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고 성인지팀의 상반기 활동을 평가하고 이후 계획을 세우면서, 올 하반기에는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에서 페미니즘 책읽기 모임을 해보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빈고에서 젠더폭력 사안에 대응하면서 스스로 배움이 좀 더 필요하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첫 시작인 9월 모임은 날짜를 추석 연휴 전날로 급하게 잡느라 홍보를 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냥 다음 달부터 하자고 할까?’ 하는 마음속 유혹을 이겨내고, 일단 성인지팀 멤버들끼리라도 모이기로 했다. 드넓은 페미니즘 도서의 바다에서 어떤 책을 건져 올려 읽을 것인가 생각하면 책 선정이 난망해지지만, 공동체/조직 내 성폭력 대응이라는 주제로 좁히고 보니 의외로 책이 많지는 않았다. 한국 사회 미투 흐름의 초기로 돌아가 『김지은입니다』를 읽어 보기로 했다. 한번 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말았던 책이다.
막상 책을 펼쳐 드니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오해와 몰이해를 깨는 책이었다. 뉴스룸에 출연했던 김지은 씨의 모습은 의연하고 차분해 보여서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구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미투를 하기까지 그가 거쳐 왔던 상황과 재판 이후까지 감수해야 했던 위험과 적대는 나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당사자의 수기가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 있다니. 김지은 씨에게 감사하면서도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조직적으로 진행된 2차 가해는 ‘고학력 엘리트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웠다. 김지은 씨는 자기 주장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의 의사에 반하는 성폭력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실제 그는 당이라는 강한 결속이 요구되는 조직의 구성원이자 도청 비서실이라는 일터의 노동자로서 미세한 것까지 통제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권력형 성폭력이 얼마나 쉽게 일어날 수 있고 또 무서운 것인지 납득이 갔다. 안희정 개인의 잘못을 넘어, 제왕적 권력을 만들어내고 성폭력을 일상화한 조직과 이를 묵인한 일터의 문제였다는 것을 그간의 상황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미투 이후에도 김지은 씨는 힘든 상황 속에서 싸워야 했다. 나는 이것이 전국적으로 이슈가 될 만큼 큰 사건이었기에 조력자나 연대자들과 힘을 합해 잘 싸우고 있는 줄만 알았지 그가 혼자 감당해야 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헤아리지 못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잘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일상적인 만남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는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몫’이라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대목은 김지은 씨로부터 피해 사실을 듣게 된 선배 한 명이 “도와줄게”라고 말한 것이었는데, 나라면 어떤 말을 했을까 생각해 봤다. 아마 나라면 “어떻게 하고 싶어?”라고 했을 것 같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고 싶어?” 이전에 꼭 “도와줄게”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지은입니다』를 읽으며, 나 역시 막연히 피해자를 지지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처한 현실을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은연중에 선입견을 갖거나 구체적인 연대로 나아가지 못했을 수 있음을 돌아보게 됐다. 또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여러 성폭력 사건을 접하면서 피해자의 입장을 깊이 생각하고 공감하는 과정은 건너뛴 채 사건 처리 절차의 정당성만 따지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런 기본적인 태도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 부족한 게 많은 초심자(?)로서 이런 생각을 솔직하게 나누고 피드백 받을 수 있는 책읽기 모임 자리가 무척 고마웠다. 함께 까페에서 따뜻한 음료를 시키고 책을 꺼내는 것 자체만으로 뭔가 설레는 경험이기도 했다. 10월에는 『작은 조직에서 성평등 약속문 만들기』를 함께 읽기로 했는데 좀 더 많은 분들과 함께하면 좋겠다.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성평등 규약을 만든 전 과정을 돌아보며 만든 책이라고 한다. 작은 책이지만 구체적인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벌써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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