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읽기 모임에서도 보기 시작한 고병권 씨가 예전에 한겨레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해방촌 이웃, 수유너머 얘기인데...
빈집, 빈고 얘기이기도 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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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이 살 궁리
(한겨레, 2004년 6월 13일자 칼럼,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2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들른 아들이 일요일 아침부터 연구실 간다며 서둘러대는 꼴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놈의 연구실은 일요일도 없냐. 대체 돈을 얼마나 준다고.” 어머니는 그때까지 내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나가 돈을 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돈을 받기는커녕 내고 다닌다는 말에, 당장 하시는 말씀이 “그 짓을 왜 하느냐”는 거였다.
지금은 대강 알고 계시지만, 그때 어머니 눈엔 돈 받는 연구실도 돈 내는 아들도 다 정상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이해해 보려고 어머니가 내린 결론은 그곳 사람들이 똑똑하고 마음씨 좋아 돈 내도 아깝지 않은 곳인가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살 궁리를 해야 한다는 어머니에게 이게 바로 살 궁리라는 걸 납득시키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떻든 ‘돈은 적게, 생활은 풍요롭게’라는 내 황당한 꿈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현재 내 월수는 40만원 남짓. 이 지면의 원고료에다 내 미래를 지켜보겠다는 어느 분의 황송한 장학금을 합한 액수다. 나는 그 돈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사용한다. 회비도 내고, 먹고 마시는 데도 쓴다. 하지만 동료들이 만들어주는 밥과 음료는 터무니없이 싸고, 영화, 음악, 만화, 탁구, 요가 등이 무상인 데다, 바자 코너엔 좋은 옷들이 계속 들어온다. 이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 내가 하는 일이라곤 그런 동료들 중의 한 명이 되는 것뿐이다.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누리는 서비스 덕에 내가 사용하는 40만원은 월수가 수백만원에 이르는 친구가 혀를 내두를 정도의 풍요를 제공한다. 그 친구의 말처럼 돈 의 위력이 다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내가 그 돈으로 연구실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를 사는 건 아니다. 동료들 중 누구도 그것을 팔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선 뜨거운 지식, 따뜻한 밥, 시원한 웃음을 돈 없이 얻을 수 있지만 돈 주고 살 수는 없다.
그럼 내가 낸 돈들은 어디로 가는가. 연구실 안에선 행세를 못하고 맴돌다, 임대료, 먹을거리, 공과금 등 바깥 사람들에게 흘러간다. 서양 속담에 ‘돈과 친구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친구의 선물이 들어오면 정말 돈의 자리가 없어진다. 요즘 연구실에 쌀과 야채를 보내오는 분들 때문에 먹을거리에 붙어 있던 돈들이 엄청 줄었다.
지난주엔 집이 먼 사람들을 중심으로 연구실 근처에 쾌적하고 넓은 집을 얻었다. 무슨 큰돈이 있어서가 아니다. 자취나 하숙, 교통비로 드는 돈을 모았다. 7명이 10만원씩 월세를 내기로 하니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었다. 낮엔 세미나실과 휴식처로, 밤엔 야간 작업하는 사람들의 잠자리로, 지방이나 외국 손님이 오면 게스트하우스로. 얼마 전까지 근처에 잠자는 방이라도 있었으면 하던 내 소망은 너무 쉽게 해결되었다.
결국에 ‘나 잘났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자랑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 우리 모두 ‘돈 없이 살 궁리 좀 해보자’는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 두자면, 나는 사장한테 받아야 할 월급이나 국가로부터 받아야 할 복지 수당은 악착같이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마땅히 내놓아야 할 돈을 줄여주기 위해 이런 제안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문제는 집 장만한답시고 인생을 대출이자와 바꾸고, 연구비 없어 공부를 접고, 대관료 없어 작품을 묵히고, 돈 없어 공연을 못 보는 현실이다. 일부는 고립된 채로 잘 살고 다수는 가난한 채로 고립되어 있는 이 이상한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더 많은 임금과 더 많은 복지 수당을 요구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돈에 더 적게 의존하는 삶을 창안하는 것이다. 돈으로 살 길을 찾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돈 있는 사람만 살 수 있게 된다. ‘웰빙’조차 돈으로 사야 하는 현실에선 돈 있는 사람만 ‘웰빙’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돈에 대한 내 결론은 간단하다. 돈 벌어 살 궁리하는 것보다 돈 없이 사는 게 우리 모두가 살 궁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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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 홈페이지 구경하다가 다시 발견해서 퍼왔는데...
거기에는 고병권씨가 한 또 하나의 재밌는 얘기도 덧붙여져 있네요.
"연구실에서 먹는 밥은 1800원이면 족하다. 밖에서 밥을 사먹으면 5000원 이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연구실에서 활동하고 생활하는 것이 돈을 내면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면서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독특한 경제 감각은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시 상기해보고 좀 더 나아가보면 좋겠네요. ^^
크게 공감이 가는 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