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契, 친목과 협력의 모둠살이>
화폐 세미나 2011. 10. 31
이경
만행공간이 출자금 250만원으로 옥탑방에 자리를 잡은 것이 2009년 5월이다. 이때 선생님 두 분을 모셔서 저녁을 함께 먹었는데, 그 분 중 한 분이 공동체라는 거창한 말을 하지말고 계모임이나 한번 잘해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만행에 모인 친구들은 ‘공동체’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있었고, 공동체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너네 모임은 계모임에 불과하다, 아니 계모임보다 느슨하다, 계모임이나 잘 꾸려 봐라는 말이 서운했다. (이때 기록을 더듬어보니 이 일이 있은 후 하루 동안 무려 13통의 메일이 오갔다. 서운했다는 친구도 있고, 이렇게 '서운했다'부터‘나이스’하다는 반응까지.) 공간을 꾸린지 3년 정도가 지난 지금, 공동체라는 단어는 떼어내고 ‘계모임’으로 가는 방향이 맞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때 한 분이 그랬다. 이 공간은 1년도 안 되어서 문을 닫을 거라도. 월세가 밀려서 결국은 공간유지도 못 할 거라고. 1년간 공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공간은 1년 뒤에 출자금이 1000만원으로 불어났고, 동굴 같지만 방 2칸짜리로 이사도 갔다. 불어난 돈 만큼 함께하는 친구들도 늘었다. 그런데 또 한 번의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온 것 같다. 이사한 집은 여름 장마철이 되면 비가 샜다. 월세를 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이사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을 하다 새로 집을 얻기 보다는 ‘빌붙기’를 하기로 결정을 했고, 어찌하다 장충동에 비집고 들어갔다.
이제 고민은 나도, 너도 주인이었던 아지트였던 공간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곳이 되어버려 중심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공간에 주인의식을 갖고, 공간을 이용하고 관심 갖던 사람들에게 공간이 없어졌다는 건 큰 의미로 다가온다. 관계를 이어주던 공간이 실질적으로 없어졌기에 이제 각자 출자한 출자금이 중심이 되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출자금을 중심으로 관계를 이어가고, 공동기금의 형태로 만드는 것에 동의가 된다면 다시 중심이 생기지 않을까.
이때 생각했던 것이 신협이었는데, 신협은 너무 크고 지금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쉽게 ‘계모임’을 떠올렸다. 계모임이면 쉽고, 부담 없이 가뿐하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참에 계契에 대해 알아보면 좋겠다 싶었다. 미루고 미루다 화폐 세미나 반에서 계契에 대해 조사해봤다.
같은 공간, 지역에 사는 사람은 문화적인 부분을 이어받기 마련이다. 아무리 서양의 철학과 글들로 이론이 무장되어 있어도, 사람, 음식, 의복, 사고방식 등등과 관계 맺는 건 공간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협동조합, 공동체의 사례를 보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이어져 내려왔던 상호부조의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늘상 생각해왔다. 우리는 왜 가까운 것에서는 배우지 못하는가하고 말이다.
메일을 뒤지다보니 만행 공간을 드나들며 한 친목계의 도움을 받은 기록이 있다. 10명 정도의 친구들이 원주로 초대를 받았다. 친구 아버지가 숙박비, 식비를 모두 지원해주시겠다고 했다. 부담스러워하자...
“아버지께서 돈을 내는 거에 대해서 여러분께서 부담스러워 하실까봐 간단히 설명을 해드리면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시골 어른들 친목계라는게 함께 모여 놀거나 어려운 일 있을 때 돕는 모임인데 그 안에서 계원들끼리 돈이 돌기도 하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대학원 졸업식을 할 때 친목계원 중에 한 분이 내게 10만원을 주셨다고 하면 언젠가 그 분께 경조사가 생겼을 때 10만원을 드리는 형태예요. 쓰이는 돈은 없지만 마음과 기분은 서로 돕는 거지요. 이번에 우리가 묵는 곳이 부모님의 친목계원이 운영하시는 곳인데 10만원을 내시는 건 친목계원으로서 다른 친목계원의 장사를 돕는 거예요. 그리고 이 돈은 나중에 우리 집에 일이 있을 때 돌려받게 될 거예요."
이렇듯 계契는 아직 살아있다. 한국 곳곳에 숨쉬며 살아있다. 역사적인 문헌에서는 고려 시대의 향도가 계契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단다.
<계契, 친목과 협력의 모둠살이> 간략한 정리로는...
* 계 - 인간적인 신뢰가 전제, 상호신뢰가 기본
- 사람들 사이에 인연이나 관계를 맺는 것. 개인이 아닌 사회적 연대와 약속의 뜻 함축.
- 상호부조 + 식리(殖利:이익을 늘리는)를 목적
- 순수한 경제적 이익이라 할 수는 없더라도 사회적 공동체를 매개로 한 경제적 결속
- 상호부조 = 인적부조(노동력 부조) + 물적부조(식리계. 계원들이 일정한 자금을 출자 하고 이를 종자돈으로 대부업을 하여 발생하는 이익을 계원들이 분배받는 것. 일제시 대로 넘어오면서 활성화 됨. 서민들에게 일종의 사금융 역할)
- 주고받음의 정신에 기초한 호혜의 대표적인 문화.
- 여기서 주고받음 정신이랑 공평의 분배원칙.
재물을 거둬들이고 분배함에 있어 누구에게도 이익이 전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모든 계원은 공평하게 적립액을 불입하고, 계주는 이를 공평하게 분배한다.
- 여타 공적 조직과 달리 오직 신뢰만으로 간편하게 결성,
유지되는 사적 조직의 대표적 문화.
* 친지들로 구성된 족계를 살펴보면(<계契, 친목과 협력의 모둠살이> p. 26~27. 참고)
* 계와 두레의 차이
- 공통점: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자발적인 조직
- 차이점: 두레는 직접적으로 생산을 담당하는 협동조직
노동공동체이기 때문에 구성원들 사이의 위계와 역할 분담 체계 명확
일반 양민이나 노비들
계는 생산을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예가 드뭄 / 역할 분담 느슨 / 위계관계 엄격하지 않음 / 여러 사회계층 포괄 / 자율성
* 상포계
- 상포계라 할라치면 수입과 지출 사항 확인과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절차가 끝나면 기다 렸다는 듯 둘러앉아 막걸리 잔 속에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질펀하게 풀어놓음..
- 계산보다 연대가 먼저
- 온갖 사회보장제도가 우리네 삶을 거미줄처럼 보호해준다는 오늘의 현실에서 전통시대 계의 향기가 뜬금없이 살갑게 다가옴.
- 가장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이웃끼리 서로 상부상조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음.
- 이웃끼리 서로 상부상조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
- 계원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른 마을 혹은 타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길 경우 무조건 탈퇴 하는 것을 원칙
- 무본전출계사. 가입 당시 출원한 입회비를 상환하지 않는 조건이 있음. 상이 발생하면 계원 전원이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함.
- 만약 참석하지 못할 경우 대리인을 보내도록 함.
- 상포계는 최소 13명이 있으면 시작할 수 있음.
-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구입하여 사용.
- 계원들은 곡식이나 푼돈을 모아 공동기금을 마련함.
- 상포계에서 식리계로 발전하는 사례도 있음.
창설당시 계원들로부터 각출한 입회비를 종자돈으로 삼아 계원 공동 소유의 토지와 임야 를 매입하여 현전하는 사례 발견. 토지에서 거둬들인 수익은 계의 자본으로 충당되고, 토지는 계원에게 경작하게 하여 토지사용료를 받아 계의 재정을 늘림. 133~135쪽 참고.
* 쌀계
농촌지역 쌀계. 매달 계원들로부터 정해진 분량의 백미를 모아서 순번대로 받아가는 것. 이후 백미가격의 현금을 주고 받는 형태로 바뀌게 됨.
- 고리대금업자의 손아귀를 피할 수 있는 안전장치 -> 금융기관의 발달로 점차 여성의 식리계를 목적으로 이뤄짐 (1938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480여 종의 계)
19세기말 개항을 거치면서 이전부터 존재해오던 상당수의 계들이 소멸하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계가 출현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농민이나 도시빈민의 경제적 궁핍화가 더욱 심해짐. 상당수의 동계가 계를 해산하고 계원들에게 계전을 분배했다. 1908~1909년 경에는 일제 통감부에 의해 공동재산 조사사업이 실시되었다.
은행의 문턱이 여전히 서민에게는 너무 높은 것. 반면 계에서는 곗돈을 탈 때 담보를 요구하지 않는다. 서로의 안면과 신용에 기반하고 있음. 은행에 비해 이자도 싸고 상환기간도 길뿐만 아니라 매달 일정한 곗돈을 불입하는 형태로 분할 상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아울러 계는 융자와 변제의 절차가 간편할 뿐아니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누구든지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계는 그 설립이 용이하고 일종의 부채인 곗돈 수령을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으며, 계원 전원이 순번에 따라 융자, 즉 곗돈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