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2025.10.] 단단담담: (1) 좋은 이웃이 되는 법

빈고게시판

안녕하세요. 최곰입니다. 빈고 식구들께 조금 낯선 이름이겠어요. 위임으로 총회 출석을 대신해 온 저의 빈고 10년, 주요 활동이라면 뉴스레터 및 회의록 탐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극적 덕질이랄까요.
E인 줄로만 알고 살아왔던 세월을 매몰 비용으로 털어넣고 나니 꼭 서울에 살아야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남더라고요. 서울살이 20년을 뒤로 하고 다시 한번 낯선 땅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지금은 강릉의 작업실과 바다에서 이야기를 쓰고 팝니다.

단단담담은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의 짤막한 일상을 담은 글입니다. 가끔 누군가(무언가)를 목격하거나 관찰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읽는 분께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 보는 쫌쫌따리 즐거움이 되기를, 쓰는 저에게는 긴 호흡의 느슨한 규칙 하나가 생겨 이내 자리잡기를 빌며. 10월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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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담담: (1) 좋은 이웃이 되는 법

오늘도 영동크리닝 사장님이 부지런히 탑차를 운전해 곳곳에서 걷어온 빨랫감을 구르마에 잔뜩 실으시고는 읏, 읏, 하며 힘주어 밀고 작업실 앞을 지나간다. 습관처럼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 사장님도 예예, 하며 인사를 받아주시는데 내가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반말을 하는 일이 한번도 없는 어른이다. 식사 하셨어요,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요, 이렇게 늘 존대해 주시고 인사도 맞절처럼 하시는 분이라 내가 조금이라도 더 허리를 굽히려면 코어에 힘을 주어야 한다. 몸이 올라올 쯤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것까지 해야 인사가 끝나기 때문에 방심해서는 안 된다. 뒷걸음질로 꾸벅꾸벅을 몇 번 더 하고 들어와야 끝이 나는 이 매일의 인사가 참 즐겁다.

교동면옥은 겨울에는 만둣국과 칼국수를, 여름에는 냉면과 콩국수를 주메뉴로 하는 노부부 두 분이 꾸려가는 자그마한 가게다. 자가소유의 건물 1층에서 하시는 가게라 큰 부담 없이 쉬엄쉬엄 운영하신다는데 사장님의 오래된 자전거는 부지런히 시장과 가게를 오가며 식재료를 실어다 나른다. 교동면옥 사장님은 내가 처음 작업실을 열었을 때 며칠 간 건물 주위를 이렇게 돌면서 한참을 밖에서 나를 관찰하시더니 어느날 화분에 물 주느라 문을 열어 둔 틈을 놓치지 않고 “거 여기는 뭐하는 데요?” 하고 말을 건네셨던 분이다. 누구신지 되묻기 전에 일단 허리 숙여 인사를 했는데 그때 뭔가 인상이 좋으셨던지 이후로 늘 건물 주위를 둘러보시면서 누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치워 주시거나 아무렇게나 던져진 일수명함 따위를 주워 주셨다.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지만 그냥 운동 삼아, 하시며 아무렇지 않게 슥 사라져버리는 교동면옥 사장님. 미소에도 여유가 있는 분이시다.

물론 여름이 오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교동면옥의 스테디셀러, 맷돌콩국수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일단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여름에 콩국수 하면 교동면옥이고, 해병대 전우들은 의리로라도 주기적으로 늘 들르는 데다 교회 식구들도 수시로 오시기 때문에 이분들만으로도 이미 문전성시다. 사실 이 동네에 밥집이 워낙 한정적이라 바쁠 때는 이웃들도 한끼 식사로 사먹기 좋아서 맛이 썩 좋지 않더라도 그럭저럭 돌아갈 법한 가게인데, 이 콩국수를 어찌나 옛날 방식으로 잘하시는지 그만 맛까지 있어서 여름엔 정말 발 디딜 틈이 없는 집이다. 겨울이나 봄처럼 가게에 좀 여유가 있을 때에는 명함을 주우시다가 날더러 여기 나와서 꽃을 좀 보라며 이끌기도 하시고 식물 잘 키우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이 없다면서 넌지시 칭찬도 해주시는 분인데, 여름에는 콩국수를 먹으러 가서도 여유로이 인사나누기 쉽지 않다. 여름의 교동면옥은 동네맛집으로의 정체성이 더 강해진다.

지난 겨울 강릉에 대폭설이 내렸을 때 나는 내심 기뻤다. 군인 간 선후배들에게 지겹게 들었던 강원도 겨울 눈올 때 삽질한 이야기를 드디어 나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집에서 나오는 길에 눈삽을 두 개나 사서 겨우 작업실에 도착했는데, 이런… 가게 앞 도로에 쌓인 눈 대부분을 영동크리닝과 교동면옥 사장님께서 이미 치워주신 게 아닌가. 삽을 들고 허둥지둥 뒤뚱거리며 오는 나를 보면서 사장님 두 분이 웃으시는데 나는 어쩐지 분해졌다. 제가 와서 치우면 되는데 이 많은 눈을 다 치워주시면 어떡하냐고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눈 많이 남겨 놨으니 걱정 말라고, 얼른 와서 삽으로 떠서 저만치 밀어 놓으라면서 또 웃는 두 분. 김샜네. 이거 뭐 삽질 할 거나 있나. 입이 댓발 나와서는 내 몫으로 남겨진 눈을 삽으로 뜨다가 깜짝 놀랐다. 눈이 이렇게나 무겁다니… 삽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따뜻한 남쪽 나라 태생의 내가 강원도의 악명 높은 젖은 눈을 요령껏 치울 수 있을 리가. 금세 팔이 후덜거리고 등짝이 뻐근해 왔다. 어찌저찌, 그러나 두 분 덕분에 매우 빠른 속도로 눈을 정리하고 나서 이웃집 커피에 시럽을 두번 넣어 다시 사장님들을 방문했다. 뭐 이런 걸 다 가져오냐며 두어 번 사양을 하셔야지만 의도대로 커피를 전해 드릴 수 있는데 그래도 그쯤은 되어야 내 분한 마음도 가라 앉는다. 텃세다 뭐다 처음부터 힘든 이야기만 듣기도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강릉에 잘못 온 건가 후회할 때도 있었지만 두 할아버지 사장님의 관심과 사랑 덕분에 그래도 조금씩 동네 사람이 되어 갈 수 있었다.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그러니 나도 두 분께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마음은 어쩌면 복수심에 가깝다.

영동크리닝 아주머니의 부재로 한달 여간 사장님의 파트너가 되어 빨래를 갠 일은 두고두고 즐거운 일이다. 영동크리닝의 빨래는 숙소에서 오는 이불처럼 덩치가 큰 것들이라 두 사람이 마주 잡고 박자를 맞추어 찹- 찹- 하고 개어야 한다. 박을 잘 타면 마치 왈츠를 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장님과 내가 함께 빨래를 개는 모습을 본 교동면옥 사장님이 “아니 어디서 이런 좋은 직원을 얻었어?” 하시며 웃고 돌아가시는데 어쩌면 나도 두 분께 조금은 믿을 만한 젊은이, 괜찮은 이웃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말이 어쩐지 어색해서 꾸벅, 인사로 대신했던 그 찰나의 순간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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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면옥
교동면옥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강릉대로210번길 5-4
추천메뉴 (여름)맷돌콩국수 (겨울)떡만둣국


*영동크리닝은 이전을 앞두고 계신 관계로 정보를 생략합니다.

11빈고게시판
최곰

댓글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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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파람

    이리 다정한 글 연재라니 반갑고 환영합니다. 더군다나 저도 사랑하는 강릉 소식이라 더욱 반갑고 설레요. 교동은 오래되고 독특한 한옥이 많아 저도 참 좋아하는 동네인데 여름의 교동면옥은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 읽다가 궁금했던 부분이 있는데 알을 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대구의 알은 아들, 부산에서는 깔본다 정도로 알고 있는데..ㅎ

    • 최곰

      안녕하세요, 이파람! 낯익은 이름에 반가움을 더해 인사합니다. 오타는 얼른 고쳐두었습니다! 😀

      • 이파람

        으핫. 의외의 오타였군요?! 🤣 교동면옥 정보도 올려주시고 친절한 안내 고맙습니다!

  • 우마

    단단담담 연재, 기대됩니다. 🙂
    도시에서 좋은 이웃이 되질 못하는 것 같아서.. ㅠ
    글 감사해요!

    • 최곰

      안녕하세요, 우마.
      큰 도시에서는 누군가의 이웃조차 쉽게 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맞아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 람RAHM

    왠지 모르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아이보리 색 린넨의 질감을 손으로 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글을 읽어 내려왔어요. 최곰님의 강릉이야기, 사람이야기가 정갈한 듯 구수한 듯 마음에 연한 향을 남겨주네요. 다음 연재 기다리고 있을게요. 기분 좋은 순간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 최곰

      안녕하세요, 람. 기분 좋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응원 덕분에 10월을 조금 더 단단하게 살아야겠어요. 11월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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