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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앙드레 고르쓰, <건강과 사회>

  • 지음
  • 작성일시 : 2015-03-30 19:38
  • 조회 : 4,408

“불건강한” 사회 관계의 폐기는, 이 사회의 틀 속에서라도 이미 개인과 집단의 주권, 우리의 환경과 생활방식의 건강성, 그리고 우애와 상호협조에 기초를 둔 인간관계에 대한 욕망을 이미 자기자신의 기본적인 행동규칙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다."

관계와 사회와 환경이 건강하지 않다면 어느 누가 홀로 건강할 수 있을까요? 

빈고 건강보험계가 우리 스스로의 건강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모임이 되길 바라면서, 꼭 읽어보시길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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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7권에 있는 글입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지금은 거의 구할 수가 없더군요.

허락없이 전문을 타이핑해서 올립니다만... 녹색평론에서 좋아해주실거라 믿습니다.  ^^

(강조는 제가 했습니다. 오타 지적해 주시면 수정할게요. ^^)

 

앙드레 고르쓰, <건강과 사회>, <<녹색평론 7권>>
 


흔한 병에 대해서 전문적인 의학적 진단과 치료를 하는 것이 열중 아홉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한 병의 증상은 분명하고, 치료법도 잘 알려져 있으며 값도 싸다. 그래서 의료전문가들이 병의 치유를 촉진하기는 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맨발의 의사”를 훈련하는 데 3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데, 이들은 공장이나 농장의 노동자로서 일을 계속하면서 일반적인 병에 대한 처치를 하고 약을 나누어주며(그들은 약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나, 함께 사용하면 안되는 약 등을 잘 알고 있다) 어떤 경우에 전문가가 필요한지를 판단한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아주 정확하게 해내기 때문에 현지에 가 본 서양의사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반 일리치가 인용하고 있는 캐나다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치료에 필요한 의료비가 아주 싸기 때문에 현재 인도의 건강지출이 균등하게 분매된다면 인도사람들 모두가 혜택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세계보건기구의 책임자에 따르면, 피부병의 진단과 처치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1주일만에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살바도르 아옌데(그도 의사였다)도 들어 있던 칠레의 의료위원회에 따르면, 질병에 대하여 현저한 치료효과가 있는 약은 겨우 20~30가지 뿐이며 따라서 약전(藥典)은 쉽사리 축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약의 반 이상이 사용법을 첨부해서 자유롭게 팔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난 20년간 모든 산업국가에서 의료장비와 “건강”관계 지출이 엄청나게, 국민생산 속도보다 두세배 정도나 증가하였다.
조제약의 소비는 더욱 빠르게 성장하였다. 프랑스에서 개인당 약품 구매량은 13년간에(1959-1972) 2.7배로 늘어났다.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어른들의 반 이상, 그리고 모든 아이들의 3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이 매일같이 어떤 약인가를 먹는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향정신성 약품(안정제, 수면제 등)에 대한 처방이 그 나라들의 주민수만큼이나 많이 내려지고 있다. 미국의 제약산업은 연간 1인당 18회분의 암페타민과 50회분의 바르비투르산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약품과 의료전문가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삶의 개선이나 생명의 연장에 있어서 그것들은 별로 효과가 없다. 도리어 그 반대여서, 프랑스에서 60세 이상인 사람들의 평균 예상여명은 1900년대보다 겨우 2년 높아졌을 뿐이다. 프랑스 사람 일반의 경우에는 평균 예상여명이 1965년 이후로 변하지 않았다. 지난 약 10년간 모든 산업국가의 40대, 50대 남자의 사망률은 높아졌다. 15세에서 20세 사이의 젊은 사람들의 사망률은 프랑스에서 해마다 2퍼센트씩 오르고 있다. 영국의 50세 이상의 노동자들의 사망률은 1930년대보다 지금 더 높다. 사망률이 반드시 일반적인 건강에 대한 좋은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J.N.모리스는 사망률로 미루어 그 자신이 염려했던 것보다 일반적인 건강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20년동안에 55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자들에게서 만성병의 현저한 증가가 있었고, 60대에 들어서는 남자들에게서는 그 증가율이 약 30퍼센트 정도나 높아졌다. 영국 국립보건원은 1970년의 보고서에서 6년동안(1963-1969) 영국인들이 질병으로 인해 잃어버린 날짜들이 20퍼센트 증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크게 늘어난 것은 심장 혈관계 질병과 류머치스, 그리고 기관지염과 폐결핵을 뺀 호흡기 질병이었다.
이러한 통계는 “아픈 사람이 더 많아졌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살기 때문이다”라는 흔히 듣는 말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통계는 또한 건강관계 소비를 더 늘이면 일반적인 건강을 개선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믿음에 명백하게 반하고 있다. 진실은 훨씬 단순하다. 사람들이 약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그들이 더 병들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의료소비의 빠른 증가는 질병의 증가를 전혀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의료는 그 자신이 추구한다고 하는 목표에 별로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료의 발달은 이제 아무런 혜택도 가져오지 않고, 실제로 의료에 의한 치유보다는 손상이 더 많은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생활방식과 환경이 점점 더 질병 발생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퇴행성 질병들은, 그 이전의 감염성 질병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문명병이다. 윌켄스타인은 질병이 발생한 신체부위에 따라 병명을 부를 것이 아니라 병의 원인에 따라 병명을 붙이고 분류해야 된다고 말한다. 예컨대 풍요의 질병(과식, 오래 앉아있는 것, 담배 등에 기인하는), 속도의 빌병, 현대적 편의에 의한 병(운동과 자연식품의 결핍에 기인하는), 오염에 의한 병 등으로.
최근의 연구들은 심장혈관계 질환, 고혈압 그리고 특히 콜레스테롤 과다증은 이른바 원시인들에게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직 우리 문명에서만 그런 질병이 나이든 사람들을 괴롭힌다.
더욱이, 남자들에게 열 번째로 흔한 병인 대장 및 직장암은 아프리카의 농업지역보다 산업국가들에게서 열배나 더 흔하다. 그것은 섬유질이 부족한 식품이 심각하게 느린 속도로 장을 통과함으로써 조장되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 암연구센터의 히긴슨박사는 모든 암의 80퍼센트가 생활방식과 산업사회의 환경에서 기인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예를 들어 위암은 석탄연기로 인한 공기오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관지 및 폐암은 담배연기의 흡입과 관련이 있다. 영국의 암전문가이며 방영학자인 R.돌에 따르면, “많은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대부분의 암은 환경에 의해 생겨난다고 믿게 되었다. 특히 암의 발생빈도가 나라에 따라서 크게 다르고, 그 차이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주하는 집단에게서 재확인된다는 사실로 보아 그러하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대부분의 암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다른 통계는 폐암과 만성기관지염에 의한 사망률이 시골보다 도시에서 두배 이상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어와 새스킨은 공기오염을 반으로 낮추는 것만으로 폐암에 의한 사망 25퍼센트, 기관지염에 의한 사망 50퍼센트, 심장혈관질환에 의한 사망 20퍼센트 등을 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라이 긴즈버그는 “섬유질이 풍부한 다양한 식사가 어떤 새로운 의학발달보다도 사람들의 건강에 더 크게 기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들이 여전히 무시되고 있거나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의료, 의사들, 보건정책, 그리고 대중이 질병을 막는 것보다 환자를 보살피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건강한 사람의 건강은 너무나도 가치가 없어져 버린 것 같다. 기업과 공공기관 국민들 자신이 건강훼손을 어리석게도 거의 하나의 제도적 정책으로 자행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극소수의 환자를 “구제”하거나 혹은 크고 대단히 값비싼 선진 의료설비를 가지고 훼손된 건강을 “수리하는” 경우가 될 때, 그 때는 “생명값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 의료의 혜택은 줄어들고 있는 동안에도 의료비용(특히 병원비)는 성큼성큼 늘어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의료가 가장 효과적인 조치(그것은 예방이다)를 무시하고, 효과가 의심스럽고, 그 비용은 너무 높아서 대부분의 사람이 이용할 수 없는 과시적 의료기술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느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예를 들어, 장기이식 기술을 보자. 과학적 반향은 어떻든간에, 장기이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할 장기가 결코 충분히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생명을-그리고 고통을- 연장할 가능성이 있는 죽어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제공할 생명유지장치가 충분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심장발작 환자들을 구하기 위해 마련된 중환자실을 보라. 그것은 바로 선진 의료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유지 서비스가 그러하듯이, 이곳에는 일반 병실보다 세배나 더 많은 장비와 다섯배나 되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비용을 고려함이 없이 수백개나 되는 중환자실을 만들 필요가 있는가? 게다가 지방사람들도 이것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헬리콥터 수송망까지?
플라트 경이 이끄는 영국의 한 조사위원회가 이 문제를 연구했는데 그 결론은 가정에서의 간호에 비해 중환자실이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위원회는 말하기를 “절반 이상의 사망이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발생하며, 대부분의 시간 손실은 의사를 부르기 전에 생겨난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심장발작환자의 50퍼센트는 의학처치가 가능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위해서 우리는 예방에 기대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의 예방은 아무런 호소력이 없다. 장 피에르 듀피가 잘 예시했듯이, 새로운 초현대식 병원을 짓는 것은 정치적으로 수지가 맞는 일이지만, 환자수가 반으로 줄었다고 해서 한 정치가가 감사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예방수단 덕분에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통계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통계상의 사람들”이다. 그들 자신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혜택을 입은 보호수단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누구 덕분에 일년 내내 병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에게 투표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그에 비해서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는 구체적인 사람이고 그 사람과 그의 가족들은 그 병원을 세운 정치인이 “이 새 병원을 세운 것은 본인입니다. 본인에게 투표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그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예방보다 처치가 더 수지 맞는다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질병은 고용기회를 만들어내고 따라서 “부”를 만들어 냄으로써 가장 수익성 높은 기업을 돌아가게 만든다. 환자의 수와 “건강”산업의 동시적인 증가는 국가 대차계정에서 플러스 쪽에 표시되지만, 환자가 없어져서 이러한 산업이 사라지면 그것은 GNP의 감소로 번역되고 자본주의에 타격이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질병은 수익성이 높고, 건강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모든 양식(良識)과 페어플레이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의료가 계속해서 발달하는 까닭이다. 수백만의 교외거주자들의 나날의 수송문제보다도 초음속 제트기 콩코드에 더 큰 중요성을 두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건강유지의 문제보다도 선진의료의 모험적인 개척자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의료기술의 발달은(교통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결핍과 불평등과 좌절감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로 더 소수의 필요만을 충족시킨다. 그러한 과정에 가장 고약한 환상, 즉 머지않아 의학이 모든 질병의 치료법을 알게 될 것이며 따라서 병을 예방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환상을 유지시킨다.
이러한 환상은 의료용어에서도 발견된다. 건강검사나 퇴행성 질환의 조기진단이, 실제로 아무런 처치나 치료를 하지 않는데도 “예방”이라고 불리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존 캐슬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질병을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은 환자들 개개인의 질병을 살피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집단적인 차원에서의 환경과 병에 걸리기 쉽게 만들고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사회적 심리적 요인들을 다룸으로써였다. 건강은 본질적으로 발병요인들과 사람 사이의 균형상태이다. 건강은 자신의 환경과의 사이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다. ... 중요한 점은 이 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사회적 지원이 주어질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증가하는 질병, 진정한 예방에 대한 무관심, 건강관리를 위한 엄청난 과잉소비, 그리고 건강을 회복시키지 못하는 약품들. 이러한 터무니없는 상황에 의학과 의사들은 어떻게 적응하는 것일까?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환자와 질병, 의료의 기능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아직도 18세기와 19세기의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에 깊이 젖어 있다. 신체는 톱니바퀴가 고장난 기계로 간주되고 있다. 의사는 수술이나 화학적 혹은 전기적인 수단으로 톱니바퀴들을 다시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기술자인 것이다.
고대의 의학과는 달리 부르조아 의학은 개인들만 알았지 전체 인구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물론 의사들이 “그들의” 환자들과 갖는 관계로 볼 때 당연하다. 환자들은 사사로운 개인들이고 고객이다. 환자들은 지금 이곳, 있는 그대로의 세상속에서 의사가 그들의 통증을 덜어주고 치료를 하고 조언을 해줄 것을 청한다. 의사들은 이 요구에 순응한다. 그것이 그들의 직업이다. 의사가 개별적인 사례를 넘어서 그 질병의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원인을 볼 것을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렇게하여 의학은 부분적인 구조들만을 세밀하게 연구하며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구조를 고려하지 않는 괴상한 “과학”으로 변하고 있다.
오직 소수의 개척자들, 선교사들 그리고 “미치광이”들만이 전체인구를 고려하는 방역학과 생리학 혹은 인류학이나 작업관련 질병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 진정한 연구가들과 이론가들은 의료전문가로서의 명예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의료의 실제와 기능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인구전체의 건강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필요한 돈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아무도 그런데 신경을 쓰라고 의사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받은 훈련과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의사들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습관과 환경을 변화시켜 건강을 도모할 수 있을지를 충고해 줄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의사들은 사회체계의 좁은 한계 안에서, 놀라우리만큼 사회규범에 순응하면서, 그들의 직업을 수행한다.
가스와 화학증기, 연기(담배, 녹은 금속, 뜨거운 기름, 석탄의)와 먼지(석면, 면, 화강암의)를 들이마시는 것이 건강에 몹시 해로우리라는 것을 의사들이 어떻게 예견할 수 없었던가? 어떻게 그들은 산업도시와 광산촌의 생활조건, 그들 자신이 날마다 그 처참한 폐해를 보고 있는 그 상황에 맞서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퇴행적 진행(동맥경화증 고혈압, 천식 등)을 - 이러한 증상이 “정상적”인 것으로 그들이 받아들이는 생활에 기인하기 때문에 - “질병”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있지 않는가?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문명과 사회가 전체 인구에게 입히고 있는 손상을 의사들은 어떻게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묻는 순간 이 질문은 당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왜 임금노동자, 시민, 투표자, 납세자인 당신은 국가나 당신을 고용한 사람들에게 질병의 결과나 비용을 감당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질병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는가? 어째서 당신은 더 많은 병원과 의사 간호원 새로운 약들을 요구하면서, 그런 것들 없이 지낼 수 있게 해 줄 생활조건을 요구하지는 않는 것인가? 왜 불건강한 습관과 생활방식을 바꾸지는 않고 “당신의” 의사에게 그 결과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가?

“의학은 당신에게 아무런 일도 해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만일 당신이 담배를 끊고, 과식을 하지 않고, 걱정하기를 그치고, 집안에 앉아서만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약이 필요없을 것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의사에게 우리는 계속 찾아갈 것인가? 유행성 감기를 우리의 할머니가 치료하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하면서 “뜨거운 레모네이드를 하루에 두되쯤 마시고 몸을 따뜻이 하고 쉬십시오. 그러면 약을 먹지 않고도 사흘이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의사에게 우리가 계속 찾아가겠는가?
사실, 의학적 보살핌과 약물의 과잉소비에 대한 책임은 그것들이 효과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팔아먹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고, 사기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쟝 피에르 듀비와 세르쥬 카센티가 쓴 책 - <<약의 침략>>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보다 더 풍부한 것을 담고 있는 책 -이 아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들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 짐짓 행하여지고 있는 공모체제를 멋지게 분석하고 있다.
물론 환자는 가짜이고 의사는 사기꾼이라는 말은 아니다.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왜냐하면 질병과 건강은 또한 언제나 인식의 문제이고 인식은 각 개인의 성향보다도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증상이라도 월요일과 토요일에 느낌이 다를 것이고, 일을 하기 전과 애인을 만나기 전의 느낌이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자기 관찰에 익숙해져 있는 “교양있는” 사람들은, 보통 무심하게 지내는 “세련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쉽게 자신이 병들었다고 느낄 것이다. 자신들의 파편화된 일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임금노동자들은, 자기들의 일을 끝내지 못하면 스스로의 사업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장인이나 농부들보다 더 쉽사리 병에 걸릴 것이다.
듀피와 카센티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처럼, 대부분의 경우에 질병은 “스트라이크”이거나 소극적인 항의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일반의(一般醫)의들은 전체 환자의 75퍼센트가 기질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처지 못지 않게 위안을 구하러 온다고 말한다. 이런 환자들이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고, 그대로 방치하면 심각한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임상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은 이런 경우 “기능상의 부조” 혹은 “신경성”이라고 부르면서, 그러한 증상에 대하여 흔히 값비싼, 독성이 있는 약으로 처치를 하려고 한다. 여기에 바로 속임수가 끼어든다.
실제로, 이렇다할 명명할 수 있는 병은 아니더라도 진실로 아픈 이들은 흔히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도움과 임무면제를 청하러 온 사람들이다. 다른 시대였다면 그들은 분명히 고백을 하러 가거나 성지순례를 하거나 기도에 몰두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자들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자선은 땅에서뿐 아니라 하늘에서도 사라졌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이해서는 그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 신체 이상(異常)-외인성이며 환자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의 형태를 위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대로 계속할 수는 없어요. 잠도 못자고, 식욕도 없고, 성관계에 대한 흥미도 없어요.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어요. 일주일 휴가를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의 사장이나 상급자가 젼혀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당신의 말을 듣게 하려면 당신의 호소는 불면증이나 당신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해(傷害)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즉, 의학적 면제를 정당화하는 질병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거의 망가질 지경에 처한 사람은 의무의 면제를 허용해줄 자격을 가진 유일한 권위자인 의사를 개입시키기 위해 자신의 불편을 의료적인 문제로 만든다. 그리고 의사는 대개의 경우 그 게임에 합세하여, 기본적으로는 그의 고객이 자기가 직면한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뿐인 것을 화학적으로 처치 가능한 질병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임수 속에는 심각한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것은 이반 일리치가 지적하기 훨씬 전에 전위적인 의사들이 보고 있었던 위험들이다. 이 속임수는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는 구제 요청을 기술적인 처치로 다스리려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근본적으로, 그것은 환자의 그러한 견딜 수 없어하는 상태를 가능한 한 빨리 약품으로 제거할 수 있는 “일시적 이상상태”로 보는 데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사들과 의료가 어떻게 체제유지의 수호자로 되는가를 본다. 의사들의 임무는 환자가 자신의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잘 적응하지 못하게 하는 증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의사들은 물론, “우리에게 와서 될수록 빨리 치료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환자들이므로” 자기들은 비난받을 것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변명이 못된다. 치료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환자들의 역할이다. 진정한 문제는 “의료가 환자를 도울 수 있는가”이다. 일시적이며 원칙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이상상태가 아니라, 그 질병은 건강한 사람이 불건강한 상황에서 나타낼 수밖에 없는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전화교환수, 키펀치작업자, 일관공정작업의 노동자, 전자납땜공 등이 겪는 소화불량, 두통, 류머티즘, 불면증, 우울증은 매일같이 여덟시간씩 계속해서 가해지는 폭력에 적응할 수 없게 된 한 생명체가 보이는 “건강한” 저항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증상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 자체가 나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학교와 군대와 감옥이 시작한 일을 의료가 완성시켜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할당된 역할에 개인들이 잘 적응하도록(필요하면 화학약품을 써서라도) 만드는 일 말이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역할을 계속 견딜 수 있도록 신경안정제, 흥분제, 항우울증약물, 수면제 등을 의사에게 부탁하는 양심적이고, 나이든, 과로에 지친 피고용자들의 의료관이다. 또, 이것은 노동자들을 병들게 하는 바로 그 일자리로 가능한 한 빨리 노동자들이 돌아오도록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많은 회사전속의사들의 의료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것은 군대, 감옥, 정신병원, 경찰에 소속된 의사들이 의료의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감금상태에 적응하려 하지 않는 개인들에 대한 “의료적 처치”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안해 하는” 사람을 진정시키는 약이 있고, “난폭한” 사람을 겁먹은 양(羊)으로 만드는 약도 있고, 동성연애자들을 성적으로 무력하게 만드는 약이 있는가 하면, 고문당하고 있는 사람이 기절하거나 죽지 않게 하는 약도 있다.
이러한 길의 극단에는, 사회적 일탈자, 부적응자, 반항적인 사람,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 게으른 사람 등에 대한 강제적인 정신치료-혹은 세뇌-가 있다. “가장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병이 든 것이다. 그리고 병든 사람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비에트 경찰과 정신의학자들만이 아니다. 서유럽과 미국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저명한 인물들이 있다. 예컨대 B.F.스키너 교수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의 “재교육”방법은 <<기계오렌지>>라는 소설속에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 스페인계 미국인인 델가도는 컴퓨터를 인체내에 심어놓고 원격조종으로 사람의 “정상적인” 행동을 유도하는-정부지도자로부터 시작해서-어떤 세계정신의학자 위원회를 꿈꾼다. 혹은, 함부르크대학의 그로스교수와 스바브교수가 있는데 이들의 인성(人性) 파괴방법은 독일 정치범들에게 무시무시하게 효과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병적인” 증상이 기질적 고장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적 조건에 기인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의사들이 기꺼이 증상만을 다루려고 한다면, 그들은 쉽사리 경찰과 정부의 조력자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의료에 대하여, 혹은 더 정확히 말하여, 무엇이 건강과 질병을 결정하는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야 할 때이다. 이반 일리치의 목표는 이러한 반성을 자극하는 일이다. 그는 의료의 실패에 대하여 악을 악으로 다스리는 식으로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의료체제를 더욱 확장하고, 의료의 관할권과 힘을 늘리고, 의료의 사회통제 및 삶의 “의료화” 경향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리치에 따르면 이 위기에 대한 오직 하나의 건강한 반응은 의료의 비전문화, 즉 건강과 질병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의사들의 독점을 폐기하고,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는 자율적인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기술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그렇게 하려면 근본적인 정치-문화적 변화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의료의 기술적 효율성은 몹시 제한되어 있다. 병원들이 환자의 85퍼센트를 내보낸다 하더라도, 엄격히 의학적 견지에서 그 환자들은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 4분의 3의 경우에, 일반의의 충고와 그것의 연장으로서 불가피하게 주어지는 처방의 효과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옛날에 주문이나 기도나 굿이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효과가 있다. 전체의 75퍼센트에서, 처방된 약품의 유효성은 의료기술에 대한 환자의 “믿음”에 달려 있다. 다른 시대에서 사람들은 기적을 믿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을 믿는다. 나머지 25퍼센터의 환자의 경우에는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전문가의 기술적인 보살핌이 필요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경우의 90퍼센트에서 병은 저절로 회복된다. 이 90퍼센트에서 처방의 주된 목적은 환자에게 회복의 기회를 허용해줄 휴식과 섭생과 적절한 행동을 -물약과 알약과 좌약의 형태로 위장하여-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전체 환자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이러한 수치들을 통해서 우리는 전체적인 조망을 해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의료에서 신화와 신비와 마술적인 의식이 제거되고 났을 때, 전문적인 의료설비들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것이 기술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남아 있을지를 그 수치들은 보여준다. 그것들은 건강관리의 비전문화가 중국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리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진단과 치료에서 해로움보다는 확실히 도움을 주는 경우에 있어서 대부분은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진단과 치료를 위한 물질적 자원이 극히 값싸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본인이나 가족구성원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포장 설계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료의 이러한 비전문화는 “특별한 경우에 필요할지 모르는 전문가를 훈련하는 일과 그 기술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일리치는 지적하고 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전문가에 대한 의존은 드문 일이어야 하며, 최소한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구성원들에게 최적의 건강을 제공하는 사회는 사람들을 전문치료사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집단에 떠넘기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건강을 지키고 질병에 대응하는 수단과 책임을 전체인구들 가운데 고르게 분배하는” 사회야말로 최적의 건강을 보장하는 사회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짝을 짓고, 아기를 낳고, 인간 조건을 공유하고, 그리고 죽는데 관료적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료해택을 잘 받는 사람이 아니라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식사를 하며, 출생·성장·일·회복·죽음에 꼭같이 알맞은 환경속에서 살면서 인구가 무제한 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또 사람은 늙어가고, 병으로부터 불완전하게 회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 죽음이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문화를 누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보다 이전의 모든 문화들은 이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한계를 인정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일리치는 상기시켜 준다. 건강관리는 직업적인 기술자들의 배타적인 전문분야가 아니었다. 그 반대로, 건강유지 기술은 삶의 기술이었다. 거기에는 올바른 행동과 위생규칙이 강조되었다. (위생이란 낱말의 본래 의미는 사람의 기술이다.)
이러한 규칙은 특히 “잠자는 것, 먹는 일, 짝짓기, 일하기, 놀이, 꿈꾸기, 그리고 고통을 견디기”에 관계하였다. 그러한 규칙으로 인해 사람들은 “아픔을 견디고, 병을 이해하며, 항상 사람과 함께 있는 죽음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본래 모든 사회적 활동 속에 들어 있었던 삶의 기술(위생)은 산업화와 더불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다. 임금노동이 널리 퍼짐에 따라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작업의 길이, 강도, 속도, 조건 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독립된 장인(匠人)이나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과는 달리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작업과 휴식과 잠을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생활리듬을 통제할 힘을 빼앗긴 그들은 “일의 문화와 위생술”도 박탈당했다.
그리하여 노동은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외부적인 임무가 된다. 노동자들은 핑계만 있으면 언제고 공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18세기와 19세기의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의 “게으름”을 중시했다. 그 때는 분명히 이 “게으름뱅이”들을 믿고 스스로 자신이 아픈지 아니면 일을 하기에 적당한지 결정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 결정(질병증명 혹은 치료증명)은 “과학적인” 기준을 적용시키는 전문가가 해야 한다. 지난 세기 초에 진료소들이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기준이 가능하게 되었고, 질병은 아픈 남자와 여자, 그들의 노동, 그들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실체가 되었다.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이런 발견들을 장악했다. 이제부터는 오직 의사들만이 누가 아픈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가장 일상적인 흔한 고통조차도 의학적 관리와 증명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서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은 것처럼 사람들에게서 병과 건강을 빼앗았다.
그 이후로 건강은 일반적인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단지 질병이 없는 상태, 즉 육체적으로 일을 하기에 적합한 상태로 되었다. 한편으로 질병은 아픈 상태가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해버려야 할 “비정상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이제부터 연구하고 보살피고 치료하는 대상은 환자가 아니라 질병 그 자체이다. 지금부터 100년도 더 전에 도입된 건강보험으로 인해 건강관리의 전문화·산업화·표준화는 더욱 촉진되었다.
일리치가 반드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주장은 건강을 회복하려면 강제된 임금노동을 폐기해야 된다는 결론으로 나가고 있다. 노동자들이 그들의 공동작업의 조건, 도구, 목표를 다시 통제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생산활동이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지는 임무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자율성, 다양성과 자연스러운 리듬이 회복되어) 그것이 바로 기쁨이 되고, 교감이 되고, 삶의 기술이 되는 새로운 문화가 필요할 것이다. 건강이 전문가들의 일이기를 그치고 항상 개인과 집단의 생활에 질서를 잡아주며, 어디서나 통용되는 노력이며 가치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각기 의료를 거부할 것을 일리치가 요구할 때 그것을 따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것은 임금노동자들이 병가와 출산휴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실제로, 질병과 건강에 대한 건강하고 “비의료화된” 관계는 우리가 임금노동과 함께 현사회의 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그 “불건강한” 관계(의료기관들과 기업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을 폐기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일리치는 여기에 대하여 어렵지 않게 대답을 한다. “불건강한” 사회 관계의 폐기는, 이 사회의 틀 속에서라도 이미 개인과 집단의 주권, 우리의 환경과 생활방식의 건강성, 그리고 우애와 상호협조에 기초를 둔 인간관계에 대한 욕망을 이미 자기자신의 기본적인 행동규칙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다.

 

 

* 앙드레 고르쓰(Andre Gorz) - 프랑스의 사회이론가. 이 글은 Ecology as Politics(1980)의 일부분을 뽑아 옮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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