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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빈고책읽기23]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중.

  • 졔졔
  • 작성일시 : 2018-12-04 17:14
  • 조회 : 4,123
  •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앙드레 고르 


2018년 11월 27일, 스물세 번째 책읽기 모임이 열렸습니다. 장소는 레드북스였고 지음, 정훈, 졔졔 세 명이 참여하였습니다.

 

스물세 번째 책읽기 모임에서는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계속 읽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에 3주째 책을 읽고 있는데요.  이 시간에는 2장과 3장 1,2절을 읽었고, 스물네 번째 책읽기 모임에서 이 책을 마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책이 끝나면 제임스 C.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를 읽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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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개인적 권력과 기능적 권력


어떤 시기나 사회든 권력을 갖는 지위의 수효는 필연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나아가 자유주의가 암묵적으로 내포하는 내용과 반대로 자신의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하지 않는 권력, 자신의 권력을 특정인에게 위임하려 하지 않는 권력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정치적으로 유일하게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지배적 지위는 그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그리고 그 지위가 부여하는 권력은 그 권력을 강화한 사람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게끔 되어 있는가? 혹은 반대로 그 권력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지위에 내재하는 것인가? (85) 


사회가 늙어간다는 사실, 그리고 유독 자본주의 사회가 늙어간다는 사실은 다음을 의미한다. 즉 권력의 지위와 그 권력을 행사하는 양식이 점점 사전에 결정된 양상을 띠고, 궁극적으로는 완전하게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갖게 될 모든 지위가 이 지위에 필요한 자질과 함께,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비록 단호한 결정을 내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시도를 하더라도, 이미 그려놓은 길 바깥을 걸어가서는, 그러니까 기성제도 바깥에서는 아무도 성공할 수 없다. (중략) 그들은 지배 기구“를 섬기는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능가하는 비인칭적 권력에 자아를 내맡길 것이다. (86)


인간들이 더 이상 권력을 소유하지 않고, 권력의 지위들이 인간들을 소유한다. (87)


익명적 조직의 구조에 내재하는 기능적 권력을 위해 개인적 권력이 제거된 일로 말미암아, 계급투쟁의 문제는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이제부터 사회와 기업 내에서 권력은 권력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에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실행된다. 관료는 자신이 실행자이자 섬기는 사람이라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결코 책임을 지지 않는다. (89)


우리는 여기서 함정을 본다. 시스템으로 인해 생겨난 이 결과를 개인적으로 책임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한 가상의 최고권력자의 탓으로 돌리려는 것은, 다른 결과라면 개인적으로 책임질 수도 있는 현실의 최고권력자로부터의 구원을 암묵적으로 바라게끔 만든다. (90)


파시즘은 계급의 경계들을 뛰어넘고 비인청적 지배시스템 때문에 사람들에게 생겨난 요구사항들을 결집시킨다. 파시즘이 발전하는 데에는 대중과 관계를 맺고, 위엄 있는 동시에 서민적이고, 국가의 위대함을 책임지고 초라한 인간들의 개인성을 전능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릴 일을 떠맡은 지도자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게 요구된다. 이런 유형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없는 경우에 군사독재, 입헌군주제, 경찰국가는 존재할 수 있지만 파시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시즘의 특성은 이른바 전능한 지도자와 국민이 동일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92-93)


파시즘은 강한 남성성을 띤 문화혁명이 될 것이다. 파시즘은 부르주아적 가치들을 청산하고 생명력과 관련한 가치들을 내세울 것이다. 파시즘은 모든 자도자에게 후자의 기준에서 우수해지기를 요구한다. 파시즘은 야만과 야수성의 해방이 된다. (중략적어도 파시즘의 실제적인 이데올로기는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이 실행과정에서 정당들의 존재가 거부되고, 또한 정당체제가 거부된다. (중략) 파시즘은 권력기관을 개인적 권력으로 대체한다. (94-95)


기능적 지배시스템을 능력 있는 사람들이 사회에 지속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일, 핵심적 지위들을 독점하는 계급적 권력을 퓌러의 개인적 권력으로 대체하는 일, 국가와 그 관료체제를 특별한 사상과 의지로 고무된 대중적 조직들로 대체하는 일. 이런 프로그램을 실현한다는 것은 사회와 국가를 근본적으로 변형시켜야 한다는 것, 모든 제도들을 전체적으로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따라서 몇 가지 측면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제안하는 것과 유사한다. 그런데 이런 모든 변형은 생산시스템의 변형, 커다란 기술기구와 경제적 행정적 조직들의 제거, 요컨대 그 큰 규모와 복잡한 시스템 때문에 한 인간의 개인적 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고 지도업무를 포함한 여러 업무들이 기능적으로 분할되어야 하는 모든 제도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가정할 것이다. (97)


퓌러의 개인적 권력은 대중의 삶을 전체적으로 관료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알리바이다. (98)


현대사회에서 권력에는 주체가 없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만 개인적이다. 권력의 현실성은 구조에 있다. 그러니까 권력은 지위를 점하는 자들에게 기능적 권력을 부여하는 지배기구의 존재에서 생겨난다. 지배기구가 거의 절대적으로 견고한 것으로 남아 있을 때, 누가 권력의 지위를 점할 것인가는 정치적으로는 거의 의미 없는 문제다. 왜냐하면 권력의 성격과 지배양식, 시민사회와 정치권 간의 관계, 정치권과 국가 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그 지배기구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는 지배기구를 필수적으로 장악하고, 이어서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일에 지속적인 환상을 품고 있다. 나는 개혁주의가 과거에 개혁을 이룬 사실들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권력의 성격도 지배양식도 사민사회와 국가 간의 관계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반대로 그 개혁들은 권력기구, 대중에 대한 지배, 대중의 무기력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99)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적으로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비록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이 자본에 의해 설치되어 있던 지배기구를 장악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자본의 지배와 유사한 것을 재생산할 것이고, 이어서 그들 스스로가 기능적 부르주아지가 될 것이다. (99-100)


일반적으로 과거의 혁명들은 모든 지배형식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기능적 권력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이 혁면들은 일반적으로 실패했다. 대규모의 사회적 생산기구들이 존재하고, 사회적 생산의 토대가 되는 업무분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기능적 권력이 필연적으로 다시 생겨난다. 기능적 권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배관계를 제거하려는 것은 곧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떠맡는 것과 같다. 지배관계를 제거할 유일한 가능성은 곧 권력과 지배를 분리시키고 시민사회, 정치권, 국가 각가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능적 권력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전에 정해진 한정된 자리를 그 기능적 권력에 부여하는 데 있다. (101)

 

3장 사회주의를 넘어서

1절 역사적 주체의 죽음과 부활:

후기산업사회 프롤레테르들의 비계급


사회주의의 위기는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의 위기다. 다양한 능력을 보유한 전문기술 노동자들, 곧 자신의 생산적 일을 할 수 있는 주체, 따라서 사회관계들을 혁명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그 노동자들과 더불어, 사회주의적 프로젝트를 책임질 수 있고 이 프로젝트를 현실화할 수 있는 계급은 사라졌다.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이 퇴락하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이 이유 때문이다. (105)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존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리고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떻게 그 부정이 긍정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어떤 조건에서 그 부정이 실제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기만을 희망한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노동의 자본주의적 분할 때문에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중의 토대는 파괴됐다. (106)


노동자가 노동 가운데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노동의 주인이 되고, 노동을 위해 권력을 정복하는 일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노동의 본성, 내용, 필요성, 방식들을 부정하며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만이 문제다. 그런데 노동을 거부한다는 것은 또한 노동운동의 전통적 전략과 그 조직적 형식들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곧 노동자로서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더 이상 없는 대신, 노동자로서 기능하지 않을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권력이 문제가 된다. 계급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 (107-108)


한 세기 이상 동안, ‘프롤레타리아사상은 자신의 비현실성을 은폐하는 게 성공했다. 현재 그 사상은 프롤레타리아자체만큼 시효가 지난 것이 되었는데, 이는 생산 노동자집단 대신 비노동자들의 비계급이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동 자체와 모든 지배의 형식들과 더불어 계급들이 폐기될 사회 아닌 사회를 바로 우리의 현 사회 한가운데서 예고하는 사람들이다.

노동계급과 달리, 이 비계급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지도 않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의 낙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계급은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해, 그리고 새로운 생산기술들의 영향력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들의 해체로 생겨났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따를 때 노동계급이 지니고 있어야 하는 부정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부정성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해 근본화됐다. 그 부정성은 이동을 하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물적 토대, 사회관계, 사법조직을 동시에, 그리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부정하는 형식과 내용을 띠게 됐다. (108)


실제로 이 비계급은 노동의 소멸과정에 따라 생산현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 혹은 지적 노동의 산업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일자리를 얻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실제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지속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완전하거나 부분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임시직의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노동, 곧 노동의 존엄, 가치화, 사회적 효용, 욕망에 토대를 두었던 구사회가 해체되며 나타난 산물이다. (109)


마르크스의 프롤레테르와 달리, 신프롤레테르는 더 이상 자신의노동에 근거해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하지 않는다. (111-112)


그들에게서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노동계급이나 다른 어떤 계급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113)


정보혁명의 영향 아래서는, 사회적 생산자들이 사라지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주변화되게끔 기술이 변화한다. (중략) 삶에 필요한 동시에 유용한 모든 것을 갖춘 지속가능한 사회를 재생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은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115)


사회 내에서 사회적 노동이 매우 긴 시간을 점하는 현상이 지속되면서 모든 노동의 탈가치화가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속화된다. 실제로 노동기간과 일자리 수효는 인위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는데, 이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잉여의 상품과 필수품, 유용성이 있는 상품과 유용성이 없는 상품, 귀중품과 소모품, 친환경성 상품과 비친환경성 상품, 파괴하는 데 사용하는 상품과 건설하는 데 사용하는 상품의 생산이 완전히 불가분한 연관을 맺고, 경제행위의 전 부분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 곧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생산활동을 펴는 것을 유일한 역할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사회가 생산하기 위해 노동하는 대신 노동하기 위해 생산한다면, 전반적으로 노동은 명백히 무의미한 것이 된다. (115-116)


후기산업사회 프롤레타리아의 특수성은 지금껏 언급한 내용에서 파생한다. 전통적인 노동계급과 달리 이 비계급은 해방된 주관성이다. 산업사회의 프롤레타리아가 재료를 변형시키는 능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모든 사회적 발전의 기반인 물적 능력으로 인식하게끔 만들어주던 객관적 권력을 이끌어낸 반면,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는 객관적인 사회적 중요성을 결여한, 사회로부터 배제된 비능력이다. 사회의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그들은 마치 낯선 과정과 공연을 대하듯 자신의 미래를 대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 사회가 축소된 것으로 보이는 기구들의 질서를 점유하는 일도, 무엇이든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일도 의미를 결여한다. (117)


후기산업사회의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는 이렇게 미래사회에 대한 전체적 구상을 결여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따를 때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그 계급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이 신프롤레테르는 현 사회로부터, 이 사회의 발전으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117)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더 이상 알 필요도 없고, 역사발전의 내재적 법칙들을 열심히 따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어디로도 향해가고 있지 않다. ‘역사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중략) 이제부터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우리는 해방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런데 생산주의적 합리성을 다른 합리성으로 대체하는 단절을 통해서만 그 문턱을 넘게 될 것이다. 개개인들 자신만이 그 단절을 이룰 수 있다. 물적 과정들로부터는 결코 자유의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자유의 시대는 각 개인이 자유가 절대적 주관성임을 내세우며,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유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일이 정립될 때만 시작될 수 있다. 비생산자들의 비계급만이 이 일을 정립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계급만이, 생산주의를 넘어선 곳에서, 축적의 윤리가 거부되고 모든 계급이 해체되는 일을 동시에 육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118-119)

 

2절 후기산업사회의 혁명


현재는 미래로부터 아무 의미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역사의 침묵으로 말미암아, 개인들은 자신들에게로 되돌아간다. (120)


(마르크스의 가정에서는) 개인적 활동으로부터 사회적 노동으로의 이행은 그 연속적 과정에 단절이 일어나지 않고서도 진행될 수 있다고 가정되었다. 사회적 활동의 개인화와 개인적 활동의 사회화가 공산주의의 발전에서 두 중요한 국면으로 가정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서 가정되었던 내용은 실제적 검증을 받은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 (121)


생활, 노동의 공동체와 전체적으로 바라본 사회 사이에는 단지 규모의 차이뿐 아니라 본질적 특성의 차이가 존재한다. 공동체는 각 개인이 공동체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고 그 응집을 위해 노력하며 모든 주의를 기울여 타인들과 협력하고, 갈등을 경험하고, 감정적 관계를 맺는 과정을 통해 유지되고 매우 의식적으로 창조될 수 있다. 반면에 전체적으로 바라본 사회는 제도적 조직, 커뮤니케이션, 생산 기반시설, 직무의 지역적, 사회적 분할에 의해 생겨난 견고한 관계들의 시스템이고, 그것들에 의해 유지되는 관계들의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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