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7일 달팽이책방에서 있었던 <자본의 바깥 북토크> 후기가 <달팽이트리뷴 112호>에 실렸습니다.
행사 후기 | 김지음 작가와 함께 한 북토크 <자본의 바깥>
자본의 바깥에 서다
글_ 유차
작년 말쯤,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권성민, 들고래)를 읽고 이 책의 저자가 연출한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사상 검증 구역: 더 커뮤니티>를 절반 정도 보았다. 9화쯤, 인상 깊었던 장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마’라고 불렸던 하미나 작가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익명으로 출연자들의 연봉이 공개된 날, 높은 숫자의 연봉이 공개될수록 사람들의 함성과 반응이 커지는 것을 보고 그는 이상함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높은 연봉에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이상한데 사람들은 그게 당연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순간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나는 자본주의적 생각을 거부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지만, 누구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높은 연봉, 자본을 가진 사람들을 속으로 부러워했구나 싶었다. 어쩌다 보니 나도 자본주의적 시각을 끼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자본가였던 적이 없다. 노동자=소비자의 정체성만 있었을 뿐이다. 채권자로서 이익을 얻기 위해, 채무자로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 움직인 적 없다. 그러다 보니 자본의 화폐 흐름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여기에 지쳤다. 그런데 요즘은 노동자=소비자도 자본가가 될 수 있다. 노동 수입을 지출 관리하여 남은 잉여금을 자본(부동산, 주식투자 등등)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요즘 세상살이의 정석이요, 겨우 살아남는 방법이다. 우리는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게 느껴진다. 노동자=소비자=자본가라는 모순적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왜 이것이 모순되고 어떤 과정을 밟으며 혼란을 주는지는 『자본의 바깥』(김지음·빈고, 힐데와소피)에 잘 나와 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금융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작가는 ‘누구도 금융자본주의의 굴레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말한다. “금융자본의 피해자가 되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그 일부가 되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금융의 영역은 자본도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와 기회의 영역’이 되었고, ‘자본과 탈 자본, 금융자본과 금융커먼즈가 격돌하는 투쟁의 현장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자본의 바깥』 184쪽). 그러면 ‘전혀 다른 새로운 화폐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
2월 27일 달팽이책방에서 열린 김지음 작가와 함께하는 『자본의 바깥』 북토크가 끝나 갈 무렵,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인간종에 대한 불신을 감지했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을 살게 하는 건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 믿는 것을 두려워하고 기대지 못하고 살아가는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돈 이야기라면 너무 낯설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없어서 움츠러든다. 돈을 입 벌어지게 벌어본 적도 없고, 그렇게 벌려고 노력하며 살지도 않았고, 일찍부터 수포자였던 사람답게 숫자라면 그냥 지겹고 답답하다. 돈이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숫자로 머리에 둥둥 떠다니며 관계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이 내겐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맨 아래층에서라도 발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외의 방법은 (특히 개인이 할 수 있는) 전혀 없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본의 바깥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세계가 이미 열려있었다! 탈 자본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빈집, 빈마을, 빈땅, 빈가게 등과 함께 ‘빈고’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기뻤다. 『자본의 바깥』은 우리가 탈자본주의 은행 ‘빈고’를 이해하기 위한 첫 단계로 읽으면 좋을 ‘빈고 설명서’다. 빈고가 생기기까지, 빈고가 잘 흘러가기까지의 이야기는 그렇게 쉽거나 간단치 않다. 커먼즈 은행 ‘빈고’의 형식은 시중 은행과 비슷한 원리로 운영된다. 금융은행과 다른 점은 여기엔 이자수익을 사양하는 ‘사양’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공유지를 넓히고 공동체를 위한 이익을 운영의 중심에 두면서, 공동체의 이익이 다시 개인의 이익이 되도록 한다. 자본 수익을 바라고 세워진 은행이 아니니 혹여나 생길 수도 있는 이익을 오히려 서로 사양한다. 그랬기 때문에 생긴 이상한(?!) 곳이다.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하면 뜬구름 잡는다고, 이상주의자라고 핀잔받는다. 욕은 아니지만 이때까지 ‘이상주의자’라는 말은 욕같이 들렸다. 자본주의 시대에 너 혼자 그렇게 동화나 붙들고 산다는 것 같은 바보 취급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동화 속 주인공들이 여기에 있다. (봐! 내 말이 맞지? 이렇게도 살아지지! 그런데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이것은 혼자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다 같이 잘 살 방도를 찾아내는 일이다. 함께이기 때문에 자본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거리를 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어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 북토크에 참석했다. 숨이 절박했다. 잡은 이 지푸라기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런 형태의 삶도 충분히 존재하고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위로만 얻고 끝낼 일은 아니다. 이것은 앞으로 내가 먹고사는 방식에 따라 바뀔 삶의 형태를 모양 짓는 것이다. 나만 잘 살기 위해 자본에 뛰어들어 잘 돼도 나만 잘 살고 망해도 나만 망하는 삶을 살기 싫다면 우리는 재고해야 한다. 같이 망하는 일은 없고 자본 소득을 추구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낼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죽기 직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죽고 싶은 건 누구나 바라는 호화 죽음이 아닌가? 돈에 파묻힌 죽음을 맞이하고 싶진 않다. 나는 올해부터 잘 죽기 위해 살기로 결심했는데, 그러자마자 이 책이 내게 왔다. 잘 죽을 수 있는 길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다. 덕분에 노동하고 있지 않은 상태를 불안해하는 증상이 조금 덜해졌다. 어디엔가 옥죄어 있지 않으면 불안한 것은 내가 만든 지옥이기도 하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자본 사회와 발맞춰 나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음 걸음은 감히 내딛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일단 가만히 멈춰 서서 잘 생각해 보겠다고. 나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저버리지 않겠다. 자본에 의지하기보다 좀 더 마음을 열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 김지음 작가는 ‘사람이 기댈 곳이 없으면 자본에 기대게 된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다면 자본에 기대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북토크에 유차님이 누구셨을지 궁금하네요. 달팽이서점에서 인사 드린 분이 거의 없어서.. 암튼 유차님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