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2025.12.] 반바지의 운영활동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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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숱한 일들을, 그것도 당장 해야 할 시급한 일도 제쳐두고 어쩐지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꼭 바쁘고 분주할 땐 가장 안 급하거나 덜 급한 일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 때문인가요..?

어쩌겠어요, 이런 나인 것을..

 

어느 순간부터 불편함의 지점이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달라졌다, 라고 딱 부러지게 말씀드리지 못하는 건 과거의 불편과 지금의 불편이 여전히 만나는 지점이 있고,

그럼에도 나의 기준점이 달라진 것 같다는, 말 그대로 ‘느낌적인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저는 점점 더 생활 속 작은 것들에 더 많이 불편함을 느끼고 분노합니다.

회사 체력단련실이나 동네 헬스장 탈의실에서 헤어 드라이기로 ‘헤어’가 아닌 다른(…) 것을 말리는 사람을 볼 때 화가 납니다.

(운동할 때 신은 양말을 드라이기에 끼워 말리는 사람을 보고 저는 정말 집에서 드라이기를 가져와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운동할 때 주변 사람의 동선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자기 내키는 대로 다니는 회원을 보면 짜증이 납니다.

나는 저 사람이 단일 기구로 세트 진행하는지, 두 개 이상 기구를 묶어서 슈퍼세트로 진행하는지 유심히 지켜보며

기구를 선택하거든요. 혹시라도 그 사람의 세트 구성을 방해하고 싶지 않고, 나 역시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예를 들다 보니 운동하는 상황만 나왔는데, 꼭 운동할 때만 예민한 게 아닙니다.

전철을 탈 때 먼저 내리고, 그 다음에 타는 건 제가 사는 세상에선 너무나 당연한 상식, 아니 거의 헌법 수준의 원칙입니다.

저의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승객을 보면 저는 단호히 단죄합니다.

그래서 제가 내리기도 전에 밀고 들어오는 사람을 저는 그대로 밀고 나갑니다.

 

부모님 댁에 갈 때 공항철도를 애용하다 보니 대형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승객들을 많이 봅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의 캐리어 소지법, 혹시 알고 있나요?

내려갈 땐 반드시 내 등뒤에, 올라갈 땐 내 앞에 놓는 것이 기본입니다.

혹시라도 에스컬레이터가 급제동하거나, 다른 사람이 캐리어를 밀쳤을 때 굴러떨어지는 걸 막기 위함이죠.

에스컬레이터 곳곳에 안내문구가 있음에도 내려갈 때 앞에 두는 사람들이 많아요.

(희안하게 올라갈 때 뒤에 두는 사람은 잘 없더라구요? 🧐🤔)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아마도..?)

나이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갔던 작고 하찮은,

사람들의 무심함을 더이상 무심하게 넘기기 싫어집니다.

네, 더 솔직해질게요. 예전에도 무심하게 넘기진 못했어요.

다만 잘 참았을 뿐이죠.

인내심이 바닥난, 마흔네 살의 저를 어쩌면 좋을까요.

 

반대로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은 점점 모호해져 갑니다.

예전엔 그러려니 넘기지 못했던 PC함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 싶을 만큼 유연해졌습니다.

무엇을 위한 올바름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을 때도 있고,

흑백으로 딱 잘라 바라보기 어려운 점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엔 되는 것과 안되는 것,

용납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그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지만

그 경계가 흐릿하고 모호해지는 일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면서

그것을 판가름하고 마음을 정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피하고 싶어집니다.

 

나 홀로 산다면 그 어려움을 적당히 회피하며 살아볼 수도 있겠지만

어디엔가 속하고 무언가 함께 하길 좋아하는 제게 그건 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 어쩌라는 거냐..

딱히 뭘 어찌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였어요.

 

한 해의 마지막 편지를 이런 푸념으로 끝내고 싶진 않았는데

딱히 이런 이야기 어디 가서 털어놓을 곳이 마땅치가 않네요.

보는 사람도 있지만 안 보는 사람은 더 많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으로,

동료 조합원 여러분의 선의에 기대어

참 작고 하찮은 푸념을 늘어놓아 봅니다.

나이를 먹으니(..) 점점 누군가에게 푸념을 늘어놓는 것도 어려워지거든요.

 

빈고 동료 조합원 여러분에게도 이런 작고 하찮은 푸념,

딱히 각 잡고 말하기엔 좀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있다면 한번 주절주절 남겨보세요.

이거 생각보다 후련합니다. (다만 해결은 나의 몫..)

 

ps. 더 나이가 들어 언젠가, 더이상 그 피로감을 견딜 수 없을 때가 온다면

저는 어떻게 할까요?

 

 

대전 소제동 골목에서, 아마도 올해 제가 본 마지막 단풍!

 

날이 좋아서 야외에서 커피도 마실 수 있었던, 아마도 올해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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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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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마

        개인적으로, 선과 악의 분별이 어려워졌다는 후기를 좋아하는 편이고요. 공용 드라이기로 다른 곳을 말리는 것에 대해 발끈하시는 모습이 너무 재밌었어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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