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에 있었던 자유인문캠프 토론회 녹취록이 올라와 있네요.
녹취록|자유인문캠프 라운드테이블 02 “청년, 운동을 지속한다는 것”
자유인문캠프 라운드테이블 02 “청년, 운동을 지속한다는 것”
2014년 11월 1일 오후 3시 – 6시, 공중캠프.
사회_ 고두현(자유인문캠프 기획단 잠수함토끼들)
토론자_ 박은선(리슨투더시티), 주현우(세미나네트워크 새움), 좌인 오디 우더(공동체은행 빈고)
지원_ 서울시NPO지원센터
*1부 단위별 소개 및 공통 질문
사회자_ 안녕하세요. 저는 자유인문캠프 기획단 잠수함토끼들의 고두현이라고 합니다. 자유인문캠프가 2010년 가을에 처음 시작했는데요. 어느덧 햇수로 다섯 해가 지났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며 앞으로를 많이 고민하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이번 ‘청년, 운동을 지속한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라운드테이블을 열게 되었습니다.
청년들이 나이가 들면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만, 저희는 그간 자유인문캠프를 통해 불합리한 사회의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해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청년을 많이 만나고 관계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도 그렇지만 그들 역시, 청년기가 지나면 어떻게 운동을 이어갈지 고민이 많더라구요. 취업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지. 그래서 삶을 지속하려면 활동을 포기하라고, 대안적 활동들은 쓸모없는 짓이라고 취급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점차 강해지구요. 활동의 토대가 될 재원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 역시 점점 어려워지고. 그렇게 자연스레 함께 했던 이들도 하나둘 떠나가고, 공동체가 와해되고. 결국 그간 공동체가 쌓아온 노하우와 문화들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어두운 전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청년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대안적 실천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는 선배 단위들을 이어주려는 목적에서도 이번 라운드테이블을 준비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꾸준히 운동을 해온 세 단위를 모셨는데요. 리슨투더시티, 세미나네트워크 새움, 공동체은행 빈고입니다. 먼저 리슨투더시티의 박은선님부터 짧게 각자의 활동을 소개해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박은선(리슨투더시티)_ 안녕하세요. 저는 리슨투더시티 박은선이라고 하고요. 리슨투더시티는 이름만 들어서는 뭘 하는 단첸지 대체 알 수 없는데요. 저희도 잘 모르고요. 매번 매순간마다 하는 일이 바뀌어가지고. 저희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걸 두려워하기도 하고 좋아하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이름을 지어버리면 그 안에 갇혀버리거든요. 그리고 사실 이 행사에 참여한 게 남사스러운데, 운동이라고 나와서. 저희는 아티스트지만, 다른 아티스트들은 저희를 운동권이라고 부르고 싶어하고, 운동권은 또 저희를 뭔지 모르는 사람으로 부르고 싶어 하고. 분류를 자기들 마음대로 하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저희가 어떻게 불리느냐, 명칭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이따가 더 자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주현우(세미나네트워크 새움)_ 좀 더 길게 설명해주실 줄 알고 맘을 놓고 있다가. (웃음) 저는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에서 나온 주현우라고 하고요. 현재 자본론 간사를 하고 있습니다. 자본론 간사를 한 지 2년째가 돼가고요. 새움은 한지 햇수로 10년 정도가 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저희가 지향하는 것은 국가나 또는 자본에 의해서 독점적으로 지식이 생산되는 것에 대해서 대중이 자체적으로 대안적인, 진보적인 지식들을 생산하고 공유하고 확장해나가는 것입니다. 그 대안적인, 진보적인 지식 기반의 출발점으로 맑스주의를 표방하고 있고요.
하지만 맑스주의 자체를 교조화한다거나 하는 방식보다는, 출발지점을 그렇게 하되, 그것을 뛰어넘거나 다른 방식을 고민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출발점 이후의 영역은 새움에 들어오는 구성원들 스스로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저희는 기본적으로 자발성이라는 걸 강하게 중시하는데요. 그걸 바탕으로 현재 10년 정도 활동해왔습니다.
공간을 네 번 정도 옮겼는데, 현재는 상수역 근처에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본론 세미나와 마르크스주의 세미나 이렇게 두 개를 핵심으로 하고, 이외의 다른 세미나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환경 세미나도 있었고, 올해는 여성 세미나와 동남아시아 세미나를 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된 부분들은 추가적인 질문을 하면서 더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좌인(공동체은행 빈고)_ 안녕하세요. 저는 공동체 은행 빈고에서 활동하고 있는 좌인이라고 하고요. 이 자리에는 저뿐만 아니라 같이 활동하고 있는 오디 상임활동가와 그리고 빈고가 연대하고 있는 빈마을에 살던 우더라는 친구도 함께 왔습니다. 앞으로 나오시죠? (웃음) 저희 공동체은행 빈고는 말 그대로 은행이긴 은행인데, 거기 모인 자본을 공동체들이 확장되고 유지되는데, 즉 활동의 지지기반을 다져가는 데 돈을 굴리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은행이고요. 소속된 조합원은 215명 정도, 자산은 2억 3천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규모입니다. 보면 4인 가족이 살 수 있는 방 두 세 개짜리 전세도 얻기 힘든 그런 돈인데요. 그 2억 3천만 원으로 10개 공동체가 사용하는 공간의 보증금으로 이용하고, 그 공간들과 빈고가 긴밀하게 연대하면서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고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연대하고 있는 공동체들을 조금 얘기해드리면, 빈고가 초기 만들어질 수 있게 근간이 된, 빈집이 있습니다. 들어보신 적 있는지 모르겠어요. 고개 끄덕이시는 분들도 계시네요. 또 청주에 있는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공부해서 용 되자”라는 뜻으로 열심히 생활과 운동을 함께 하고 있는 곳입니다. 또 최근에는 부천 ‘모두들’이라고 하는. 공유 주거 운동을 목표로 다섯 채의 집에서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곳도 있구요. 또 한 친구가 빈집에 단기 투숙을 했다가, 빈집 같은 곳을 부산에 만들고 싶다고 해서 ‘잘잘이집’이라는 곳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는데, 그 곳과도 연대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공주에서 생태대안건축을 만들고 있는 두레배움터라는 곳이라든지, 대구에 또 공유주거를 진행하고 있는 ‘우리집’이라든지, 이렇게 여러 단체들과 또는 공동체들과 연대하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빈집을 시작한 친구들은 진보적인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저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다만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은행에 맡기는 돈들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그 돈이 우리가 거부하고 싶은 국가나 자본의 힘을 얼마나 키우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우리끼리 힘을 모을 때 더 가능성들이 많다는 것들을 빈고 안에서 실현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빈고 이야기와 제가 살고 있는 빈집-빈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의 주제에 대해서 덧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자_ 각 단위별로 활동을 좀 더 길게 소개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리슨투더시티에서 발표하시겠습니다.
박은선(리슨투더시티)_ 저희는 원래 팀원이 4명 정도 됩니다. 저는 순수미술을 전공했고, 대학에서는 미술사랑 실기를 강의하고 있고, 저 자신은 수유너머 회원이기도 합니다. 다른 2명은 시각 디자이너 2명이고요, 다른 1명은 영화감독을 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시각디자이너나 감독들이나 음악하는 친구들과 연대해서 일시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미술과 예술과 디자인과 건축과 도시와, 모든 것들을 섞어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대안잡지를 만드는 걸로 시작했었어요. 『어반 드로잉즈Urban Drawings』라고, 여기 1권은 다 팔려서 없지만, 2권이 바로 4대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휴머니즘과 모더니티의 관계라든가 그런 것들을 살펴보는 호였는데, 그때 지율스님 글 받으면서 잡지를 만들게 됐습니다. 저는 우연히 4대강 현장에 방문한 후로, 2009년부터 계속 그와 관련된 활동도 하게 됐습니다. 2010년에 저희가 4대강 지도를 그렸는데, 당시에는 거의 유일한 4대강 지도였습니다, 이따가 이 얘기는 더 할 거고. 2010년부터는 <서울 투어 프로젝트>를 시작해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습니다. 황학동 롯데 캐슬, 인왕산, 동대문, 청계천, 4대강 현장 등 사회적으로 모순적인 곳들을 많이 찾아갔습니다. 예를 들어 청계천 8가에 노점상들 철거하고 들어선 롯데 캐슬 베네치아라거나. 아니면 인왕산 같은 경우 서울에서 중요한 산인데, 그 산을 둘러싸고 아파트들이 난립되는 바람에 산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니면, 대형마트와 재래시장이 대비되는 공간을 찾아가기도 했고요.
청계천 녹조투어도 했습니다. 청계천에서 ‘얼마나 녹조가 자랐는지’ 구경하는 겁니다. 중요한 점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핵심적인 많은 토목 개발 기술들이 청계천에서 연마가 됐다는 점입니다. 저는 미셸 푸코를 좋아하는데, 그는 어떻게 해서 통치술이 바뀌었는가에 대한 담론을 얘기했습니다. 청계천이 그래서 중요한데, 2010년부터 계속 청계천 투어를 하면서, 그 곳에서 물이 얼마나 오염됐고, 공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누가 비리를 저질렀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개발의 언어가 선취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도시 공간에서 어떻게 해야지 젠트리피케이션을 나이스하고 부드럽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아주 완벽한 기술들을 보여주는 장소가 청계천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같이 보는 작업을 했습니다. 청계천의 소라탑 앞에서는 그것을 만든 클래스 올덴버그라는 작가의 약력을 읽는다든지. 물론 당연히 한국이랑 서울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작가죠. 녹조 색깔로 컵도 만들었습니다. 야심차게 만들었는데 한 10개 정도 팔렸어요. 스페셜 버전으로 한 2개 남았으니까, 원래 만원인데, 2만원에 팔 예정입니다(웃음).
다음으로 리버풀리버 프로젝트가 있는데요, 저희가 했던 작업 중에 가장 아트아트하고 아방아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작업은 아방가르드한 예술에게 요구하는 것들 있잖아요. 약간 나이스하고 귀여우면서도, 상상감을 살짝 자극해주면서 세련된 그런 조건을 만족하는 그런 작업인데요. 이런 것들도 한번 해줘야 화이트 큐브에서도 보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 것뿐이에요. 하지만 재밌었어요. 그래서 이게 리버풀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한국 사람들에게 리버풀을 상상하게 하는 작업인데요, 조선 사람들은 L이랑 R 발음을 구분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리버풀(Liverpool)이라는 도시를 상상하게 했더니 대부분 강(River)이랑 풀을 그리는 거예요. 영어를 쪼끔 잘하시는 분은, 간(Liver)이랑 풀을 그리더라구요. Liver가 간이잖아요? 그 다음에 그걸 기반으로 상상을 소설로 쓰게 했고, 열 댓분의 참가자들에게 모든 정보를 수집해서 상상의 리버풀 지도를 만들었어요. 지도 드로잉은 제가 했습니다, 제가 미대 출신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귀엽게 잘 그린 그림이죠?(웃음). 이 작업은 라캉의 거울 단계에 착안을 해서, 큰 도심 속에 사는 사람들이 그 도심을 어떻게 지각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때문에 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게 상상들을 모아 그린 드로잉에는 리버풀이지만, 실재의 리버풀이랑 당연히 아무 상관도 없고 비슷하지도 않는다는 거에요. 오히려 정말 서울 사람들이 원하는 아주 유럽적이고 가장 이상적인 유럽도시를 하나 만들어지는 거죠. 리버풀을 거울로 서울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가 만들어진 거죠. 이런 방식으로 남한이 상상하는 북한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또 동대문 운동장이라는 장소와 그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는 작업도 했어요. 제가 잠시 건축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정작 도시의 이면은 기록되지 않더라고요. 동대문에서 노점상들이 투쟁하는 일, 이런 뒷면의 역사는 사실은 거의 기록이 안 되죠. 저는 거기에 충격 받았거든요. 그래서 이런 역사를 기록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일이 될 수 있겠다. 저희가 노점상 투쟁이나 이런 걸 엄청 열심히 연대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오세훈 시장 때의 부정적인 인터넷 기사들이 나중에 굉장히 많이 삭제가 됐어요. 서울시에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뉴시스나 이런 인터넷 뉴스들이 다 삭제가 됐더라고요. 오세훈 시장 임기 때 새빛둥둥섬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나 여러 가지들이 이제는 삭제된 상황이에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구나. 그래서 최인기 선생님이나 다른 선생님들 만나면서 전후의 상황들을 계속 정리했고 저희도 기록을 했습니다.
공공건축이나 공공공간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고. 또 자하 하디드에 대한 혐오가 있잖아요. 그 혐오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한 4년 정도 고민했던 것 같아요. 맨 처음에는 그냥 오세훈은 ‘오잔디’ 이렇게 간단하게 혐오하는 프레임으로 가다가, 아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공부도 좀 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리슨투더시티 활동의 공통점은 딱 하난데, 그건 뭐냐면 공통공간에 대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란 것은 공유지이고, 그 다음에 커먼 웰스(Common wealth)이고, 누구에게도 소유될 수 없는 것인데. 누군가가 땅에 깃발을 꽂고 권리나 소유를 주장하잖아요? 그거부터 우선 굉장히 비틀어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시초축적, 맑스 전문가가 여기 계신데(웃음), 그런 시초축적이 맑스같은 경우에는 자본주의 초기의 현상이라고 했지만, 사실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경우에는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현상이라고 했거든요. 저는 거기에 공감을 많이 하고. 데이비드 하비 같은 지리학자들은 신자유주의의 본질로서 자본 축적이라는 게 지리적 문제라는 것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관심있는 것도 어떻게 땅이나 아니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들이 누군가들에게 어떻게 침해당하고 있는지를 공부하고 공유하는 건데요. 저희가 지율 스님과 만나고 2009년부터 내성천에 가기 시작했는데, 지금 여기는 영주댐 현장이에요. 4대강 공사 중에 마지막 현장인데요. 최근에 따끈따끈하게 소송에서 졌어요. 삼성물산, 수자원공사, 그리고 환경영향평가에 참가했던 세 회사를 피고로 해서 소송을 했는데, 소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졌습니다. 하지만 원고의 자격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다 진 것은 아니고요.
사실은 우리가 지금 공부할 때 실존주의는 거의 공부 안 하잖아요. 요즘은 들뢰즈나 맑스나 게오르그 짐멜을 많이 공부하는데, 내성천 때문에 실존주의에 대해서 많이 공부하는 것 같아요. 장소의 상실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장소는 무엇이고 이렇게 깊은 슬픔을 가져오는 결과들의 원인은 무엇인지 굉장히 많이 고민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내성천은 이제 산산조각이 나고, 심지어는 여기 케이블카를 곧 놓으려고 준비 중인데요. 여기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먹황새라는 새가 오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새가 더 이상 여기 살지 못하고 다른 데로 이주했는데요. 이런 상황이라 이 곳에 지율스님이 거주하고 계시고, 저희는 거기에 컨테이너 갤러리를 갖다놓고 4대강이나 내성천에 대한 전시를 계속 하고 있어요. 아직도 하고 있고요.
이 갤러리가 참 사연이 많습니다. 4대강에 대한 얘기하는 것 자체가 금지였던 때가 있었어요. 2009년이나 2010년인데. 4대강 뉴스가 경향이나 한겨레에도 안 나왔어요, 2011년에는 심지어 한겨레에 4대강 사업 국정홍보 전면광고가 한 달 내내 실렸어요.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한겨레 광고하는 아저씨한테 너무 화를 냈거든요.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너희가 진보 언론 맞느냐.” 그랬는데 “어쩔 수 없다”고.(웃음) 그래서 그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었어요. 저런 작은 공간이. 당연히 자본이나 국가한테 돈을 못 받죠, 4대강 얘기니까.
근데 이렇게 제 돈이나 리슨투더시티 돈과 노동력을 착취해서, 스스로 착취해서 피와 땀으로 만든 전시들이었는데, 4대강에 대한 공사비리를 정리하는 작업도 했어요. 그런데 문화관광부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이 작품이 두 번 정도 뜯겼었어요. 그리고 2010년에 4대강사업에 반대하며 문수스님이 소신공양을 하셨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서 티셔츠로 해서 기억을 하게 하는 작업을 했고요. 4대강사업 전후를 보여주는 사진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두리반 뒤에서 저희가 연대할 때도 갤러리를 갖다 놨고요. 그때부터 단편선이나 다른 뮤지션 친구들, 그러니까 자립음악생산조합 친구들이랑 계속 연대하면서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런 관계들이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가 가난하지만 생존할 수 있는 거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두리반 이후 마리에서도 계속 연대했었는데. 마리에서는 진짜 많이 힘들었어요, 심리적으로도. 이따가 더 이야기 나누고요. 새움에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주현우(세미나네트워크 새움)_ 시간이 되게 촉박한 것 같아요. 차라리 제 시간을 떼어서 드리고 싶은데. 저는 좀 짧고 굵게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뭐 상대적으로 아무래도 교육 활동을 중심적으로 하는 공간이다 보니까, 대부분이 세미나 활동에 집중이 돼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 해에 전반기 후반기 해서 두 번, 대략 기간으로 따지면 6개월씩 나눠서 진행 한다 볼 수 있겠죠. 아니면 최소한 4개월씩 묶고, 중간 겨울이나 여름 때에는 특강을 준비한다거나, 이런 방식으로 1년의 세미나 프로그램을 짜고서 진행을 합니다.
세미나 프로그램은 일단 기본적으로 뼈대라고 볼 수 있는 건 두 가지 세미나가 있는데요. 말씀드렸던 자본론 강독 세미나가 하나의 축이고, 다른 한 축은 맑스주의 세미나입니다, 초기부터 시작해서 좀 제 3, 4 인터내셔널까지 나오고, 동남아시아나 여타 지역에 있는 맑스주의까지 살펴보는 세미나입니다, 대부분 세미나 기간이 긴데요. 왜냐하면 자본론 같은 경우는 한 권당 기본적으로 6개월의 시간을 잡습니다. 1~3권을 보게 되면 기본적으로 한 1년 반이 나오게 되는 거죠. 그리고 맑스주의 세미나 역시도 기본적으로 최소 1년, 좀 길었을 때는 풀타임으로 2년 정도 소요됩니다.
사실상 두 기본 토대를 밟게 되면 3년이나 4년, 대학 기간이 나오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저희가 기본적으로 세미나를 할 때 생활하는 분들이 오신다는 걸 전제로 깔고 있어요. 그게 무슨 의미냐면, 밥 먹고 책 읽고 열심히 공부하고 또 밥 먹고 책 읽고 공부하고 이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생활을 해 나가시는 분들이 틈틈이 짬을 내서 자기 스스로 공부를 하고, 힘을 길러내는 과정들을 가져가는 거기 때문에, 진도를 빨리빨리 뺀다 이런 느낌이 아니라, 어느 정도 경험상 축적된, 일주일에 요 정도씩 볼 수 있겠구나를 기반으로 프로그램을 짜다 보니까 그렇게 됩니다.
주된 프로그램이 두 가지가 있다면, 나머지 프로그램은 이 두 프로그램을 어느 정도 진행하신 분들께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제안한 다른 세미나들입니다. 저희 새움의 가장 특징 중에 하나는 운영위원회가 열려있다는 건데요, 새움 회원이든 그냥 세미나 참가하시는 분들이든 간에 운영위원회에 들어오실 수 있으세요. 운영위원이 따로 있지 않아요. 그래서 운영위원회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열려있는 공간에서 상호 제안과 토론을 바탕으로 해서 결정된 사안들을 주체적으로 실천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를 들어 최근에는 환경 주제로 번역을 하시는 분 중에 동남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계셔서, 그 분들 중심으로 관련 주제들을 바탕으로 세미나를 제안하고 개설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움은 그런 결과들을 부수적으로 책으로 만들어내는 과정 역시 꾸준하게 해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맑스주의 역사 강의』(한형식, 2010, 그린비)도 그러하고. 그 외에도 『경제는 왜 위기에 빠지는가』(하야시 나오미치, 유승민 양경욱 역, 2011, 그린비), 또 최근에 나왔던 『현대 인도 저항운동사』(한형식, 이광수, 2013, 그린비)라거나 이런 것들도 대부분 세미나를 통해서 나왔던 주제들을 심화 발전시킨다든가, 세미나에서 나온 주제들을 정리하는 방식을 통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교육활동이라는 게 사실 단순하게 가르치는 한 사람이 있어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새움에서는 간사도 그래서 그런 자격 조건이라는 게 뚜렷하지 않습니다. 바꿔 얘기해서 새움 회원이고, 세미나를 어느 정도 하셨던 분들이라면, 누구든지 제안 사항에 따라서,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토대로 세미나를 열 수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새움이 전제하고 있는 맑스주의라는 걸 벗어나는 데에는, 사실 그렇게 상관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새움이라는 공간 자체가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진보적 지식의 담론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활동들을 자유롭게 좀 전개하는 부분들이 있고요. 그런 식으로 범위를 좀 넓혀서, 활동의 범위들을 나름대로 자생적으로 넓히려는 부분이 있어요.
그리고 조금 다른 부분이라면, 새움이 교육 공간이기도하지만 연구라는 부분도 표방하고 있어서, 새움 자체에서 하는 연구도 있겠지만 기존의 맑스주의나 사회비판적 연구들 혹은 새움에 계셨던 학자 분들이 일종의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새움과 당인리의 사이의 관계는 이런 겁니다. 학자와 전문 연구자라는 분들이 나름대로 연구하시는 내용들이 있으실 텐데 그것들이 얼마나 대중들에게 설득력 있고 또는 대중들이 그걸 어떻게 읽을까, 또는 들을까, 공부할까라는 부분에서, 새움에서 그런 것들을 월례강연으로 설정해서 대중강좌를 열어서 이야기도 들어보고 토론도 해보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저희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활동들인지 간에, 새움은 유정형이면서 무정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기본적인 뼈대는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진보적 지식의 대중화이지만, 그 틀에서 방향이라는 것들은 새움의 회원들이 자생적이고 자발적으로 해나가는 것에 많은 무게를 둡니다. 그래서 사실 어제 새움 프라임이라고, 동북부 지역 대학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학내 학습모임을 꾸려보기 위해 행사를 했고, 해가 뜰 때까지 같이 술을 먹고 지금 여기 와있습니다만, 이런 일들이 총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진행이 된다고 하기 보다는 핵심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회원들 스스로 그 문제의식에 대해 동의한다면 그 나름대로 실천을 통해 자발성에 따른 책임을 뒷받침한다는 방식으로 그동안 여러 가지 활동을 해왔고 지금도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체적인 저희 행사,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요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좌인(공동체은행 빈고)_ 빈고와 빈집 그리고 빈마을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드리도록 할게요. 빈집과 빈마을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살고 있어요. 여기는 진보를 지향하는 사람들도 있고 분홍색깔도 있고 우파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도 뒤섞여 살고 있습니다. 제가 설명하기 앞서 저희는 장기 투숙객, 장투객이라고 저희를 지칭하곤 하는데요. 워낙 빈집은 내가 들어와서 어떻게 살아가고 누구와 관계를 맺고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서 빈집을 풀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게 굉장히 다양하다고 봐요. 그래서 원래 이런 자리에도 한 사람이 나오지 않고 여러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 하거든요. 그래서 지금 제 옆에도 친구들이 나와 있는데, 어떻게 빈집에 들어오게 됐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친구들과 함께 들으면서 더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더(공동체은행 빈고)_ 안녕하세요. 저는 빈고 조합원이자 빈집에서 2년 반 정도 살았었고 지금은 본가에 내려가서 지내고 있는 빈집에서 별명 우더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그냥 호기심에 왔는데 갑자기. (웃음) 당황스럽긴 한데, 제가 빈집에서 살기 시작한 게 이제 거의 3년이 다되어갑니다. 제가 중학교 때 대안 교육을 받아서, 그 이후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서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음악을 어떤 식으로 배워야할까를 고민했는데. 개인적으로 대학이라는 곳은 가고 싶지 않아서 다른 학원들을 많이 알아봤는데 서울에 제가 딱 생각했던 그런 학원이 있는 거에요. 그럼 거기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서울에 이렇게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올라와서 지내는 것에는 큰 부담이 있었어요. 사실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잖아요.
그러다 빈집이라는 곳을 알게 됐어요. 처음에는 굉장히 이상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살고 있는 곳이 있다 해서 한 번 찾아갔죠. 그날이 마침 마을 잔치를 하는 날이었어요. 빈집에 여러 빈집들이 있는데, 그 집들이 다 같이 맛있는 음식 같은 것을 만들어와 가지고 모여서 맛있게 먹는 자리였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갔어요. 그런데 되게 신기했던 게 다들 굉장히 반갑게 환대를 해주고 맛있는 것도 챙겨서 주고 자기소개도 하고 그러는 게 저는 굉장히 좋았어요. 옛날에 중학교 때 느꼈던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이런 것에 추억도 느끼면서 좀 어색하기도 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과거와 같은 무언가가 다시 생겨버렸네 하면서. 제가 학교 다니면서 다시는 공동체 같은 곳에는 살지 말아야겠다, 했었는데 다시 이런 곳에 와서. 운명이었던 걸지도 모르죠. (웃음)
그렇게 와서 지내다보니까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고 해서 사람들이랑 잘 어울려 놀기보단 집-학원-집-학원의 생활을 반복했었어요. 그러다 사람들하고 대화도 좀 하게 되고 집에서의 공간에서 사람들하고 같이 놀 거리가 있으니까, 이 빈집이라는 공간에 대해 조금씩 관심이 가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러다가 빈고라는 곳도 알게 돼서 빈고라는 곳이 대체 뭔가 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가입하면 좋아요’ 하길래 ‘음 그렇구나.’ 가입을 했다가. 조합원 교육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참여를 하다 보니까 어떤 활동인지 알게 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오디(공동체은행 빈고)_ 네 저는 빈집에 살고 있는 오디라고 하구요. 오기 전에 공중캠프가 뭐하는 데냐고 친구들이 물어보는 거에요. “어, 좌인이 하는 건데 나는 그냥 가는 거야” 하니까 한 친구가 “어, 나도 그렇게 따라갔다가 가서 발표했다”고. (웃음)
그게 그렇게 되네요. 저는 그냥 인터넷으로 찾아보다가 우연히 빈집을 알게 됐구요. 그냥 알고만 있다가 살 곳이 필요해져서 찾아오게 된 게 빈집이고, 지내다보니까 재밌는 사람들도 많고 재밌는 활동들도 많아서 그렇게 지내게 된 것 같아요.
좌인(공동체은행 빈고)_ 네, 저희 구구절절 저희 좀 더 설명드리면, 어쨌든 이 질문에 대한 힌트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던 와중에 빈집이라는 곳을 알게 됐고 요즘 사회적 경제라는 말이 많이 들리잖아요. 그 관련된 일을 했는데 내 삶은 전혀 사회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고 내 삶과 노동이 또 분리되게 돼버리는 현상에 대해서 좀 괴리감을 느끼게 될 즈음, 빈집에 들어와서 살게 됐어요. 지금은 빈집 장투객 3년 차구요. 그래서 여기서 내가 하는 노동이라는 것과 내 일상이라고 하는 것을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내가 지향하는 것, 살고자 하는 방식이 그냥 그게 내 삶이 됐을 때 어떻게 내가 먹고 자고 아플 때 치료받고 이런 것들을 같이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를 같이 고민하면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빈집은 저희가 들어와서 어떤 비용을 지불한다는 점에 있어서 서비스를 이용하는 게스트하우스와도 비슷하지만요, 더 깊은 일상을 나눈다는 점에서 공동체를 지향하면서도 그리고 규정된 가치나 지향점을 강요한다거나 그런 깃발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이지 않은 곳이기도 합니다. 굉장히 희한한 곳이고요. 저희는 저희 스스로 정글 속에서 살고 있다, 누구는 저희를 기사로 쓸 때 굉장히 민주적이고 아름다운 공동체라고 쓰세요. 그런데 저희는 “이거 다 거짓말이다,” “살아보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말하죠. 저희가 며칠 전에도 회의하다가 싸움이 크게 나서 한 친구는 울고 또 사과하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정글 같은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가 뭐 같이 지향하는 것들이 없다고도 할 수 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데요. 세 가지, ‘공유’, ‘자치’, ‘환대’를 실천한다는 점은 저희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입니다. 아까 우더가 환대를 받았다는 데, 우더가 좀 잘생겨서 환대를 받았나봐요. 저는 처음에 갔을 때 전혀 환대받지 못했거든요. (웃음) 주인이 따로 있지 않고, 그리고 손님이 따로 있지 않아서, 누구나 주인이고 누구나 손님이기에, 공동체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을 때, 환대해야하는 것 그리고 공간이 됐든 자본이 됐든 그런 것들을 함께 공유하려는 것을 같이 실행하는 것, 그리고 여긴 누가 케어해준다는 게 따로 없거든요. 활동가도 따로 없어요. 빈고는 오디랑 저랑 몇몇 활동가들이 역할을 하고 있지만, 빈집 같은 경우는 활동가들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공간을 유지하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나가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자치’라고 하는 부분들도 굉장히 중요하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제 해석인 거구요. 아마 빈집에 사는 친구들에게 저 세 가지 가치지향은 저마다 생각이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지금 굉장히 편협한 빈집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다는 걸 꼭 유념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네, 저희 빈집 같은 경우에는 지금 현재는 여덟 개에서 열 개 정도의 집들이 만들어져서 함께 살고 있구요. 지금 7년 차인데, 이제까지 만들어진 집 개수는 한 스무 개 정도가 넘는 것 같아요. 만들어지고 없어지고를 계속 반복하고 있고요. 각 집 별로 다 이름들이 있어서, 각자 살고 싶은 대로 운영하고 싶은 대로 만들어서 살고 있는 곳입니다. 지금 사람들도 워낙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금 40~50명 정도로 수치가 왔다갔다 하구요. 저희 집도 워낙 단투객들이 많아서 일곱 명이 됐다 여덟 명이 됐다 어떤 날은 장투객들이 애인집에 가서 자는 바람에 세 명이 됐다 뭐 이렇게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기본적으로 게스츠 하우스(Guests’ House)를 지향해요. 아까 말한대로 누구나 손님이고 누구나 주인일 수 있는, 그 게스트 하우스(Guest House)는 주인이 따로 있잖아요. 그래서 자기가 비용을 지불한 만큼 서비스를 받는 게 당연한 구조인 건데 그런 것들을 없애고자 하는 장치가 곳곳에 있습니다. 초기에 세 명의 친구들이 전셋집 1억 2천만원짜리로 시작을 했어요. 보통 여러분들 같이 어떻게 사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자취를 할 때 친구가 보증금을 냈고, 친구가 다 자기의 물건을 채워놓은 상태에서 저는 얹혀살았어요. 지금 용어도 제가 ‘얹혀살았다’고 이야기 했죠. 그랬기 때문에 제가 월세를 좀 더 낸다거나 똑같이 월세를 분담해도 내 집 같지 않았어요. 이게 알게 모르게 저희가 자본에 대한 부분들을 인정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빈집을 시작한 친구들은 내가 돈이 좀 있어서 보증금을 넣기는 했지만 이 자본이라는 것은 내가 운이 좋아서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은 개인의 노력과 개인의 실력으로 쟁취된 거라고 해석하지만, 결국 이 사람이 자본을 갖게 된 데에는 수많은 행운들에 의해서 가지고 있는 건데. 이 돈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돈으로 또 돈을 벌게 되는 구조가 과연 당연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었어요. 그래서 자금을 어떻게 댔는지 상관없이 모두 n분의 1로 분담금이라고 하는 것들을 내고 살기 시작했어요. 분담금 안에는 월세, 전기세, 수도세, 그리고 ‘적게 벌고 적게 쓴다’를 지향해 한 달 식비까지 다 포함해 당시 6만원에서 한 10만원 사이의 돈을 내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늘 들어올 수 있게 전셋집에서 월세집으로 전환을 했고. 왜냐하면 저희 자본으로 전셋집을 구하면, 집의 개수를 늘리는 데에 한계가 있어요, 그리고 지금 해방촌이 경리단길과 결합돼서 핫플레이스가 되고 있는 바람에 월세 값이 너무 올라서, 살고 있는 저희는 정말 하루에도 몇 번씩 욕이 나오는데. 지금은 분담금이 한 22만원 정도 됩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처음처럼 보증금을 낸 것에 대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싸움이 일어난다거나 보증금을 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서 보증금을 빼야 되는 경우에 돈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거에요. 어떻게 보면 권력관계가 생기기도 하고 그 집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만들어진 게 ‘우주살림협동조합 빈고’에요. 각 집의 보증금을 중앙의 금고로 모으고, 그 금고에서 각 집의 보증금을 대출해주는 방식. 그래서 초기에 그 집의 보증금을 같이 책임을 못 졌던 사람들도 나중에 빈집에 들어왔을 때 당당하게 보증금에 책임을 지겠다고 하면 금고에다가 돈을 출자할 수 있게끔 하는 구조를 만들었고요. 이게 조금 발전을 해서 지금 현재 ‘공동체은행 빈고’라고 하는 것들이 만들어지게 됐습니다.
사실 빈집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용어 규정도 저희 안에서는 ‘뭐를 빈집으로 할 수 있느냐’ 의견이 분분해요. 그래서 빈마을이라고 부르는데요. 이렇게 살다보니 이제 빈고가 빈집 말고도 청주, 대구, 부산, 부천, 이런 여러 지역들의 공동체들과 연대하면서 더 큰 구조의 은행을 지향하게 됐어요. 기존의 은행들을 당연하게 이용하시죠? 돈 맡기시잖아요.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 지는 사실 모르시죠? 그 은행에 돈을 맡기는데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맡기는데, 거기는 기업이잖아요. 은행은 국가가 만든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당연하게 그 돈을 맡기고. 당연하게 맡겨진 돈으로 은행들은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곳들에 돈을 굴리고 있고, 거기에서 벌어들인 잉여금을 돈을 낸 사람 또는 돈을 이용한 사람에게 적절하게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콩고물만 떨어뜨리고 다 은행에서 자본을 잠식하게 되죠. 남이 맡긴 돈으로.
이 구조를 당연하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게 빈고구요.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자본 규모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들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빈고는 우리가 돈을 맡기고 돈을 이용하는 것도 신용등급이라는 것들로 지금은 결정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금고가 이 지갑이 나의 지갑이고 우리의 지갑이라는 게 인정하고, 개인의 신용등급이라는 것과 상관없이 적절하게 이용하고 다시 그걸 반환 할 수 있는 자치성을 가지려 해요. 그럴 때 우리는 건전하게 돈을 만들어내고 돈을 굴릴 수 있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지. 그리고 ‘돈을 코뮨이나 공유지로 확대하는 것에 써야한다’는 지향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1년을 굴리면 잉여금이 1000만원에서 1500만원 정도가 나옵니다. “어쨌든 자본으로 자본을 버는 구조가 아니냐?”라고 의문을 던지실 수 있는데요. 그 돈을 어떻게 같이 나눠 갖느냐라는 부분이 원래의 은행에 반하는 운동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닫힌 공동체에 대한 염려를 많이 갖고 있어요. 우리가 잘 살게 된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돈을 낸 사람뿐만 아니라 돈을 이용한 사람, 저희와 힘을 실어주고 있는 외부 사람들, 우리가 같이 살고 있는 지구인 모두. 지구 생명체라고 저희는 표현하는데요.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서 저희는 잉여금을 돈을 낸 사람과 돈을 이용한 사람과 동의하에 외부에 지구분담금이라는 이름으로 항상 돈을 외부로 돌리는 일을 또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게 저희 빈고입니다.
사회자_ 저희가 사전모임을 다녀왔는데,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두들 달변가이셔서 시간을 꼼꼼하게 체크했습니다. 다들 잘 지켜주셔서 감사하구요. 공통 주제를 질문하려고 합니다. 저희가 세 단위를 이 자리에 모신 것은, 누구보다 앞서 2000년대 초중반부터 각자 지형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운동들을 지속해왔기 때문인데요. 활동을 지속해올 수 있었던 동력과 힘들었던 지점은 없었는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리슨투더시티부터 각 단위별로 3분씩 짧게 답변을 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박은선(리슨투더시티)_ 힘든 게 너무 많아가지고. 3분으로는 안돼요. 30분주시면 눈물로 하소연할게요. 저희는 동력이라는 거는 없고, 동력이랄 게 있다면. 사실 내부에서도 있겠지만 외부에서 오는 것도 사실 크죠. 사회 전반의 비상식의 강도가 점점 커지니까 그것에 어떻게 대비를 하고 우리들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진단하는 것들이 필요했던 건데요. 저희는 어떤 뜻에서 공공의 위기를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내성천만 해도 지금은 다 망가졌는데 망가진 것들을 보고 있으면 사실 굉장히 힘들어요. 애정 있던 공간들이 만약에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장면들을 보면 굉장히 힘들죠. 그리고 두리반에서 승리했던 경험은 우리 집이 승리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때는 기쁜 경험이었고 그때 만났던 친구들과 아직도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하고 있어요. 그 때의 여러 가지 관계들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들이 사실은 되게 뜻 깊죠.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하나의 동력이라고 볼 수 있구요.
힘들었던 지점은 마리 때처럼 용역깡패랑 싸워서 맞으면 당연히 아프니까 힘들고요. 강 같은 경우에는 공간이 무너지는 거 자체가 너무 힘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한두명 정도 조력자가 나타나는 것들도 되게 신기한 거 같아요. 하여튼 힘들어요. 계속 힘들고 돈 같은 것도 저희가 안 벌고 안 쓰고 하면서 운동을 하는데 이따가 그런 얘기를 좀 더 해보면 좋을 거 같아요.
주현우(세미나네트워크 새움)_ 3분 발표 시간 지키기가 제일 힘들구요. (웃음) 사실 비슷할 거 같아요. 그러니까 자금, 그리고 사람. 어쨌든 제일 힘든 건 사람이죠. 원동력도 사람이고 힘든 것도 사람이죠. 어쩔 수 없이 이런 활동들이라는 게.
제가 새움을 알게 된 게 2008년이에요. 6년쯤 전인데 그 당시에 새움이 관악과 성북 쪽에 분관을 냈어요. 마침 제가 다니는 학교가 성북 쪽에 있어서 거기서 알게 됐어요. 군대 다녀오고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됐는데, 사실은 제가 군대 가고 나서 그 분관은 망했어요. 대부분 그렇듯이 유지되는 거 그 자체가 쉽지가 않은 거죠.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고 월세를 꼬박꼬박 낸다는 게 어렵죠. 특히나 새움 같은 경우에는 강의비가 없고, 세미나 참여할 때 참가비도 없기 때문에 더 그렇죠, 그건 저희의 가장 큰 성격 중의 하나인데, 돈이라는 장벽이 생기게 되면 기본적으로 사람들 간의 나름대로 위계라는 게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새움에 후원을 해주시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게 아닌 방식의 참가비를 걷는다고 했을 때는 그 자체만으로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요. 또 문제는 이 원칙이라는 게 한편 힘이 들 때가 있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빚을 항상 상시적으로 갖고 있거든요. 이제 10년쯤 되니까 빚에 대해서 생각이 없어요. 빚을 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A가 빚을 냈는데 파산할 거 같으면 “이제 B는 누가 할꺼냐” 이런 방식의 그런 게 있어서. (웃음) 하지만 한편으로 원동력이 사람이라고 말씀드린 게 그 당시 세웠던 성북 새움 분관은 없어졌지만 그 곳을 통해 만났던 두 사람이 지금 가장 핵심적으로 새움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 중에 한 명이 저고, 또 다른 친구도 간사랑 여러 가지 역할들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들이 있지만 가끔씩 좋은 부분도 있어서. 그래서 활동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좌인(공동체은행 빈고)_ 빈고 이용하시라고 하려고 했더니 반환이 안 될 거 같네요. (웃음) 활동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었느냐, 저는 사실 백수가 돼서 활동을 하지. 2년 동안 계속 빈고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백수가 돼서 산지는 사실 몇 개월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 얘기를 들을 건 딱히 없을 거 같은데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 관점이 있을 거 같아요. ‘빈집 그리고 빈고 자체가 어떻게 활동을 지속하게 됐느냐’와 ‘빈집을 기반으로 두리반이라던지 외부에서 투쟁이라는 것들을 지속하는 친구들이 어떻게 그걸 지속할 수 있게 됐느냐.’
초기에 빈집을 만들었던 친구들, 지금은 팔당이나 두물머리 투쟁을 하다가 아예 거기 농사를 짓고 살면서 다양한 활동을 연장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우리가 활동이 흔들리게 되는 배경이 생계의 문제인데 빈집에서는 그게 일단은 해결이 돼요. 그래서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 마음껏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은 한 사람이 부담하기에는 조금은 버거울 수 있는 22만원이지만, 초기 빈집에서는 6만원으로 한 달동안 먹고 자고 생활했어요. 그러니 자기가 하고 싶은 활동들을 더 힘 있게 할 수 있는 동력이 됐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빈마을 차원에서는 치열합니다. 저희가 자치가 되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런 빈마을의 활동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이 공간을 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나가는 작업들이 중요합니다. ‘분담금을 내는 것으로 나의 책임을 다했다’ 또는 ‘내가 청소를 하는 것으로 역할을 다 했다’라고 생각할 경우에는 빈마을이 확장되거나 더 즐겁게 유지되는 것들은 불가능하거든요. 그렇게 서비스처럼 이용하는 것에 우리 모두 익숙해진 거 같아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자발적으로 활동을 하고 하나의 자립적인 주인이 될 수 있게끔 하냐는 것은 늘 조금 더 살았던 사람들, 혹은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빈집이 마치 자기 집이 된 사람들이 겪는 가장 큰 고민인 거 같고요. 그게 가장 힘든 점입니다.
사회자_ 저희가 사전인터뷰를 다니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이 자리에서 더 나누고 싶다는 얘기들이 있었는데요. 잠깐 개별질문을 드리자면, 리슨투더시티 같은 경우에 저희가 인터뷰를 갔을 때 운동 단위가 국가나 자본의 지원을 받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얘기를 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박은선(리슨투더시티)_ 저희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정규교육을 받은 평범한 미술가라고 볼 수 있는데요. 그런 관계들을 끊고서 어떻게 미술작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예술가든 활동가든, ‘조직, 기관이라는 것, 기업이라는 것에서부터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고 얼마나 거리를 둘 것인가’하는 기술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만약 내성천 운동이라고 하면은,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운동이 뭔지 다시 한 번 당연히 생각을 해봐야하고, 가장 중요한 것들은 운영하는데 돈을 얼마나 어디서 끌어올건 지에 대해서는 더 치열한 고민이 필요해요. 저도 아직 한지 5년 밖에 안됐지만, 내성천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 환경운동이 망할 수밖에 없구나. 아니면 시민운동 진영이 왜 망했는지를 알겠는 거죠.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미술기관들이 우후죽순 들어서다가 이제는 다 없어졌어요. 뿌리를 썩게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거죠. 거름이 지나치면 뿌리가 썩잖아요.
지금도 박원순 시장이 대통령이 되기를 다들 바라는데. 그러면은 분명 시민사회에서 그 사람을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콩고물을 기대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형님 아우 하면서 나눠준다는 거죠. 좌파건 우파건 나눠주기가 고질적인 문제라고 봐요. 나눠주다 보면 결국 정권을 잡으려 했던 목적을 상실한 상태가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지금 시민운동 진영이 진짜 바닥을 쳤다고 봐요.
지금 이 행사도 서울시NPO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았는데 저는 이것도 굉장히 위험하다고 봐요. 일본의 경우에도 NPO들이 다 망했어요. 왜냐면 우파 시장들이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없애는 것이 NPO 지원금이거든요. 지원이 없으면 어떻게 할 건지 생각을 해야 하고, 운동이 돈이 없어서 못하면 안하면 돼요. 그걸 왜 해요?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활동가를 못 둔다고 하면 안 두면 되잖아요. 근데 사람들이 꼭 활동가를 둬서 월급을 줘가지고 힘들게 하다보니까 어떻게든 기업 돈도 받아야하고 정부 돈도 받아야하고 삼성 돈도 받아야 되고. 영주댐 같은 경우에도 삼성물산의 현장인데 삼성에서 후원받는 분들이 와가지고 반대 운동을 하세요. 그러면 당연히 저희가 경계를 할 수 밖에 없죠. 이런 것들이 운동에 있어 분명히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사회자_ 새움한테도 개별적으로 질문 드리고 싶은데요. 새움이 강조하는 자율성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고, 또 지난 인터뷰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이, 새움의 경우 활동이 저조하고 더 침체됐을 때 외연을 확장해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는 노력을 했었다는 점인데요. 그 두 가지에 관해 좀 더 이야기 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주현우(세미나네트워크 새움)_ 말씀해주셨다시피 이미 사전 인터뷰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굉장히 긴 시간을 통해 열심히 했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이 자발성에 관한 거였죠? 저희는 계속 자발성을 강조하는데요. 저희가 생각하는 자발성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에요. 한쪽의 면이 자발성이라고 한다면 그 다른 뒷면에는 책임이 있어요. 책임을 따를 때 자발성이라는 동전을 세워지는 것이죠. 결국 저희가 말하는 자발성은 ‘책임이 뒷받침 된 자발성’이고 바꿔 얘기하면 자기 스스로 하겠다는 생각이 명확해지는 게 중요합니다. 모두에게 그것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기 보다는 그 지점에서 출발해야 장기적으로 소위 말하는 자기-운동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부분에서 저희가 항상 주요 뼈대라고 하는 자본론 세미나와 맑스주의 세미나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세미나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과정이 아니거든요. 세미나를 하는 과정 속에서 비판하고 토론하면서 ‘아 그러면 지금 사회에서 우리 삶은 또 어떤 식으로 이어나가야하느냐’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던지게 되고, ‘그럼 내가 이런 방식으로 활로를 찾아보겠다’라는 활동들이 새로운 의미의 세미나로 도출이 되고, 그 활동이 지속이 되는 과정들을 사실 일구어 나가야 하거든요. 항상 이번이 100이었으니까 내년에 150을 바라는 게 아니라 100이 유지가 안 되더라도 50이나 40으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차후에 100이나 150을 하려는 사람이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길게 보고 가자는 게 저희 기본적인 고집이어서요.
그래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면, 다른 게 아니라 저희는 항상 ‘내년은 올해보다 나쁠 거다’ 또는 ‘나을 거다’라는 생각을 잘 하지 않아요. 상대적으로 ‘더 좋을 거다’ 혹은 ‘나쁠 거다’라는 생각보다는 우리가 이걸 지금 왜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한편으로는 무리하지 않아요. 대단하게 확장을 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는 범주에서 확장을 하는 거죠. 바꿔 얘기해서 확장을 했는데 실질적으로 버티기 어렵고 지속적으로 마이너스라는 판단이 들면 바로 운영위원회에서 문제 제기가 되고, 거기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고 수정이 이뤄지는 방식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운동이라는 성격상 대중과 만나는 접접을 줄이는 방식으로 활동을 축소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설사 축소하더라도 대중적인 만남, 강의들은 계속 유지시키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가져가야한다는 게 판단의 지점입니다.
성북 새움과 관악 새움을 만들던 당시도 그런 문제의식이었데요.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나빠졌다면 더 나빠질 수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문 딱 걸어 잠그고 잘되는 곳 마포구만 집중해서 이 공간만 잘 살리자가 아니라 이 공간은 이 공간 나름대로 하되 우리 나름대로 역량을 타진해서 지금 사람들을 좀 더 만날 수 있는 창구들을 열어보자. 그리고 거기서 안 된다면 그 다음에 수순을 생각해보자 라는 식으로 출발 했던 거고. 어떻게 보면 그 당시에 결정을 했었던 한형식 선생님은 나중에 성북 새움 출신의 두 사람이 끈질기게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까, ‘봐라 내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그렇지’라는 얘기도 농담으로 하세요.
하여튼 저희는 그런 식으로 수세의 국면에서는 어떻게 후퇴할까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후퇴하는 방식이 무조건 빨리 짐 싸서 나가는 후퇴가 아니라 그럼에도 어떻게 치고 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나가는 게 맞는 거죠. 퇴로를 만든다는 얘기를 하잖아요. 이길 수 있는 퇴로를 만들어야 하는 거지. 잘 도망치는 퇴로를 만드는 건 중요한 게 아니죠.
그래서 다시 자발성이라는 내용이 중요해집니다. 운동에서 판단하는 주체들이 이런 상황을 정말 자기 문제로 생각하고 자기 운동으로 생각하면, 결합과 토론와 합의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뤄질 수 있거든요. “앗 이건 좋습니다.” “이건 아닌거 같아요.” 바로바로 얘기가 나오고 그걸 바탕으로 책임을 지는 활동들이 나오는 거죠. 그래서 저희는 운동에 있어 장기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사회자_ 비슷한 차원에서 빈고에게도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오늘 규칙을 만들면 내일 구성원이 바뀐다”라고 할 정도로 빈마을은 구성원들이 굉장히 유동적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빈집-빈마을-빈고로 계속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던 과정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좌인(공동체은행 빈고)_ 일단 제가 빈집과 빈고를 붙였다 떨어뜨렸다 이렇게 얘기를 해서 헷갈리실 거 같아 분리해서 설명을 드리자면. 빈고는 빈집보다는 조금 더 규칙이 있습니다. 최소한의 규정들을 나름 협의하면서 만들어가고 있고요. 왜냐면 돈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굴리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이 더 바람직한 것들인지, 이 돈을 쓰려고 하는 것들이 공동체가 확장되고 유지되고 더 활발해지는데 도움이 되는지, 그런 큰 지향만 있어요. 여기서 공동체라고 하는 것도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열린 곳이냐 닫힌 곳이냐’라는 최소한의 규정으로 모든 것들을 보고 있구요.
빈집 같은 경우에는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여기서 이 친구들과 규칙을 정하지만 이 중 누군가는 내일 나갈 수도 있고, 한 달 만에 나갈 수도 있어요. 구성원들이 바뀌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규칙이라는 게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도리어 규칙에 구애를 안 받으려고 하는 게 있구요. 그런데도 계속 환대가 가능한 것, 권력관계를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들이나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점들이 어떻게 지속되는지를 가만히 보면, 결국 삶에서 배우게 되는 거 같아요. 저는 빈집에 살면서 제 감각이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적으로 길들여져 있구나 라는 것들을 문득문득 느끼거든요. 지금 이 발표 오는 것도 제가 ‘아차 실수했구나’라는 걸 오면서 생각했는데, 왜냐면 사전에 이 이야기들을 전체에게 공유를 하고, 이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여기 와서 함께 이야기할 사람은 누구인지를 결정하고 왔었어야했는데 어떻게 보면 제가 정보를 독점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처럼 제 스스로 감각이 자본주의적이구나 라는 걸 살면서 자주 느껴요,
예를 들어, 식비 같은 경우 모두가 내는데 모두가 그 돈을 써서 밥을 해먹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것들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보면 우리의 가치들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다 드러나게 되거든요. 그동안 빈집에서 앞서 생활에 대한 선택들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내 감각이 조금 잘못 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러면서, 그게 굳이 규칙으로 만들어지지 않아도 그게 삶으로 녹여진 사람들을 보며 알게 모르게 저에게 이식되는 것들이 있는 거 같아요. 또 예를 들면 저희는 언니 오빠 형이라 부르지 않고 닉네임을 부르는데 그것이 가지고 있는 관계에 있어 권력을 없애고 평등함을 만드는 큰 장치가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옆에 있는 오디가 몇 살인지 아직까지 몰라요. 그리고 우더도 저보다 훨씬 어리거든요. 열 살 차이 나는 친구들도 있고 한데, 지내다보면 그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 적다하는 걸 전혀 감지하지 못해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특성이나 그 사람의 품성에 따라 관계 맺기를 하거든요.
질문에 에둘러서 멀리 온 것 같기는 한데 저희가 규칙이 특별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에 지향했던 바가 삶에 녹아져 있어서, 그것이 주장되거나 설득되지 않아도 동의가 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라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 것처럼 규칙이라 할 필요 없이 “이렇게 사는 게 어때”하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그간 삶으로 켜켜이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까지 7년 동안 유지되고 이어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회자_ 다시 공통 질문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자주 자유인문캠프를 통해 여러 청년 단위들 만나면 청년 시기 이후(혹은 대학 졸업 이후) 어떻게 지속시켜야할 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듣게 됩니다. 저희 스스로도 그런 고민들을 하는 친구들이 있구요.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데요. 여기 계신 세 단위들도 말씀을 들어보면 젊은 주체들을 많이 만나는 걸로 아는데요. 여러분들께서는 각자 활동하는 영역에서 청년 운동 지형을 어떤지 평가하고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좌인(공동체은행 빈고)_ 사실 저는 이 질문에 답변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청년운동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사실 모르구요. 아까 데이비드 하비, 맑스 막 나오는데, 아 씨 저는 고졸이거든요. (웃음) 그래서 그런 걸 전혀 몰라요. 그냥 저는 같이 사는 친구들 중에 여러 가지 투쟁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