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은행전환의 날 Bank Transfer Day 관련 소식을 전한 적이 있었는데...
같은 맥락에서 영국 사례를 중심으로 설명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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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빈부격차 심화와 금융기관의 부도덕성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미국의 월가 점령시위는 73일 만에 막을 내렸지만, 빈부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남겼다. '1%의 부자에 저항하는 99% 미국인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구호가 상징하듯,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누적된 상대적 박탈감과 일반 서민들의 피폐화된 삶이 이번 시위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점령시위대가 활동 재개를 선언한 가운데, 미국에서는 메인 스트림(main stream)으로 상징되는 월가의 대형 금융기관에 맡겨놓은 돈을 지방의 소규모 은행과 신협 등 지역 기반의 금융기관으로 옮기자는 캠페인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몇몇 민간 비영리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고 있는 ‘계좌를 옮깁시다(Move your money).’ 운동은 많은 이들의 호응 속에서 지난 18개월 동안 400만 개가 넘는 개인계좌를 이동시켰으며, 이 숫자는 향후 2년 내 1,200만 개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다. 영국 시민사회는 2012년 3월을 계좌 변경 집중 기간(MYM month)으로 선정하여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영국 협동조합 연합회의 에드 마요(Ed Mayo) 사무총장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지금의 경제 질서를 바꾸기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당신은 이 캠페인에 동참함으로써 새로운 공정거래(fair trade) 질서를 창출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계좌 변경 운동은 평범한 시민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캠페인이다."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촉구하고 있다.
대형 금융기관에서 돈을 빼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탐욕적인 금융자본에 돈을 맡기는 것은 그들의 배만 불려주는 일일 뿐, 금융소비자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은행이 파산하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커서 살릴 수밖에 없다는 ‘대마불사 신화’(too big, to fail)는 결국 은행가들만 좋게 하는 바보 같은 짓이며, 따라서 이 잘못된 질서를 바꿔 착한 금융기관에 돈을 맡김으로써 보통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운동을 이끌고 있는 영국 시민사회에서 계좌 변경처로 추천하는 '대안 기관‘은 어디인가? 빈곤완화, 유기농업, 지역개발 등 지속가능한 사회발전을 위해 투자하는 트리오도스 같은 윤리은행(Ethical bank), 내셔널와이드 등 50여개의 사회 재건기구(Building societies), 영국 전역에 걸쳐 600여개에 달하는 신용 협동조합(Credit unions) 그리고 주로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사회의 복원을 위해 자금을 지원하는 지역개발금융(Community development finance institutions, CDFI)등이 그 대상들이다.
"계좌를 옮기세요.“ 운동 홈페이지 (www.moveyourmoney.org.uk)
그렇다면 사람들이 윤리은행과 지역 금융기관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객을 위해 봉사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익 추구와 단기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주류의 ‘금융업자’들과 달리, 이 착한 기관들은 금융의 순기능을 통해 사람과 마을, 지역과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힘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수 년, 혹은 수십 년 동안 이 금융기관들은 손실이 예상되는 투자를 위험이 아니라 기회로 바라보면서,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한 개발 자금을 투입하고 사회적기업 등 공익적 가치를 추구하는 조직의 성장,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인내 자본(Patience capital)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돈벌이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이 금융기관들 가운데, 특별히 지역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인 지원을 하는 곳이 바로 지역개발금융기관(CDFI)이다. 영국의 경우 전국적으로 총 62개의 CDFI가 존재하는데, 상용고객 숫자가 25,000명이며 지금까지 이들에게 총 1조 3천억 원의 여신을 제공했다고 한다. 2004년에 2,700억에 불과했던 자금 대여 실적이 영국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7년 만에 5배로 증가한 것으로 볼 때, 향후 규모는 계속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 CDFI 성장추이 (A new vision for community finance, cdfa / 2011)
자금 지원 대상 및 사업영역도 다양하다. 2011년도를 기준으로 1,500개가 넘는 소기업들이 CDFI의 지원을 받았으며 약 5,000억 원의 자금이 사회적기업 등 제3 부문에 투입되었다. 주류 금융시장에서 퇴짜를 맞은 저신용자들을 위한 대부금 규모도 300억 원이나 된다. 금융 접근도가 현저히 부족한 사회적경제 조직들과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역주민들을 위한 ‘대안 금융’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2011년도 CDFI 주요실적 (A new vision for community finance, cdfa / 2011)
우리는 어떠한가?
지역 이름을 앞에 붙인 금융기관은 넘쳐나지만, 지역사회와 사회적 경제 영역에 자금을 지원하는 사회적 금융기관(Social finance institutions)은 잘 보이지 않는다. 중소상인이나 서민들의 자립 자활을 위한 소액대출(Mocrocredit) 사업은 존재하나, 피폐화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고 마을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한 발전기금은 없다. 지금 우리나라 금융기관 가운데 윤리은행이나 지역금융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금융의 사회적 책임과 가치 창출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곳이 있기는 한 것일까?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해 시중은행과 특수은행을 합친 국내은행들의 당기순이익은 총 12조원으로, 특별이익 발생 및 대손비용 감소로 인해 사상 최대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덜 주고 많이 받는 방식으로 벌어들인 이자수입(예대 마진)을 포함하여 각종 수수료 수입 등 은행이 거둬들인 수익은 어디서 생긴 것인가? 모두 고객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은행들은 자신들에게 많은 이익을 안겨준 국민들과 중소기업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해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해왔는지 되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등 사회적경제 생태계 조성에 대한 지방정부, 자치단체들의 관심이 매우 뜨겁다. 공공과 민간이 해결하기 힘든 사회적 틈새를 메우고, 다양한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영역인 제3 부문(Sector)을 성장시켜 협치의 하모니를 이루어 나가는 일은 이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사회적기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들린다. 대기업 중심의 승자독식 체계 속에서 ‘가치와 수익’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사회적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기란 너무나 힘든 게임이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지난 5년간의 성적표가 말해주듯, 실제로 신생 사회적기업이 망하지 않고 성장을 지속해가기란 여간해서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할 점이 있다. 사회적기업의 지속가능 여부를 제도적 지원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회적 인프라를 무시한 채 개별 사회적기업의 생존을 오직 그들만의 문제로 치환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이 주제는 ‘사회적기업의 성장 단계에 맞게 효과적인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또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원 시스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기능 중 하나가 바로 ‘금융’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혁신기업, 지역 공동체 기반의 마을기업, 최근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조직을 키우고 성장시키려면 영국과 같이 제 3섹터 기관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고, 금융 이익(financial return)보다 사회적 가치(social return)를 우선시하는 사회적 금융기관들이 많이 생겨야 한다. 아울러 '소셜 임팩트본드'와 같은 혁신적인 금융상품을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모델을 만들고, 주요한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자금을 지원하는 사회투자시장(social investment market)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악마의 금융에서 착한 금융으로, 사적 금융에서 사회적 금융으로의 ‘금융혁신’을 추진하는 것은 주체와 객체가 따로 있는 일방의 게임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풀어가야 할 공통 과제이며, 금융이 가진 본래의 목적과 순기능을 통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를 좀 더 밝고 희망찬 곳으로 바꿔나가기 위한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월가에서 시작된 점거시위를 포함하여,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계좌 이동 캠페인은 탐욕적인 금융자본에 대한 시민사회의 집단 거부운동이며, 1%의 이익을 위해 작동되는 작금의 그릇된 금융 구조가 99%를 위해 새롭게 거듭나지 않는다면 거대한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이다.
글_문진수 사회적경제센터장(mountain@makehop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