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2026. 5.] 설해 운영활동가의 편지

빈고게시판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빈고의 대표를 맡은 설해입니다.
작년에도 5월에 운영활동가 편지를 썼는데 올해도 우연히 5월에 인사를 드리게 됐네요. 모두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얼마 전 서울고등법원에 두 건의 재판 방청을 다녀왔습니다. 작년 여름, 많은 조합원 분들도 함께 해주셨던 이후 새만금신공항 취소 소송은 승소로 끝나 모두에게 큰 기쁨과 감동을 주었는데요, 현재는 국토부와 전라북도의 항소로 2심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이날 재판을 응원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좌석이 모자라 법정 바닥까지 가득 메운 진풍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법정의 질서를 관리하는 보안관리대에서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이유로 한껏 예민해져 있던 그들 사이에서 “전쟁통 난민 같다, 북한에서 쳐들어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조롱 섞인 대화가 오갔고, 재판 대기 중 너무도 조용한 가운데 그들의 목소리는 마치 들으라는 듯이 선명하게 전해져 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따질 걸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그 순간에는 대체 왜 그러는지 의아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업무상의 고충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과하고 새만금 신공항 찬성론자라서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적대감을 갖는 것일까 하고요.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뭔가를 특별히 하지 않아도 주변 공기를 바꾸는 힘이 있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재심을 요청하는 항소심이 있었습니다. 2022년 10월 구미 공장 화재 이후 물량은 평택 공장으로 옮기고 노동자들은 전부 잘라낸 회사의 일방적인 청산과 해고가 잘못된 것임을 밝히기 위해 다시 한번 재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재판을 위해 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들은 매일 아침 평택 공장 앞에서 선전전을 마치고 서울고등법원까지 이동해 점심시간에 피켓을 들고 서 있다가 다시 평택으로 가서 저녁 선전전을 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작년 겨울 600일간의 고공농성을 마치고 내려온 박정혜 님도 그중 한 명입니다.
법정 앞에는 전날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반가운 마음을 나눴습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이런 자리에서 여러 번 만나 얼굴을 아는 이들을 마주치면 가볍게 눈인사를 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법원의 나무 그늘도, 화려하게 피어 있는 꽃들도 우리를 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멀리서도 이 재판을 응원하러 온 사람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리고 서로를 이정표 삼아 모여 잠깐이지만 웃고 또 다음을 기약합니다. 이미 내려진 선고의 재심을 이끌어내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투쟁하는 이들의 성실한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계엄 이후 광장에서의 만남, 그리고 작년 말 『자본의 바깥』 출간 이후 각 지역에서 진행된 북토크와 지음님의 강연을 통해 많은 분들이 빈고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새로 가입해 주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신규 조합원이 생길 때마다 빈고 디스코드와 텔레그램의 ‘게으른 냥’이라는 이름의 봇이 공지를 올려주는데, 게으른 냥이 아니라 부지런 냥이라고 이름을 바꿔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합원 가입 소식이 자주 올라올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한 번씩 하던 일을 멈추고 각자 어떤 바람을 가지고 빈고에 오셨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최근 오래된 단체나 조직들이 활동을 접기도 하고 참여가 저조해 곤란을 겪는 모습들도 종종 보는데, 그만큼 활동이 어렵다고 하는 이 시기에 자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빈고의 문을 두드려 주시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만큼 더 소중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또 빈고가 많은 분들의 마음에 잘 응답하고 삶을 바꾸는 가능성을 가진 곳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 조금 긴장도 됩니다. 혼자가 아니고 싶다는 것, 내 시간과 에너지가 나만을 위해 쓰이는 것 말고 다른 방식이 있다고 믿는 것, 혹은 더 큰 연대를 만들고 싶다는 것. 빈고의 문을 두드려 주신 분들이 어떤 생각으로 오셨는지 제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새로운 연결을 찾아 이곳까지 와주신 여러분을 저뿐만 아니라 모든 운영위원들이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느새 조합원 600명을 훌쩍 넘긴 빈고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지 기대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고 소박한 행동도 함께 모였을 때는 그 이상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지난 빈고의 여정을 통해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저도 작은 역할이나마 함께 하겠습니다.

서울고등법원 앞 재판 방청으로 모인 사람들
서울고등법원 앞 재판 방청으로 모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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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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