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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 [빈고책읽기7] 네그리&하트, <위기의 주체적 형상들>, <<선언>> 중

  • 빈고
  • 작성일시 : 2018-07-20 02:04
  • 조회 : 3,302

2018년 7월 17일 일곱번째 책읽기 모임이 서대문 레드북스에서 열렸습니다. 

부깽, 정훈, 서원, 소연, 지음 5명이 모여서 <<선언>>의 1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현재의 사회경제적 위기의 맥락에서 형성된 네가지 주체성에 대해서 분석하고, 각각의 주체성을 넘어서는 반란의 방식들과 공통적인 것의 구성을 얘기하는 책입니다.  

1. 빚진 사람들 the indebted

2. 미디어된 사람들 the mediatized

3. 보안된 사람들 the securitized

4. 대의된 사람들 the represented


빈고의 주된 관심은 '빚진 사람들'에 있지만, 최근의 SNS와 관련해서 '미디어된 사람들'도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나눌 재밌는 얘기들이 많아서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고 다음에도 같은 책을 이어서 이어서 읽기로 했습니다. 

아래 요약 본 정도만 훑어보시고, 다음 모임에 참여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빈고 책읽기모임 (8회차)

- 시간 : 2018.07.24 화요일 7:30

- 장소 : 해방촌 온지곤지 

- 함께 읽을 책 :  네그리 & 하트,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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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 빈고폰 010-3058-1968

- 모임 소개 : 2018 공동체은행 빈고 책읽기모임에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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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바통을 이어받기>

<1장 위기의 주체적 형상들>


39p

매니페스토manifesto는, 자신들의 전망vision 의 힘으로 그들 자신의 인민을 창조하는, 고대의 예언자들처럼 작업한다. 오늘날의 사회운동은 매니페스토나 예언자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면서 그 순서를 뒤집는다. 변화의 행위자들은 이미 거리로 나섰고 도시광장들을 점거했다. 지배자들을 위협하고 거꾸러뜨릴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전망을 빚어내면서 말이다. 아마도 더욱 중요한 것은 다중들이 자신들의 논리와 실천을 통해, 자신들의 구호와 욕망을 통해, 일단의 새로운 원리와 진리를 선언declaration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언이 어떻게 지속 가능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가 될 수 있을까? 저 원리들과 진리들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서로 관계 맺고 또 우리의 세계와 관계맺을 방법을 재발명하도록 이끌 수 있을까? 그들의 반란 속에서 다중들은 선언으로부터 헌법[구성] consititution으로 나아갈 길을 발견해야 한다. 


이 운동들은 물론 일련의 특징들을 공유한다. 그 중 가장 분명한 것은 야영 혹은 점거라는 전략이다. ... 그 운동은 또 다중으로서 그들의 내적 조직화를 공유한다. ... 세번째 특징은 비록 다른 방식 속에서지만, 우리가 공통적인 것 the common 을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46p 

이 팜플렛에서 우리는 2011년에 폭박한 투쟁순환의 욕망들과 성취들을 밝히려고 한다. ... 우리가 여기서 집중해서 살필 문제는 현재의 사회정치적 위기라는 맥락에서 생산된 지배적인 주체성의 형식들이다. 우리는 네 개의 주요한 주체적 형상들을 다룬다. 빚진 사람들 the indebted, 미디어된 사람들 the mediatized, 보안된 사람들 the securitized, 대의된 사람들 the represented 이 그들이다. 


49p

신자유주의의 승리와 그것의 위기는 경제적 정치적 삶의 조건들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것들은 새로운 주체성의 형상들을 만들어내면서 사회적 인류학적 변형을 야기하기도 했다. 금융과 은행들의 헤게모니는 빚진 사람들을 생산했다. 정보의 소통의 네트워크들에 대한 통제는 보안체제와 일반화된 예외 상태가 두려움에 희생된, 그리고 보호를 갈구하는 형상을 구축했다. 보안된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부패한 민주주의가 기이한, 탈정치화된 형상, 즉 대의된 사람들을 날조했다. 이러한 주체적 형상들은, 저항과 반란의 운동들이 그 위에서 (그리고 그것에 대항해서) 움직여야만 하는 사회적 지형을 구성한다. 우리는 뒤에서 이와 같은 운동들이 이러한 주체성들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뒤집어, 그 운동들이 갖는 독립성과 정치적 행위의 역량을 표현할 수 있는 형상들을 창조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50p 빚진 사람들

빚을 진다는 것은 오늘날 사회적 삶의 일반적 조건이 되어가고 있다. 빚을 지지 않고 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학자금 대출, 주택 구입을 위한 담보대출, 자동차 신용대출, 의료비를 위한 대출 등등. 대출이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주요한 수단이 됨에 따라, 사회적 안전망은 복지 체계에서 채무 체계로 나아갔다. 당신의 주체성은 빚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다. 당신은 빚을 짐으로써 생존하고, 채무변제의 책임의 무게를 지고서 살아간다. 

빚이 당신을 통제한다. 빚은 당신에게 내핍을 부과하고 종종 당신을, 생존 전략을 짜야 할 상황으로 까지 떨어뜨리면서, 당신의 소비를 훈육시킨다. 하지만 빚이 당신의 노동 리듬과 선택마저 통제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다. ... 노동 윤리의 효과와 마찬가지로 채무의 효과도 쉬지 않고 죽도록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 윤리가 주체 안에서 태어나는 반면, 채무는 외적 강제로서 시작하지만 곧이어 꿈틀대며 주체 안으로 기어들어온다. 


오래전에 임금노동자 대중이 있었다. 현재는 불안정한 노동자 다중이 있다. 전자는 자본에 의해 착취를 당했다. 그러나 그 착취는 상품 소유자들 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이라는 신화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후자도 계속 착취를 당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과 그들의 관계의 지배적 이미지는 더이상 평등한 교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채권자와 채무자라는 위계적 관계로 구성된다. 


자본주의적 노동관계들이 바뀌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게중심이 더이상 공장에 있지 않고, 공장 담벼락 밖에서 떠다니고 있다. 사회가 하나의 공장이 되었거나 차라리 자본주의 생산이 너무도 크게 확장되어서 전체 사회의 노동력이 자본주의적 통제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자본은 점차로 우리의 생산적 능력, 신체, 정신, 소통능력, 지성과 창의력, 우리가 서로 맺는 정서적 관계들과 같은 모든 영역을 착취하고 있다. 삶 자체가 노동에 처해졌다.


오늘날 자본가는 현장에서 저 멀리 축출되었고, 노동자들은 더욱 자율적으로 부를 생산하고 있다. 자본가는 이윤이 아니라 지대를 통해서 부를 축적한다. 이러한 지대는 대개 금융의 형태를 취하고 금융 수단들이 이것을 보증한다. 바로 여기가 생산 관계와 착취를 통제하고 유지하는 무기로서 채무가 무대로 올라오는 곳이다. 오늘날 착취는 주로, (평등한 혹은 불평등한) 교환이 아니라 빚에 기초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구의 99%가 1%에게 종속되어 있다(노동해야하고, 돈을 갚아야 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있다.


빚은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모호하게 만들지만 그들의 종속을 분명하게 한다. ... 빚진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하여, 삶의 모든 시간을 팔아야만 한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빚에 종속된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들에게조차 생산자가 아니라 주로 소비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물론 그들은 생산을 하긴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소비하기 때문에 책임을 지는, 빚을 갚기 위해서 일한다. 평등한 교환의 신화와는 대조적으로,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 위에서 보편적 불평등을 드러내는 장점을 갖는다. 


삶에 대한 금융의 통제 안에서 모든 것이 잿빛으로 스러져 간다. 가난한 자의 새로운 형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형상은 실업자, 비정규직, 시간제 노동자를 포함한 불안정한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안정된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과 이른바 중간계급의 빈곤한 층까지 포함한다. 그들의 빈곤은 주로 빚의 사슬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오늘날 계속 증가하는 채무의 일반성은 과거를 환기하는 노예관계로의 회귀를 나타낸다. 



55p 미디어된 사람들

이전 시대에, 미디어와 관련하여 볼 때, 사람들이 정보나 자신들의 견해를 소통하고 표현할 수단에 충분히 접근할 수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정치적 행동이 종종 억눌린 것으로 보였다. 그러한 억압에 대항하는 것은 확실히 중요한 전투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의 미디어된 주체들이 정반대의 문제, 즉 정보, 소통, 그리고 표현의 과잉으로 질식당하며 고통받고 있는 방식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질 들뢰즈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더 이상 사람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그들이 마침내 말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고독과 침묵의 조그만 틈새[공간]들을 제공하는 것에 있다. 억압적 권력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자신을 표현하도록 강요한다. 말할 것이 없다는 것,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왜냐하면 단지 그때에만 희소한 것, 훨씬 더 희소한 것, 즉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표현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억압적 장치들(혹은 해방의 기획들)에서 정보와 소통의 중요성은 노동하는 실천들과 경제적 생산이 점점 더 미디어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고조된다. ... 당신은 어디를 가든지 여전히 일을 하고 있음을 곧 깨닫게 된다. 미디어됨 mediatization은 노동과 삶 사이의 구분을 점차 모호하게 만드는 주요한 요소다. 


따라서 그러한 노동자들은 소외되었다기 보다는 차라리 미디어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소외된 노동자의 의식은 분리되거나 분할되는 반면에, 미디어된 사람들의 의식은 웹으로 흡수되거나 병합된다. ... 미디어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능동적인 것도 수동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끊임없이 주의에 몰두하는 주체성이다. ... 인간의 생산성이 빚진 사람들의 형상으로 특징지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디어된 사람들의 형상에는, 신비화되고 잠재력이 박탈된 인간의 지성이 거주한다. 아니 오히려 미디어된 사람들은, 살아 있는 정보를 생산하는 우리의 역량을 질식시키는, 죽은 정보로 가득 차 있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있고, 농민들에게는 없는 가장 중요한 소통은, 공장에서의 물리적 신체적 함께-있음 being togegher 에서 일어난다. 계급은, 그리고 정치적 행동의 기초들은 정보나 심지어 사상의 유통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리적 인접성을 요구하는 정치적 정동들의 구성을 통해서 형성된다. 

2011년의 야영과 점거가 이러한 소통의 진실을 다시 발견했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터넷 그리고 다른 종류의 소통 기제들은 유용하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집단 정치 지성과 행동의 기초가 되는 신체적 소통과 신체들의 함께-있음을 대체할 수는 없다. ... 점거는 일종의 해프닝이고, 정치적 정동을 생성하는 퍼포먼스다. 


당신이 처한 상황, 당신의 열망들 그리고 당신의 욕망들에 대한 복잡다단한 서술이 사회적 미디어의 전형적 질문들로 축약되었다. '지금 어디에 있니?", "뭐하고 있어?" 등으로 말이다. 친구 관계의 습관과 실천들이 "친구맺기"라는 온라인 절차 속에서 희석되었다. 점거에 대한 놀라울 만큼 광범위한 지지는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중간계급들과 전통적 좌파들이, 그들도 역시 고통받고 있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그 운동들이 달려들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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