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앙드레 고르
2018년 11월 13일 스물한 번째 책읽기 모임은 레드북스에서 지음, 정훈, 졔졔 세 명이 참여하였습니다.
이번 책읽기 모임에서는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의 1장 3절과 4절 일부를 읽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에 다들 많이 공감하였습니다. 다음 주에는 이 책의 후반부를 읽을 예정입니다.
*Proletariat와 Proletaire에 대한 한글표기에 대해: 전통적인 방식의 한글표기가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인 반면에 번역자는 프롤레타리아와 프롤레테르로 표기하였습니다. 이는 프랑스어 원음을 존중한 표현인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번역자의 표기를 따랐습니다.
1장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3절 ‘자본’의 복제품 프롤레타리아
45p. 프롤레타리아화는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 노동자들의 독자적 능력이 파괴될 때만 완성된다. 노동자가 특정 생산활동을 펴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소유하는 한, 채소를 가꾸거나 닭을 키울 수 있는 땅을 조금이라도 소유하는 한, 그에게는 프롤레타리아화하는 일이 일시적이고 변경 가능한 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변경은 실존적으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프롤레타리아화에서 벗어나는 것, 어느 날엔가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 저축한 돈으로 소박한 농가를 사는 것, 은퇴한 이후에 필요한 것들을 손수 만드는 것이 분명 가능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진정한 삶’은 다른 데 있고, 단지 지금 운이 나빠 프롤레테르로 있을 뿐 계속 나은 미래를 기대한다.
수공업자 혹은 농부로서 ‘독립적인 삶’을 꿈꾸게 하는 이런 개별적 독자성이 부분적으로만 존재한다 할지라도, 노동자가 프롤레테르들의 사회적 운명체인 프롤레타리아와 자신을 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일에, 곧 ‘계급의식’에 장애가 왼다. 의식적이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의 삶 속에 적게나마 그러한 독자성을 경험하도록 독립공간을 만들어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46p.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투사들이 프티부르주아의 개인주의가 노동자에게 남아 있는 거라는 이유로 개별적 독자성에 대한 욕망을 없애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독자성에 대한 욕망은 ‘과거지향주의자의 향수’ 혹은 ‘속이 훤히 보이는 속셈’이다. 그러한 독자성은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것, 물레나 풍차방앗간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프롤레타리아에서 혼자서만 벗어나기를 바라는 프롤레테르는 부르주아지 권력층을 쫓아내고 계급사회에 종지부를 찍을 프롤레타리아의 능력과 모든 프롤레테르가 단결할 때만 프롤레타리아가 가질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을 매우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47p. 실존적 필요들이 갖는 상당한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정치적 정언에 종속시키려 한다면, 그 필요의 최소한의 발현조차도 반드시 큰 정치적 이탈이나 배반으로 간주하고 지속적으로 탄압하게 된다.
이러한 탄압은 계급을 토대로 형성된 정치-조합주의적 조직, 즉 구성원이 대부분 독자적으로 노동할 능력을 상실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조합주의적 조직만큼 오래된 현상이다. 그 탄압은 스탈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고, 스탈린 이후로도 계속 존재했다. 개인성을 꽃피우고 개인적 자유를 획득하면 프롤레테르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물며 단결된 프롤레타리아로 살아가는 일은 더욱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연유한다.
47-49p. 계급적 존재로서의 프롤레테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는 노동력을 지닌 다른 인간과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로서 착취를 당하지만, 또한 바로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그 자신과 완전히 동일하게 전적으로 소외된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타자’이기 때문에—다른 모든 프롤레테르들과 힘을 합해 착취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하찮은 노동량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자신에게서 소외되어 있는 한 자신의 존재로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모범적 투사란 바로 이 같은 필연성을 내면화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이상 독자적인 개별성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계급을 상징하고, 이 계급은 우리가 보았듯 정의상 하위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사고하는 계급의 객관적 사상이 되기 위해 자신의 주관성을 억압한다. 곧 경직됨, 도그마주의, 유물론, 정형화된 언어, 권위적 열정이 하위의 것이 되길 원치 않는 그러한 사상에 내재하는 자질이다.
전적으로 종교적 사상이 그런 것과 같이, 이런 사상은 종말론적인 종교적 태도를 반영하고 확장한다. (중략) 그는 자신을 소외시킨 시스템의 주인의 자리를 계급적 존재로서 되찾기 위해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상실해야 한다. 개인들을 평준화시키는 동시에 개인들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시스템을 되찾겠다는 사고는 다음과 같은 개인들이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곧 구성원 개개인들에 대해선 외재하지만 단결된 형식으로 존재하는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 자신들을 양산하는 과정을 소유한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 어떤 존재라도 되기 위해, 스스로 어떤 존재도 되기를 포기하는 개인들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한 통일체로서의 계급은 상상적 주체이지만, 이 주체가 사회시스템을 되찾겠다는 사고를 작동시키고 견고하게 지지한다. 하지만 그 주체는 각 개인에 대해서, 현실의 모든 프롤레테르들에 대해서 외재하고 초월한 채로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은 ‘자본’의 권력과 정대칭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자본에 대해 소외되어 있고 자본의 공무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프롤레테르도 그 동일한 ‘자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게”될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소외될 것이다.
50p.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에 의해 시작된 작업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 작업을 영속시키고, 어떤 경우에는 이 작업을 완성한다. 다시 말해, 프롤레테르들의 독자적 능력을 파괴시킨다. 이 작업이 완성되면, 프롤레테르의 완전한 타율적 노동은 다른 대다수 노동자들의 노동과 결합할 때만 유용성을 갖는다. 이 노동은 완전하게 사회적이다. 경우에 따라 이 노동에 어떤 능력이 전제될 수 있지만, 이 능력은 노동을 시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전적으로 이용가치를 결여한다. (중략) 그(노동자)는 추상적 보편노동의 순수한 제공자이고, 결과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순수한 소비자다. 프롤레테르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있는 이런 형식의 이면에는 다음의 사실이 있다. 그가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는 데에는 상업적 거래만이 필요하다. 곧 그에게 필요란 상품 구입의 필요, 돈의 필요다. 프롤레테르는 판매되어야 할 것들을 소비하고, 그가 만드는 모든 것은 판매를 위한 것이다.
51-52p. 프롤레테르는 “그의 ” 노동이 만들어낸 생산품에 대해, 나아가 그 생산품의 목적에 대해 무관심하다. 자본으로 인해 그는 모든 독자적 능력을 박탈당하고 “커다란 자동기계의 불변의 규칙성”에 맞추어 기능하는 존재로 환원됐다. (중략) 지금은 오히려 재료가 노동자를 움직이게 한다. (중략) 기계들의 시스템이 작업한다. 그리고 당신은 이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당신의 육체, 사고, 시간을 그 시스템에 맞춘다.
52-53p. 그들(노동자, 근로자, 공무원)은 시민이 요구하는 일에 대해, 분명 자신들의 책임 밖에 놓인 일이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거나, 일체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53-54p. 이런 원한어린 태도가 “자신의” 일을 하는 프롤레테르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다. 그들은 수동적인 프롤레테르를 원했을까? 그렇다면 프롤레테르는 수동적으로 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는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한 수동성으로부터, 이 수동성을 강요한 사람들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프롤레테르에게서 수동적인 능동성을 원했다. 그런데 그는 능동적인 수동성을 가질 것이다. 프롤레테르는 원한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는데, 이 자유를 이용해 시초에 자신의 자유를 부정했던 상사들을 넘어서려 한다. 그는 상사들이 지시를 하며 자신에게 기대했던 바를 저버리고, 이런 태도가 “노동의 존업”의 마지막 피난처다. 즉, ‘나는 당신들이 바라던 바대로 됐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당신들에게서 벗어나려 한다. 우리는 고용주들을 괴롭혀. 고용주들은 임금은 항상 줄 수 있지. 우리의 돈. 개똥같은 임금에는 개똥같은 일이 어울려.’ 프롤레테르의 원한어린 언어는 무기력의 언어다.
53p. 프롤레테르들은 자신들의 완전한 헐벗음을 내면화하며 부르주아 세계의 폐허 위에서 보편적 프롤레타리아 사회를 이루어내는 대신, 자신들의 완전한 의존성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기 위해 헐벗음을 내면화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 권력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모든 것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만 효용성이 있기 때문에, 사회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마련해주고 자신들의 모든 노동에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임금제 폐지를 주장하는 대신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은 모두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3-54p. 계급적 요구가 이런 식으로 대중적 요구로 바뀌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계급적 요구는 대중의 소비에 대한 요구로 바뀌고, 이 경우 프롤레테르들은 사회로부터, 다시 말하면 권력으로부터, 현실적으로 다시 말하면 국가기관으로부터 그들이 갖거나 창조하기가 불가능한 것을 받기를 요구한다. 이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권력의 지위에 자신들의 대표자를 앉히기 위한 대중적 행위로 축소된다.
56p. 우리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모든 활동이 사회화되는, 곧 국가기관의 중개로 분절화되고, 전문화되고, 규격화되고, 다른 활동들과 연결되어야만 하는 사회에서는 상황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보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소비, 생산, 통신, 교통수단, 병, 건강, 죽음, 지식의 습득, 교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중앙화로 개인에게서나 단체에게서나 공동체에게서나 자율적 생산, 소비, 교환의 모든 가능성이 파괴되면서, 모든 사회관계들도 뿌리까지 파괴되었다.
아무도 자신이 소비할 것을 생산하지 않고, 아무도 자신이 생산하는 것을 소비하지 않는다.
57-58p.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그 계급에 대해 모든 의무를 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도 노동계급이 절대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렇게 실제로는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책임지고 있다.
58-59p. 독점기업들의 국가는 고전적 부르주아지의 국가와 달리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더 이상 성취하지 않는다. 아니다. “독점기업들의 국가”는 독점적 ‘자본’ 자체의 본성과 어울리게도 독립화된 지배, 행정 기구로서, 이 기구의 장애 없는 권력은 자신에게서 분ㄹ되려는 사회에까지 내려가 그 사회를 ‘자본’의 요구에 따라 조정한다. 그 ‘자본’은 자신의 결집력과 경제조직의 크기를 빌어, 지역사회 주민들의 정당한 장악력과 통제력을 벗어나고, 부르주아지 법의 틀을 깨트리고, 합리적 경영의 이름으로 국각의 중앙집권적 지도를 요구하고, 이 과정에서 가급적이면 국가가 무언가 이득을 취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전위된 사회에서는 탈중심적 발의안이 중앙권력을 향해 오르고 중앙권력의 제안이 지방권력을 향해 내려오며 상호적으로 교류할 충분한 여지와 유연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의 저변에 정치적 생활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이렇게 정치적 생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의 민주화를 계속 수행할 정치적 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생활”은 중앙권력을 행사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쟁하는 일로 환원되어 있다.
60-61p. 다른 상황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단절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절이 있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단절의 힘을 가진 존재, 곧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모태와 더불어 자신의 계급으로서의 존재를 버릴 수 있는 단절의 힘을 가진 존재로 주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노동계급이 자신을 부정할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실증적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이 문제다. 만일 노동계급이 자신의 본래적 존재대로 존재한다면, 만일 그 계급으로서의 존재가 긍정적인 것이라면, 그 노동계급은 바로 ‘자본’ 자체의 가장 심층적 구조와 단절을 이루는 방식을 통해서 ‘자본’이 만든 대로의 노동계급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중략)
초기 마르크스에게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프롤레타리아는 실제로 그 계급으로서의 존재가 긍정성으로 위장된 부정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부정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프롤레테르는 ‘자본’에 의해 부정되고, “자신의” 생산품을 박탈당하고, 자신의 고유한 현실 내에서 소외되어 있는 한에서, 보편적이고 주체적 권력을 갖는 생산자다. 프롤레테르가 계급-존재를 부정하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주체적 권력에 대한 긍정인 해방이 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오직 프롤레테르의 계급-존재가 부정이기 때문이다.
62p. 그런데 그 부정의 가능성은 비록 마르크스에게 존재론적으로는 주어져 있다 할지라도, 문화적으로는 즉시 주어지지 않는다. 곧 자신이 객관적으로 생산과정의 톱니바퀴와 같다는 사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주체적 권력을 가진 연합한 생산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이 두 사실의 차이점을 인식할 능력이 노동자의 조건에 본래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니다.
4절 노동자의 권력?
67p. “공장은 노동자들에게.” 이 슬로건은 옛 시대의 요구사항이었던 “토지는 노동자들에게”의 정확한 모방이다. (중략) 그 슬로건을 들으며 회고적으로 생각할 때 충격을 주는 점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 공장과 스스로를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68-69p. 이런 모든 내용 중 오늘날에 진실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이제 공장은 더 이상 하나의 독립된 경제조직이 아니다. (중략)
생산조직의 자율성을 파괴시킨 그 기술적 전문화, 경제적 집중화 과정이 노동자들의 자율성의 원천인 예능적 기술을 파괴시켰다.
72p.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자연스런 리듬에 따라” 노동할 권한을 일시적으로 부여받자, 곧 그들은 적어도 현재의 사회적, 기술적 노동환경 내에서는 “우리의 자연스런 리듬은 전혀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74p. 현재의 생산구조 틀 내에서는 노동자들이 권력을 갖는 일이 이렇게 물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 틀 내에서는 조합의 권력만이 가능하고, 노동자들은 그 제도적 기관에 자신들을 대표할 수 있는 권력을 위임한다. 하지만 국회의 권력이 주권을 갖는 국민의 권력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조합의 권력이 노동자들의 권력인 것은 아니다. 조합은 자신에게 권력을 위임한 노동자들로부터 독립된 제도적 기관으로서 권력을 갖는다. 그것은 중개권력을 행사하는 일 자체를 통해, 자신에게 권력을 위임한 노동자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75p. 실제로 생산자들의 권력, 자치, 자주관리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은 단순히 법적인 것이나 제도적인 것이 아니다. 장애는 물적인 것이다. 즉 장애는 공장을 구상하는 일, 공장의 크기, 공장의 기능방식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또 다른 장애가 있다. 공장들 전체를 운영하는 ‘자본가 집단’이 문제다. 사실, 군대나 관료기구 같은 모든 거대한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대형 산업생산의 비밀은 그 안에서 아무도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있다. 권력은 아무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그것은 집단행위의 규칙과 목적들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상부의 인간들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산업의 혹은 행정의 위계질서 밑에서부터 정상에까지 존재하는 것은 자신들이 섬기는 물적 시스템의 절대적이고 부동의 명령에 따르는 실행자들뿐이다.
76p.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자본’의 공무원들이라고 말했다. 억압하는 사람들이자 그 스스로 소외되어 있는 그들은 현실에 숨어 있는 법을 따르는 동시에 이 법을 전파한다. 그들은 ‘자본’의 기능을 관리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에 명령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럴 권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그 권력이 그들을 소유하고 있다. 그 권력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그 권력은 관계들의 시스템, 곧 구조다. 그 권력은 자본가 집단에 의해 작동하지만, 자본가 집단이 그 권력을 보유한 것은 아니다. 자본가들이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권력이 현실의 질서에 무한히 스며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77p. 현대의 모든 권력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그것들은 주인을 두고 있지 않다. 스스로를 모든 법과 모든 정당성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주체라도 그 권력을 소유하거나 책임지지 않는다. 현대국가에서는 어떤 지도자도, 어떤 독재자도 “나는 원한다”라는 이유로 권력을 행사하거나 자신에 대한 충성이나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대국가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주어진 현실의 질서를 따르는 한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아무도 그 질서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오늘날 학문과 기술 분야 출신의 관료들이 가진 권력은 본질적으로 기능적인 정당성을 갖는다. 즉 그 권력은 인간이자 주인인 존재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이나, 직위에 속해 있는 것이다. “직위를 가진” 개인은 언제나 우연의 산물이며, 다른 인간으로 교체될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 그는 최고의 위엄도 도덕적 권위도 갖고 있지 않다. 그를 대상으로 소문이 나돌고, 사람들이 등 뒤에서 그를 비웃고, 그는 다른 평범한 인간보다 더 나을 게 없는 존재고, 빠른 시간 내로 교체당할 수 있다. 권력이 고유하게 그에게 속해 있지도 않고 그로부터 나오지도 않는다. 그는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그는 관계들의 물적 시스템이 구조화한 데서 생겨난 존재고, 이 시스템 내에서는 현실적 법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의 중개를 통해 인간들을 노예화한다.
여기서 이런 노예화를 위해 그 물적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생겨난 것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은 이런 노예화는 그 시스템이 폐기되지 않고서는 폐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대로의 산업시스템은 우리로 하여금 거대한 기계적, 관료적 조직들의 노예가 되도록 만들고 있고, ‘자본’의 권력 또한 자신의 공무원들의 중개를 통해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자본’의 전 기능과 관계에 종지부를 찍지 않은 채 그 공무원들을 몰아내겠다고 하는 건 분명 그 부르주아지를 단지 다른 부르주아지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