생부터 그랬다. 주역인 코니는 수녀들이 주워다 기른 여자고, 이후에 모여든 모든 여자들 또한 대개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 불화를 빚던 사람들이다. 코니, “이 다정하고 푸근한 할머니는” ‘객’으로 들어와 있게 된 저 개성이 강한 다른 이들에 대해서 “결코 비판하지 않았고, 무엇이든 아낌없이 나눠주면서도 당신은 별로 돌봐줄 필요가 없었으며, 정서적인 투자도 요구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절대 문을 걸어잠그지 않고 누구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418쪽)

수녀원의 이 공동체는 그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루비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열려 있다. ‘도덕적인’ 루비의 사람들이 불편해하며 내치고 있던 애너의 ‘애비 없는’ 출산을 도와주고, 그녀를 돌보아주었던 것도, 기형아 아들들의 간호에 지쳐 혼이 빠진 채 방황하던 스위티를 보호하고 간호해 준 것도, 수녀원에 모여 있는 저 “부도덕한 암말들”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애너와 달리 그녀의 친구인 빌리 델리아는 수녀원에 머문 이후에 거꾸로 루비보다 거기를 더 편하게 여긴다. 쌍둥이 디컨의 아내 소앤은, 코니로 인해 자신의 아들이 사고에서 살아났음을 알고, 자신의 남편을 ‘공유’했던 코니에게 호감을 느끼며, 빈번하게 들러서 약을 얻고 신세를 진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론 또한 코니와 수녀원 여자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이는 모두 코니의 ‘세계’가 심지어 자신들을 적대하는 루비 사람들에게까지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처음부터 외부자들, 외부적 요소들의 결합으로 시작되고 만들어져 간 ‘공동체’, 따라서 외부를 향해 항상 열려 있는, 들어오길 원하는 누구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공동세계’, 이런 종류의 ‘공동세계'는 내부성이 아니라 외부성을 자신의 고유한 공간성으로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런 점에서 친숙함을 뜻하는 내부성을 갖는 ‘공동세계’로서 공동체와 구별되는 다른 종류의 ‘공동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내부성이 순수성과 동질성을 향한 경향을 갖는 것과 반대로 외부성은 이질성과 혼혈성을 특징으로 한다. 외부에서 다가오는 것이란 언제나 뜻밖의 것이고, 우연적인 것이며,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오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은 그런 이질적이고 우연적인 뜻밖의 것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공동의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가령 코니가 사는 수녀원은 모두다 나름의 상처와 사연이 있는 여자들이 지나가다 머물면서 만들어진 곳이고, 그런 만큼 모인 사람 각자가 상이하고 이질적이다. 그러니 지킬 어떠한 순수성도 없었고, 보호할 어떠한 세계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변하면서 존재하는 어떤 ‘세계’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계획이나 프로그램, 목적을 대보라고 이들에게 묻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은 절대로 필요한 일이 아니면 결코 하지 않았고, 뭘 하겠다는 계획조차 없었다. 계획 대신 소망을 가졌을 뿐이었다.”(354쪽)

사는 사람들 각자의 특이성이 강하지만, 새로 오는 사람의 특이성이 추가되면, 수녀원 안에 만들어진 이 세계는 달라진다. 외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지 어떤 외부에서 온 어떤 개인의 개성이나 특이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바로 이렇게 새로운 외부자와 접속하고 결합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차이와 변화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코니와 마더, 메이비스가 살던 때와, 마더가 죽고 그레이스가 새로 온 이후의 삶은 아주 다르다. 거기에 세네카가 새로 왔을 땐, 이들의 삶이 또 다시 그로 인해 많이 변화된다. 아마 나름의 특이성을 갖고 있는 누가 와도 사태는 또 다시 달라지고 그때마다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든 공통된 것이 있다면, 거기에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싸움과 충돌이 끊이지 않지만, 이들 각자는 어디서보다 이곳에서 더 편안하고 평화로운 삶을 산다고 느낀다. 그래서 가령 메이비스와 그레이스(지지)는 걸핏하면 피 터지게 싸우고 욕을 하고, 싸움을 할 때마다 떠나버리겠다고 외치지만, 정작 떠난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엄마에게 애인을 빼앗긴 상처로 흘러든 디바인조차, 부자인 아버지에게 돌아가지만, 다시 이 수녀원으로 돌아온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

코니의 수녀원에 모인 사람들, 이들 역시 루비의 흑인들 못지 않게 상처 입은 사람들이고, 그들보다 더한 소수자minority들이다. 가령 14때 출산했던 언니 행세를 하던 엄마에게서 버려졌고 입양되어선 의붓오빠에게 겁탈 당하고 그로 인해 다시 버려졌던 세네카는 그때 이후 상처 같은 삶의 고통이 떠오를 때면 자신의 살갗에 칼집을 낸다. 칼의 움직임을 따라 피가 솟는 것을 보며 고통을 잊는다. 디바인은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그런데 루비의 흑인들이 자신들의 상처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그 기억을 내면으로 투사하여 원한과 미움, 적대의 감정을 만들었음에 반해,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과거를 굳이 묻지도 않지만, 마음이 열리면 스스로 말하고, 하는 말을 마음을 열고 들어주며 진심으로 위로한다. 메이비스와 그레이스처럼 싫은 일이 있으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 감정을 투척projection하면 했지, 결코 그것을 원한과 복수의 감정으로 투입injection하지 않는다.

코니는 마지막으로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게 한다. 각각의 몸을 그리고 그 위에, 그 안에 내키는 모든 것을 그리게 한다. 그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상처를 드러내게 하고 그 상처에 대해, 상처를 만들 것들에게 대해 마음껏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 상처와 결부된 것들이 그려진다. 혹은 소중한 것들이 그려진다. 세네카는 이제 자신의 피부가 아니라 지하실의 그 그림 위에 칼질을 한다. 그레이스는 아직 죽진 않은 사형수인 아버지의 유품을 그린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털어 낸 듯 벌거벗은 채 밤새 춤을 춘다. “루비에 사는 사람들과 달리, 수녀원의 여인들은 그들을 쫓아다니는 악몽을 벗어버렸던 것이다.”(425쪽)







6. 두 가지 공동체




이처럼 이 소설은 전혀 다른 종류의 두 개의 ‘파라다이스’를 그리고 있다. 하나는 억압과 고통을 뜻할 뿐인 저 백인들의 나라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세계를 꿈꾸는 강한 염원에 따라 만들어진 공동체 헤이븐과 루비였다면, 다른 하나는 공동체도 공동세계도 따로 꿈꾸지 않았지만, 다가오는 모든 외부자들에게 열린 채 들어온 모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만들어진 수녀원의 ‘공동체’다. 전자가 자신들이 받은 상처와 악몽을 하나도 잊지 못한 채 내면의 기억 속에 남겨두었다면, 후자는 그것을 차라리 밖으로 표출할 기회를 찾아 지우고 벗어버렸다. 그래서 전자는 자신들 외부의 모든 것들을 적대자로 간주하고 그에 대한 원한과 미움으로 그에 대해 높고 견고한 벽을 쌓았다면, 후자는 심지어 싸우고 충돌하는 경우에도 원한을 남기지 않았고, 있던 것은 풀어버릴 수 있게 했으며, 모든 외부에 대해 자신을 열면서 자기만의 벽을 낮추고 없애려 했다.

두 개의 공동세계에서 보이는 내부성과 외부성의 이러한 차이는 동질성과 이질성의 차이로, 순수성과 혼혈성의 차이로 이어진다. 전자에게는 자신들만의 친숙함이 중요했고, 그랬기에 공동체를 창건했던 가족들간의 친숙함은 더더욱 중요했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흑색의 순수한 혈통은 그 모든 외부에 대해 스스로 결속하게 하는 내부적 동인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흐리거나 그것에 끼어 드는 모든 이질성과 혼혈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냈다. 반면 후자로서는 어차피 모여드는 사람이 한결같이 낯선 외부자들이기에, 친숙함을 뜻하는 내부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필요한 친숙함이란 그때마다 새로 만들어내면 될 것이었으며, 아무리 가까워져도 새로운 외부자가 언제든지 끼어 들 여백-거리를 남겨두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 코니와 가까운 사람과 덜 가까운 사람이 구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어떤 순수한 내부를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따라서 여기선 차별을 할 어떤 척도도 있지 않았다.

또한 내부성과 외부성의 차이는 정체와 변이, 존재와 생성의 차이로 이어진다. 전자는 자신들의 흑인‘임’에 머물며 그것을 지키고 고수하려 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어떤 공동체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는 이들에게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가졌다. 그것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외부로부터든 내부로부터든 어떠한 변화의 요인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고,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변화에 대해서는 가리고 봉합하려 했으며, 그래도 터져 나오게 되었을 땐 외부의 탓으로 돌렸다. 멈추어 있는 것, 순수한 어떤 상태에 영원히 멈추어 있는 것, 그것이 이들의 암묵적 이상이었던 것이다. 반면 후자는 지켜야할 어떤 정체성도 없으며, 반대로 새로운 외부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끊임없이 자신들의 세계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것은 여성들로 이루어진 세계였지만, 굳이 여성들만으로 제한하려는 뜻도 없었고, 그러려고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여자들은 그들이 아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믿고 따르는 가치체계에 감히 반기를 들었던”(23쪽) ‘암말’들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여성적인 어떤 상태나 여성성이라고 불리는 어떤 지녀야할 또 다른 순수성 내지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무언가 추가될 때마다 다른 것이 ‘되는’ 끊임없는 변이와 생성만이 이들의 세계를 특징짓는 것이다.

따라서 전자에게는 인근에 후자와 같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불안하다. 그것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곳이고,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며, 수긍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 내부에, 강하게 뭉쳐있는 그 순수성의 내부에 사고가 발생하고 금이 가고 균열이 가시화됨에 따라, 그 모든 것은 내부에서 발생할 수 없어야 하기에, 외부에서, 저 더러운 암말들의 지저분한 배설물들이 묻어들어와서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고 보았고, 그래서 “한때 진정한 이웃이었던” 수녀원의 이상한 여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선다. “안팎으로 그 무엇도, 단 하나 남은 흑인들만의 마을을 부패시키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고통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19쪽) 그리하여 자신들의 공동의 세계를 만들려던 시도는,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시도는 이제 외부의 또 다른 소수자를 향한 억압과 단죄, 파괴의 선을 그리게 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파라다이스}에 등장하는 두 가지 공동체는 전혀 다른 원리를 갖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본성을 달리한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상이한 두 공동체의 본성은 각각 ‘내부성’과 ‘외부성’이라는 두 ‘공간성’의 개념을 통해서 대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리슨은 친숙성과 거주함을 존재의 본성에 귀속시키고 그것을 내부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했던 하이데거의 ‘공동세계’ 개념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던지고 있는 셈이며, 그것과 전혀 다른 ‘공동세계’의 공간성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루비의 흑인 공동체가 자신의 ‘고향’을 보호하기 위해, 그것에 이질적인 요소, 해체의 요소들을 침투시키고 있는 외부 세계를 향해 총과 무기를 들고 나섰던 것은, 하이데거가 자신이 사랑했던 공동세계인 “조국 독일”을 위해, 그 ‘세계’의 공동성과 내부성을 복원하려는 계획을 들고 무기를 들었던 강력한 민족주의 운동(나치)에 대해 적극적 지지를 보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태도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힘 있는 자, 억압하는 자들의 내부적 결속과 달리, 힘 없는 자, 억압받는 자들의 내부적 결속이기에 오히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위험을 정확하게 지적하여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억압받는 자들이 자신만의 내부성과 순수성을 원칙으로 삼았을 때,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자 했을 때, 그들조차 억압하는 자의 삶과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여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픈 가슴을 저미며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앞서 중세 도시와 코뮨의 역사에서 그와 동일한 양상이 역사적으로 전개된 바 있음을 살펴본 바 있다. 거기서도 역시 애초에는 코뮨적 관계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수립했던 경계와 성벽이 자신들과 타인들, 장인과 직인, 노동자들, 그리고 도시와 농촌을 가르면서 외부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그것 또한 ‘공동체’든 ‘코뮨’이든 외부에 대한 적대 속에서 내부성에 갇히는 순간, 그리고 그 내부성에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외부자들을 배제하고 내부의 차이와 이질성을 억압하는 권력의 배치로 넘어간다는 것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코뮨을 공동체로부터 구별하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공동체’라는 말의 소박함이 싫어서도 아니고, 그것과 결부된 낭만적 뉘앙스를 피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이데거 식의 철학적 개념을 빌면 ‘내부성’과 ‘외부성’이라는 공간성의 차이, 혹은 그것과 결부된 것으로 동질성과 이질성, 순수성과 혼혈성, 정체와 변이, 존재와 생성의 차이라는, ‘공동세계’를 구성하고 만들어 가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소유와 노동조건에 의해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공동체’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에 의한 공동체’라는 공동체와 코뮨의 발생적 차이도 우리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인 것은 동일하게 코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공동체조차 둘로 나누는 원리적 차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혹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공동체나 코뮨이라는 말조차 중요하지 않다. 외부성을 원리로 하는, 혹은 적어도 외부를 향해 열려 있으며 그 외부를 통해 스스로 끊임없이 변이하는 그런 ‘공동체’가 있을 수 있는 반면, 내부성을 원리로 하는, 적어도 외부에 대해 닫혀 있으며 자신만의 내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그런 ‘코뮨’ 또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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