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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기사] "보험·금융 협동조합 허용되면 세상이 뒤집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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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시 : 2015-03-31 10:22
  • 조회 : 4,442

건강보험계와 관련해서 아래 부분이 눈에 들어와서 기사를 퍼옵니다. 

일본의 공제협동조합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좀 궁금하네요. 

"일반 보험 회사는 적립금으로 돈을 굴릴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공제협동조합은 적립했다가 목적에 맞게 지출하고 나머지는 돌려주는 거죠. 운영비는 조합원 가입비를 활용하죠. 이러니 일본에서 어떻게 민간 보험 회사가 기를 펴겠어요.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기본법에서 금융, 보험을 제외시킨 이유를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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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금융 협동조합 허용되면 세상이 뒤집히죠!"

[인터뷰] 협동조합 산증인 김영주 무위당만인회 전 회장

강양구 기자(정리) 2013.06.09 12:54:00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의 전환과 동시에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강원도 원주다. 원주는 명실상부한 한국 협동조합 운동의 상징이다. 협동조합에서 먹을거리를 사고, 협동조합에 아이들을 맡기고 아플 때 치료를 받고, 협동조합에서 꼭 필요한 돈을 빌릴 수 있는 곳. 이렇게 협동 사회 경제가 삶에 뿌리를 단단히 내린 곳은 현재로서는 원주뿐이다.

이곳 원주의 협동조합 운동을 상징하는 두 인물은 천주교 원주 교구의 초대 교구장 지학순(1921~1993년)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1928~1994년)이다. 지학순 주교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속에서 무위당은 두루 인재를 모아서 협동조합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삶의 방식 '원주 모델'을 일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옆에는 바로 한국 협동조합 운동의 산증인 김영주(79)가 있었다. 김영주 무위당만인회 전 회장은 1967년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의 권유로 원주에 자리를 잡고 나서부터 46년간 신용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운동의 밑바닥을 닦았다. 한살림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비롯한 한국 대안 협동조합 운동의 고비마다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

협동조합 새내기로 막 발을 내딛는 프레시안은 김영주 전 회장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김 전 회장은 원주에 협동 사회 경제가 뿌리를 내리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차근차근 훑으면서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진행은 프레시안 협동조합 박인규 이사장이, 정리는 강양구 기자가 맡았다. 편집자

▲ 김영주 무위당만인회 전 회장. ⓒ프레시안(최형락)


1988년 <한겨레> 창간, 2013년 <프레시안> 협동조합 전환

프레시안 : 김영주 선생님께서는 한국 협동조합 운동의 산증인입니다. 이번에 애초 주식회사였던 프레시안의 협동조합 전환을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으리라 생각됩니다.

김영주 : 아침에 프레시안 여러분을 만날 생각을 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특히 1988년에 한겨레신문사가 창간될 때의 모습이 생각났어요. 그 때 리영희 선생을 비롯한 여러분이 표면에 나서서 고생했지만, 뒤에서 심적 물적 도움을 줬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곳 원주 사람들도 나서지 않고서 한겨레신문사 창간을 도왔죠.

한겨레신문사는 국민주 방식으로 창간이 되었습니다만, 그 때의 흐름을 꿰뚫고 있던 정신과 또 실제 모습은 협동조합과 다를 바 없었어요. 대안 언론이 필요한데 돈 많은 사람이 투자하면 망가질 게 뻔하니, 그 대안으로 많은 사람이 적은 돈을 모아서 하자는 취지였었거든요.

만약 그 당시에 협동조합으로 언론을 창간하는 게 수월했다면, 틀림없이 한겨레신문사는 협동조합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제 25년이 지나고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한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한겨레신문사가 창간되고 25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해 프레시안이 또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거니까요.

프레시안 : 2001년 기성 언론에 몸담고 있던 기자들이 <프레시안>을 창간할 때의 욕구는 깊고 넓은 기사를 써보자는 거였어요. 12년이 지난 지금 그 점에서는 일정 부분 성취가 있었다고 자평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사의 대가로 살림을 꾸리는 매체는 단 한 곳도 없습니다. 대부분 기업, 정부 광고에 의존하죠.

특히 이런 상황에서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 언론을 지향하는 <프레시안>은 살림을 꾸리기가 더 더욱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종이 신문은 구독료라도 있는데, 인터넷 매체는 그마저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한국에서 인터넷 콘텐츠는 공짜라는 인식이 너무 강해서요.

그런 상황에서 애독자가 직접 주인이 되고 더 나아가 운영비(구독료)까지 마련하는 협동조합을 고민하게 되었죠. 그런데 이런 시도를 놓고서 기대 반 걱정 반입니다. <프레시안>처럼 매일 기사를 업데이트하는 매체의 발행처가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일은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

또 유럽의 협동조합 언론도 대부분 노동자가 중심이 된 직원 협동조합이지, 독자-소비자 협동조합은 드문 모양이에요.

김영주 : <한겨레>를 창간할 때도 다들 반신반의했어요. 하지만 창간하고 나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25년이나 살아남았고, 아무튼 한국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잖아요. 프레시안 협동조합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더구나 <프레시안>은 지난 12년 동안 그 나름의 존재 이유를 충분히 증명했잖아요.

프레시안 : 생활협동조합은 소비자 조합원에게 먹을거리와 같은 유형의 가치를 제공하죠. 언론이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소비자 조합원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도 꼬리를 뭅니다.

김영주 : 시대가 변했잖아요. 예전에는 정말로 현물만 상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먹을거리, 공산품 같은 유형의 가치만큼이나 정보, 감동 같은 무형의 가치를 갈구합니다. 프레시안 협동조합은 독자-소비자 조합원에게 다른 곳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그런 정보, 감동을 제공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금 세상에 삐뚤어진 정보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럴 때일수록 바른 정보를 갈구하는 욕구는 커지게 마련이죠. 프레시안 협동조합의 과제는 그런 바른 정보를 독자-소비자 조합원에게 얼마나 제대로 공급할지예요. 만약 프레시안 협동조합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독자-소비자 조합원이 미련 없이 떠나겠지요.

유럽에는 오페라, 클래식, 스포츠 등 문화 예술 영역의 협동조합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노동자 협동조합도 있고, 또 소비자 협동조합도 있지요. 한국에서도 이런 문화 예술 협동조합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는 없지만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열성 팬을 가진 밴드가 있다고 칩시다.

만약 그 밴드의 팬들이 모아서 협동조합을 만든다면 어떨까요? 그 밴드가 음악 CD를 낼 때마다 2000명 팬-조합원이 사주는 겁니다. 공연도 그렇게 하고요. 그 밴드는 슈퍼스타처럼 떼돈을 벌지는 못하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팬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할 수 있겠죠. 앞으로 한국에서도 이런 협동조합이 등장할 겁니다.

프레시안 협동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레시안>에서 끊임없이 독자-조합원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한다면, 또 그 과정에서 해당 독자-조합원이 <프레시안>에 애정까지 가지게 된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프레시안 협동조합이 성공하면,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언론에게 좋은 선례가 될 겁니다.

프레시안 : 프레시안 협동조합이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신경써야 할 게 뭐가 있을까요?

김영주 : 앞으로 상당 기간은 <프레시안>을 만드는 기자-조합원도 또 소비하는 독자-조합원도 서로가 낯설 거예요. 결국 쌍방이 자꾸 교류하면서 변하는 수밖에 없어요. 우선 프레시안 협동조합은 끊임없이 조합원 교육을 해야 해요. 기자-조합원뿐만 아니라 독자-조합원을 상대로요.

아까 올라오면서 엘리베이터 게시판 봤죠? 협동 사회 경제가 발달한 원주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교육 또 교육입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강사로 오신 분들이 다 깜짝 놀라요. 서울을 비롯한 다른 곳에서는 서른 명 정도만 모여도 '와!' 이러는데, 이곳에서는 보통 일흔 명 이상이 모여서 강의를 들어요. 심지어 공짜도 아닙니다.

프레시안 협동조합도 조합원 교육을 끊임없이 해야죠. 교육이라고 하니까 일방적인 소통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육을 통한 만남을 계기로 기자와 독자가 서로 바뀌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반복될수록 프레시안 협동조합은 다른 언론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건해지죠.

두고 보세요. 프레시안 협동조합이 자리를 잡으면, 나중에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조합원이 지켜줄 테니까요.

ⓒ프레시안(최형락)


지학순-장일순, 협동의 원주를 꿈꾸다

프레시안 : 원주 하면 한국 협동조합 운동의 발생지로 볼 수 있습니다. 김영주 선생님은 그 역사를 직접 만들어왔습니다. 언제부터 협동조합 운동에 뛰어드신 겁니까?

김영주 : 1967년이었죠. 신문 기자 생활을 잠시 하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때 다니던 언론이 폐간되면서 춘천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때였습니다. 강원도청 공보실장이었어요. (웃음) 그러다 서울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런데 당시 천주교 원주 교구장이었던 지학순 주교와 신용협동조합을 시작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서울은 왜 가느냐며 잡았어요. 그 때부터 원주에서 활동을 시작했죠.

프레시안 : 원주신용협동조합이 그 때 시작된 거군요.

김영주 : 1966년 11월 13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원주 교구 천주교인 35명과 시작한 게 강원도 최초의 원주신용협동조합이었죠. 물론 1965년 3월 22일 원주 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한 지학순 주교가 원동력이 되었고요. 원주신용협동조합은 1972년 10월 주민 32명이 출자해 시작한 지금의 밝음신용협동조합의 모태입니다. 저는 1967년부터 거들었죠.

프레시안 : 신용협동조합에 눈을 돌린 이유는 뭔가요?

김영주 :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서민 경제는 박살이 났습니다. 특히 금융이 박살이 나니까,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예를 들어 병에 걸리면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증금으로 낼 목돈을 구할 데가 있나요? 요즘 대학 등록금 비싸다고 난리지만 등록금은 예전에도 비쌌어요. 그런데 그 등록금을 낼 목돈을 서민이 어떻게 마련해요.

그래서 이런 서민의 생활을 뒷받침해줄 금융 기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바로 신용협동조합이에요. 당시만 하더라도 농촌 인구가 많을 때니까 200~300호가 있는 큰 마을부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장롱 속에 감춰뒀던 돈을 내놓으라고 했죠. 우리가 책임지고 관리해 준다고. (웃음)

프레시안 : 당시만 하더라도 군사 독재 때인데 신용협동조합이 가능했나요?

김영주 : 5·16 쿠데타 이후에 협동조합 운동이 크게 위축된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신용협동조합은 미국 원조가 살렸어요. 미국은 정부 기관마다 신용협동조합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미국 국무부에도 신용협동조합이 있죠. 그 때문인지, 미국이 경제 원조를 할 때 5만 달러의 신용협동조합 교육비를 책정해 놓은 거예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미국의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신용협동조합은 온전한 형태로 존속할 수 있는 겁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신용협동조합은 유일하게 민주적이면서도 합법적인 협동조합 조직이었어요. 그래서 원주에서도 신용협동조합부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다 1972년 남한강 일대의 수해가 협동조합이 활성화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어요. 그 때 지학순 주교가 독일로부터 원조금을 받아 와요. 그런데 그 원조금을 써버린 게 아니라, 원주 일대의 마을들이 협동 조직을 만드는 종자돈으로 활용합니다. 마을마다 어떤 사업을 할지 궁리하고, 조직을 구성하고, 이사장을 뽑고, 회계도 뽑고, 감사도 하고….

프레시안 : 처음부터 사람들이 잘 따라왔습니까?

김영주 : 어려웠죠. 이승만, 박정희 정부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위에서 아래로 지시하는 일방적인 문화에 젖어 있었던 때였어요. 더구나 원주는 한국 전쟁 때 양쪽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아홉 번이나 정부가 바뀐 곳입니다. 그 와중에 당연히 이웃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많았죠. 말만 안 할 뿐이지 마을 사람들 사이가 불편한 곳이 많았어요.

어떡합니까? 지난한 교육밖에 답이 없죠. 우선 한우 지원 사업부터 시작했어요. 빌린 돈으로 6개월 암송아지를 구매하죠. 24~30개월을 키우면 그 암소가 새끼를 낳아요. 그럼, 새끼로 빌린 돈을 갚고 어미는 갖는 거죠. 그 새끼는 또 다른 소 없는 집에 빌려주고요.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면 마을 주민 전체가 다 소를 가지게 됩니다.

이런 성공 사례가 반복되니, 20~50명 정도 규모의 협동 조직이 총 168개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는 문화도 만들어졌죠. 시골 사람이 그런 사업을 하면서 회계와 같은 부가 지식을 습득하게 된 것은 덤이었죠. 박정희 정부가 추진했던 새마을운동과는 그 근본이 달랐죠.

프레시안 : 그러다 본격적으로 유기 농업 운동이 시작되었군요.

김영주 : 1975년부터 유기 농업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몇몇 농가가 유기 농업을 하면 뭐합니까? 이 논에서 화학 비료와 농약을 안 써도 바로 옆 논에서 농약을 쓰면 헛일이니까요. 마을 전체가 유기 농업 전환을 결의하도록 이끌어야 했어요.

심지어 농민들 중에는 퇴비를 못 만드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수십 년간 화학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관행 농업에 익숙해진 후과죠. 그래서 전라도에서 나이든 어른을 모셔서 퇴비 만드는 법부터 가르쳤어요. 그렇게 어렵게 유기농 먹을거리를 생산했는데 이제는 판로가 문제였어요.

프레시안 : 당시만 하더라도 유기농 먹을거리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이 낮았으니까요.

김영주 : 맞습니다. 그래서 도시 소비자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된 겁니다. 이렇게 도시 소비자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한 데는 한 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었어요. 당시만 해도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 광산이 많았죠. 그런데 광부는 노동도 힘들었지만, 광산 마을에서 가족과 함께 살림을 꾸리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쌀을 사야 하는데 당장 돈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외상으로 사야죠. 그런데 동네 가게에서 외상으로 사려면 웃돈을 30퍼센트나 줘야 했죠. 언제 죽을지 도망갈지 알 수 없으니 당연한 웃돈이라는 식이었죠. 힘든 노동에 박봉을 받았는데, 이렇게 물가도 비싸니 살림살이가 나아질 리 없죠.

그 때 광산별로 협동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퇴직금을 담보로 하고 신용협동조합을 열다섯 개나 만들었죠. 비로소 광부들도 목돈을 빌릴 수 있게 된 겁니다. 더 극적인 건 광산 마을마다 소비자 협동조합을 만든 거였어요. 마을마다 쌀을 비롯한 생필품을 파는 구판장을 소비자 협동조합에서 만든 겁니다.

재밌는 예가 있어요. 광부들이 술을 좋아하잖아요. 이걸 마을 가게에서 사면 병당 1000원이에요. 그런데 소비자 협동조합에서 트럭을 가지고 양조장에 가서 반값에 술을 떼옵니다. 그런데 반값에 술을 팔면 광부들이 더 마실 거 아녜요? 그래서 "일단 병당 1000원에 사라 그리고 남는 돈(500원)은 연말에 이용 배당을 하겠다," 이런 거죠.

처음에는 광부들 대부분의 반응이 이랬죠. "그걸 우리보고 믿으라고?" 그런데 연말에 이용 배당을 목돈으로 돌려줬죠. 다들 협동조합 팬이 안 되고 배겨요? 그 때 광산 마을에서 그런 일을 한 장본인이 이번에 새로 취임한 무위당만인회 이경국 회장(무위당 사람들 이사장)입니다. (웃음)

프레시안 :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소비자 생활협동조합 조직에 나선 거군요.

김영주 : 자신감이 생겼죠. 농촌에도 구판장을 만들기를 권했죠. 1985년에는 원주에도 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사실상 지금의 한살림의 모태죠.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은 1990년 '한살림원주'로 명칭을 바꿨다. 편집자) 그리고 1년 뒤인 1986년에 박재일(1938~2010년) 선생이 주도해서 서울에서 한살림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시작했죠.

그러고 나서 생산자(농민)와 소비자(주부)를 연결시켰죠.

"우리가 당신들에게 건강을 맡기겠습니다. 계속해서 안전한 농산물을 공급해 주세요." (소비자)
"그걸 맡겠습니다. 대신 우리가 먹고사는 건 당신들이 앞으로 책임져 주세요." (생산자)

바로 이렇게 순환 원리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담보로 살자고 약속하는 것, 그게 바로 한살림의 정신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보험-금융 없는 반쪽짜리 협동조합기본법

프레시안 : 지금까지 원주를 중심으로 한 한국 협동조합의 역사를 쭉 훑어봤습니다. 평생을 협동조합 운동에 헌신해 온 셈인데, 최근의 협동조합 붐을 보면 어떻습니까?

김영주 : 일단 프레시안의 협동조합 전환처럼 반갑고 설레는 일도 있어요. 하지만 기대보다 걱정이 큰 게 사실입니다. 우선 협동조합기본법 자체의 아쉬운 점부터 지적하죠. 이번에 협동조합기본법은 보험, 금융을 제외시켰어요. 아쉽습니다. 보험, 금융이 포함된다면 정말로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줄 텐데요.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김영주 : 일본에서 대기업 혹은 외국계 보험 회사가 왜 기를 못 펴는 줄 아십니까? 바로 공제협동조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공제협동조합의 조합원 수가 1450만 명이나 됩니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주로 생명 보험에 가입이 되어 있는데요. 우리나라 보험 회사와 비교하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죠.

우선 청년이나 노인이나 내는 돈이 똑같습니다. 그리고 가입을 권유하러 다니는 사람이 없어요. 이 공제협동조합은 적립금의 약 60퍼센트를 지급 사유가 있는 조합원에게 공제금(보험금)으로 지급합니다. 그리고 약 40퍼센트는 다시 조합원에게 돌려줍니다. 그러니까 조합원이 열두 달 돈을 내고 넉 달치를 돌려받는 거죠.


프레시안 : 거의 100퍼센트를 고스란히 돌려주는군요. 이윤을 추구하지 않아서 그렇죠. 그런데 운영은 어떻게 합니까?

김영주 : 맞아요. 일반 보험 회사는 적립금으로 돈을 굴릴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공제협동조합은 적립했다가 목적에 맞게 지출하고 나머지는 돌려주는 거죠. 운영비는 조합원 가입비를 활용하죠. 이러니 일본에서 어떻게 민간 보험 회사가 기를 펴겠어요.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기본법에서 금융, 보험을 제외시킨 이유를 알겠죠?

프레시안 : 정말로 큰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싹을 자른 거군요.

김영주 :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세 축이 뭔지 알아요? 증권, 보험 그리고 금융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 세계의 동향을 보세요. 신용협동조합이 금융을, 공제협동조합이 보험을 점점 무력화시키고 있어요. 그러니 협동조합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두 축을 무너뜨리고 있는 거죠. 이를 그냥 허용할 리가 없죠.

그 존재 자체로 빛나는 협동조합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협동조합기본법 이후에 협동조합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냥 좋지만은 않으시죠?

김영주 : 아까 원주를 중심으로 협동조합의 역사를 살피면서 확인했듯이, 우리는 단계적으로 해왔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듯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협동조합기본법이 등장하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갑자기 모두가 고등학교를 다니는 듯한 분위기예요.

더 심각한 건 정부의 태도죠. 공무원이 가끔씩 자문을 구하러 찾아오는데, 묻는 게 이런 식입니다. '돈을 얼마나 투자하면 협동조합을 ○○○개나 만들 수 있겠어요?' '담당자를 몇 명이나 배치하면 협동조합이 잘될까요?' 이런 식의 접근은 말도 안 되죠. 또 그렇게 만들어진 협동조합이 잘 될 리도 없고요.

프레시안 : 그런 정부의 조급함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협동 사회 경제가 제일 발달한 지역이 원주인데, 이곳에서도 정작 협동 사회 경제가 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더군요. 협동 사회 경제를 단기간에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충격요법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영주 : 협동조합기본법이 물론 그런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테고, 그래서 저 역시 그 자체는 대환영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협동 사회 경제의 의미를 숫자로만 파악해서는 곤란해요. 지적한 대로 금액만 놓고 보면 원주 역시 협동 사회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적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죠.

하지만 이렇게 적은 비중이라도 협동 사회 경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죠. 예를 들어 신용협동조합이 생기기 전후에 기존 은행의 태도가 얼마나 달라진 줄 아십니까? 신용협동조합을 의식해야 하는 은행의 태도가 180도 바뀝니다. 대출 금리도 떨어지고, 서민과 중소기업의 문턱도 크게 낮아졌죠.

프레시안 : 협동 사회 경제는 그 존재 자체로도 지역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는 지적이시군요.

김영주 : 맞아요. 제대로 된 협동조합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런 감시와 견제의 역할을 충분히 합니다. 그러니 더디 가더러도 제대로 된 협동조합을 하나둘 일구는 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일반 기업과 다르지 않은 협동조합이 수천 개가 있다 한들 지역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오히려 부정적일 수도 있어요.

아까 원주의 협동조합 운동을 소개한 것도 좋은 협동조합을 만드는 게 또 건강한 협동 사회 경제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프레시안도 그렇잖아요. 지난 12년간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면서 좋은 매체를 만들고자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그런 고군분투가 결국 이번의 협동조합 전환으로 이어졌잖아요.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프레시안에 당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김영주 : 방금도 얘기했지만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기까지 많은 고민과 심한 진통이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앞으로 프레시안 협동조합을 일궈가면서도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겁니다. 바로 그런 어려운 일을 조합원들이 함께 극복하면서 좋은 협동조합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프레시안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내놓을 만한 좋은 협동조합 언론으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도 옆에서 많이 응원하겠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강양구 기자(정리)

댓글 1

채수정 15-04-03 19:12

음. 일본 공제협동조합 사례를 공부해보자고 한 이유를 알겠네요. 건강계 모임을 잘 운영해서 공제협동조합으로 만들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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