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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리차드 디인스트, <<빚의 마법 The Bonds of Debt>> 발췌 1

  • 지음
  • 작성일시 : 2021-08-10 18:37
  • 조회 : 1,028

리차드 디인스트, <<빚의 마법 The Bonds of Debt>> 


한국어판 서문

빚은 까다로운 문제다 그것은 피하기 어렵고, 벗어나기 어려우며, 이해하기 어렵다. 현실적인 수준에서, 빚은 자신을 사회적 삶의 기본적인 조건으로 제시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자신의 주체들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다소간 신용할 수 있는 채무자들로 취급한다. 

불평등의 증가가 평등의 원리를 저버리고 영속적인 빈곤이 인간 자유의 범위를 제약하듯이, 빚[채무]의 팽창은 연대의 원리를 위협한다. 높은 수준의 가계 부채 - 또는 지금 한국에서처럼 가계 부채의 계속되는 팽창-는 사회적 공급의 구조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시사한다.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지배하는 곳 어디에서나, 빚이라는 제약이 주거, 보건, 교육, 일상적 소비에 대한 접근의 방식을 바꾸어 놓고 있다. 동시에 공공 부채는 점점 기업과 금융 기관 들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된다. 국가가 최종 대출 기관이 되는 곳 어디에서나 그 국가의 국민은 최종채무자들이 된다. 새로운 빚[채무l 형식들이 보다 오랜 연대 관계들을 미개척된 이윤의 저수지들로 전환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빚이 있는 곳에, 연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최대한의 연대로 작동하는 사회적 질서가 최소한의 빚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쩌면, 양적인 측면에서 빚의 수준은 상당히 높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점은, 존재하게 될 빚이 공통재(the common good) 의 최대한의 발전을 목표로 함으로써 각 개인의 최대한의 발전이 가능하도록 조직되고 구조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생각은 <공산당 선언>뿐 아니라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자원들을 지급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강요된 결핍보다는 공유된 풍부함의 원리에 기반한 정치적 프로그램이다 ‘우리’ 채권자들과 ‘우리’ 채무자들이 우리의 공통의 목적들에 대해 협상하고 전략을 세우는 한 빚짐(indebtedness)은 연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이바지할 것이다. 

나는 그런 노력들을 뛰어넘어, 빚[채무] 자체의 정치적 재정의를 수행하고, 현재의 빚[채무] 체계를 탈합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과제는 이론적인 논쟁으로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대중적 결의를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이러한 빚을 거부하는 문제가 아니다. 대신 그것은 빚과 함께하는 다양한 삶의 양식들 - 자급자족 상호 의존, 탕감 그리고 재협상- 이 열린, 투명한, 인간적인 척도의 과정 내에 수용될 수 있도록, 빚의 지반을 다시 그리는 문제이다 “빚의 정치”는 최근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더 많은 혁신과 실험 들을 계속 강구해야 한다. 


서론 : 우리가 빚진 모든 것

이른바 전지구적 경제의 ‘금융화'는 금융자본의 작동 그 이상을 내포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모든 경제 활동의 네트워크 재조직화를 즉 모든 지역 시장들 및 분야별 시장들의 전방위적 중층결정을 함의한다는 점이다. 각각은 다른 모든 것과 [서로 관련을 맺는다] ‘시장 신호들’의 통합된, 즉각적인 전송은 모든 거래를 인식할 수 없거나 통제할 수 없는 초국적 변수들에 더욱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환율과 신용 비용(credit costs)에서부터 보조금 패턴과 상품 선물(commodity futures)에 이르는 모든 것에 영향을 받는다 가장 힘 있는 참가자들만이 이러한 이질적이고 미분화된 시간대를 가로지르며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전개할 수 있다. 결정적인 경쟁우위는 사나운 경쟁자들보다 한 발짝 앞서고 오히려 덜 사나운 감독 기구들보다는 두 발짝 앞선 상태를 유지하면서, 특히 최신 금융기법이 발명한 추상 도구들을 통해 자본을 한 경제 지층에서 또 다른 경제 지층으로 조종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자들이 확보한다. 자신들의 포지션을 거는 금융 무리는 오로지 마진을 걸고 차입금으로 지분에 투자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의 경로에 있는 모든 것은 분해되고, 재구성되어, 그 내부에서 경쟁하는 무한히 대체 가능한 가치 덩어리로 취급된다. 거래인들은 최소한의 우위라도 찾기 위해서 화면에 달라붙어 모든 기사를 기회와 위험으로 평가하고, 파멸을 어렴풋이 직감하거나 예감하기 위해 쏟아지는 정보를 걸러 낸다. 역사의 초안 一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 - 은 원 자료의 신성한 평온함을 지닌 채 화면을 이동하며, 금리와 가격의 암호로 축약된다. 나머지 모든 것은 주석에 불과하다.


1. 일생의 단 한 번

빚[채무]들과 의무들이 한층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경제적 전망과 삶의 가능성을 조형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기초적인 의미에서, 빚[채무]은 생산성이나 수익성의 가장 즉각적인 압박으로부터 현재의 자원들을 해방시킴으로써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빚짐은 점점 더 생활 세계에 침투하고 자기 고유의 이미지로 결핍 그 자체를 재형성함으로써, 정해진 순간에 누군가 갚게 되는 빚l채무] 목록 이상의 것을 아우른다. 동시에 빚짐은 내면생활의 우여곡절을 지구적 규모로 투사한다. 마치 경제체계가 선한 양심과 이기적인 본능 사이의 타협을 중개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빚짐은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

사이에 무수히 많은 단락(short circuits)을 구축함으로써, 하나의 온전한 ‘감정의 구조' 같은 것이 된다. 그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다른 존재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삶의 통제를 주장하는 경제적 장치에 더욱 완전히 빚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집합성이 지닌 우려스러운 상황은 맑스가 <자본론>에서 서술한 예리한 관찰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국부(國富) 중 실제로 근대 국가의 집합적 소유로 되는 유일한 부분은 국가 부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농담을 듣고 씁쓸하게 웃을 것이다. 좌우간 자본주의 국가가 집합적으로 소유하거나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공공 부채[빚짐]라니 말이다. 맑스는 분명히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집합적 유대가 어떻게 억압과 수용의 도구로 형성되어 왔는지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지만 집합적 빚짐이 억압의 메커니즘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다양한 협력적 관계들을 생산적, 구성적 힘으로 집결시키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그 통찰력의 변증법적 힘을 놓치게 될 것이다. 자본은 결코 자신의 권력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자본은 사회적 연대라는 자원에 의지할 수 있을 때만 자신의 지배를 획보하며, 이 자원은 지금까지 고갈되어 본 적이 없다. 실제로 ‘국가 부채’로 불리는 것은 필연적으로 개방적인 정치적 커뮤니티의 집합화된 잠재적 부를 포획하는 장치다. 이 잠재적 부의 상징적 전유는 위로부터 발행되는 ‘신용'credit의 형태를 취한다. 이것은 맑스가 기술하듯이 “하늘에서 떨어진” 자본과 같다. 반대로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노동과 삶 모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에 앞서, 그것을 넘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 발생되는 생산성의 싱호 유대를 묘사하기 위해 빚짐이라는 단어가 지닌 특별한 의미를 보존해야 한다. 

따리서 이러한 종류의 빚짐은 그 정의상 신용의 모든 형식들에 선행하며 그것을 초과한다. 신용의 입장에서 보면, 신용은 두 당사자 간의 어떤 모호한 상호 신뢰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생산적 힘들을 축적 메커니즘에 맞게 조정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그 힘들에 대한 재코드화 때문에 가치를 획득한다. 한 집단이 어떤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제나 스스로에게 “빚을 져야” 한다. 다시 말해, 한 집단이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잠재력을 예측하고 동원할 수 있는 항구적인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신용 회로들이 전 세계적인 생산과 공연적 coexistensive 으로 되면, 이제 우리는 전지구적인 빚짐 체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따리서 자본주의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이러한 집합적 빚짐이 일반화된 신용 형태로 표현되는 방식이다. 이것은 개인들과 국가들 그리고 시장들 사이의 관계들을 조형하고 중개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빚짐이 필연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집합성을 재분할하고 분리시킨다. 빚짐이 [무언가를]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신용은 수익을 내는 것이다. 자본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언제나 신용을 취하려고 하지만, 자본의 권력은 축적의 구조들과 빚짐의 잠재력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힘의 가변적 관계들에 매 순간 달려 있다. 그것이 자본은 언제나 자신이 훔쳐 갈 수 있는 만큼만 가치를 가지는 이유다. 자본이 홈쳐 갈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사태의] 전부는 아니며, 그것은 영원히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2. 불평등, 빈곤, 빚짐

머지않아 부와 빈곤의 격차를 측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일종의 분리된 시선을 생산할 것이다 그것은 소비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측면에서 빈자를 바라보고, 축적할 수 있는 것이 매우 풍부하다는 측면에서 부자를 바라본다. 자료가 명백하게 보여 주듯이, 경제 영역은 전혀 하나의 영역이 아니며, 두 개의 상이한 기준치로 분리된 불안정한 적대이다. 한편에서는 생존할 수 없을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살아남는 일의 가격을 정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삶을 지배하기위해 삶을 초월하는 자본의 권력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러한 극단들 사이에서 평등한 교환과 공통의 기반은 있을 수 없으며, 한편에 있는 신용의 명령 구조들과 다른 한편에 있는 빚짐의 망網들 간의 대치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후 이 지점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실제로 세계 경제를 통치하는 책임 권력은 존재히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정치경제를 평등하게 할 집합적 행위자는 고사하고, 평등주의적 정치의 집합적 수취인을 지명하기 위한 정치적 어휘조차 없다. 그것이 오늘날 평등의 원리가 고무하는 해결책들이 박애주의적 십일조에 대한 간절한 애원이나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유의 설교를 낳을 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이다.

어떤 금융 빚[채무]도 그 기능은 어떤 다른 가치 원천에 대한 권리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사전에 아는 것이 불가능한 어느 시점에, 어떤 빚[채무]도 그것을 보장했던 가치와 재산 그리고 능력 - 그것이 어떤 물리적 대상이든, 또 다른 페이퍼 자산이든, 아니면 채무자의 생산 능력이든 간에 - 으로부터 단절될 수 있다. 그 [단절되는] 시점에 빚[채무]은 단순한 금융 협의로 기능하기를 중단하고 새로운 일련의 가능한 의미들을 지니게 된다. 한 극단에서 빚[채무]은 사실상 무한 - 어떤 구제의 전밍도 없이 사람들을 계속해서 통제하는 불가능한 요구 - 할 수 있고 다른 극단에서 빚[채무]은 사실상 공허 - 단호한 거부 행위에 직면하여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텅 빈 명령 - 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빚[채무] 체계는 사람들이 무한한 것에 의해 궤멸되지 않으면서 공허한 것에 의지하는 것을 허용할 뿐 아니라 요구한다. 


3. 영구평화의 경제적 귀결

95년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화폐 권력”이 군대나 동맹보다 더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쟁 수단”이리고 주장한 것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 그는 상비군을 유지하는 능력처럼, 부를 축적하는 국가의 능력이 이웃 국가들에게 즉긱적인 위협으로 기능한다고 경고했다.

칸트는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제안의 일환으로, 외채를 금지히고 금전적인 수단들을 통해 군대를 만드는 모든 국가의 능력을 제한하기를 원했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부과되는 빚[채무]과 함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부과되는 빚[채무]이 있다. 즉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승자의 빚[채무]이 있고 패자의 빚[채무]이 있다. 

칸트처럼 케인스에게 있어 평화에 대한 최고의 전망은 전지구적 경제의 성장에, 즉 개별 국가가 자신의 경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다른 모든 국가들을 돕는 것에 있었다. 자유주의적 상상력이 늘 가고 싶어 했던 길은 거기까지다. 국내에서는 원리상 이기적이지만 해외에서는 접근과 환대를 요구하는 코스모폴리탄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평화유지의 임무를 맡은 탈중심화된 경제 체계와 불균형한 군사력 간의 양립 불가능성에 대해 걱정하는 대신, 우리는 국가 기반 제도들에 기대지 말고 개인적 이해관계와 전지구적 전략을 화해시킬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비영토적 주권의 출현을 상상해야 한다.  

현재 미국의 전략적 기능은 ‘세계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용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우리는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제시한 ‘환대의 권리’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선원들을 환영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라기보다, 그 환영을 모든 곳에 확산시키는 포함砲艦의 환대일 것이다. 


5. 빚짐의 공간

오래전에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은 모든 정신적 빚은 실제적인 피로 쓰여 있다고 주장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첫 번째 책 <안티오이디푸스>는 그 주장을 더 멀리 가져간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주요 짜임들로 조직된, 빚의 역사적 형태들에 대한 연속되는 논의를 발견한다. 첫째, 이른바 ‘미개적’ 체계에서 빚은 피의 복수와 잔혹함을 통해 초래되고 이행된다. [둘째], ‘전제적/야만적’ 체계에서 모든 빚은 신성한 통치자가 지닌 무한한 신용의 시혜로서 행사된다.  (푸코가 ‘주권사회’라고 부르게 될 것은 이 체계의 마지막 국면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체계 - 이를테면 자본주의 - 에서 빚은 마침내 국가 기관에서 벗어나 전체 사회 표층을 순환한다.  과거의 유산은 집합적 비축 또는 직접적 유품이기를 그치고, 대신 자본의 사적 축적의 형태를 취한다. 상호 책임은 수평적 결연 또는 위계적 의무로 얽매여 있기를 그치고, 대신 진동하는 선택적 거래에 종속된다. 이제 빚을 지는 무수히 많은 방식들이 사방으로 그리고 다양한 코드들과 프로토콜들에 따라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이 각 체계들은 고유의 빚의 가시성을 고유한 종류의 사회적 ‘눈’을 생산한다. 모든 그룹 또는 모든 사회를 감독하고, 그것들이 만드는 모든 이미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정말 은유에 불과한 것인가? 모든 경우에서, 사회적 ‘눈’은 혈연과 결연을 계속해서 파악하고, 의무를 부과하며, 지불을 기록하는 일종의 집합적 기억의 기입일 것이다. 첫 번째 체계에서 기억은 고통의 표식으로 신체에 직접 새겨진다. 두 번째 체계에서 기억은 법으로 결정된다. 세번째 체계에서 기억은 화폐의 흐름들 속에서 순환한다. 각각의 형상에서 빚은 권위의 제도들과 지배의 관계들 그리고 교환의 회로들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해석에 의해, 애덤 스미스의 은유 ‘보이지 않는 손’은 자본주의적 체제에 있어 새로운 것을 포착하는 ‘보이지 않는 눈’과 짝을 이룰 것이다.  시장-눈은 모든 것을 감시하면서, 끊임없이 현재 가치value와 잠재적 가치worth를 저울질한다. [그리고] 행동하는 손과 권위 있는 목소리는 화폐라는 적나라한 빛 아래에서만 드러난다.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두 가지 거대한 추상 기계들 - 시장과 미디어 - 은 이러한 기입-투사적 과정의 두 얼굴, 즉 살아 있는 시간성을 불멸의 빚짐의 끝없는 고조와 해소 주위에서 조직하는 것이다. 알렉산더 클루게가 썼듯이 “나머지 시간에 대한 현재의 공격”[이다].

빚짐 체제는 비물질적 추상과 물질적 소비의 시차視差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며, 스펙타클적 금융과 세계사적 쇼핑의 양 극단 사이를 교차한다. 

부의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에 둘러싸인 생활에는 분명 정신분열증적인 것이 존재한다. 우리는 체계 내에서 우리의 길을 전략화하기 위해 체계의 지배를 전제로 삼고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공간의 군주가 됨으로써 자신에게 보상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쇼핑이다.

저자들은 전지구적으로 개인당 평균 4평방피트의 소매 공간이 있다고 계산한다. (언제나 세계의 선두 주자인 미국에는 개인당 31평방피트가 있다) 무분별히케 퍼져 가는 택지 분할이나 반쯤 빈 고층건물보다 훨씬 더, 쇼핑 공간들의 완전한 확산은 빚짐 체제의 물리적 확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개인 주체들은 군림하는 화폐 권력에 충성을 다하도록 활력화된다. 쇼핑은 소비주의의 기본 모순을 수용하여, 빚진 상태를 견디는 방법을 제공하고, 끝없는 의무를 순간의 즐거움으로 전환하며, 일개 개인은 접근할 수 없는 집합적 초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필수품 및 사치품의 빚[채무]으로의 전환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에서, 쇼핑 공간들은 일상생활의 각 운동을 교환 가능성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자극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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