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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제국주의가 19세기 말 자본의 수출로 특징지어진 금융자본의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융자본이란 대부자본(은행)이 독점적인 산업자본과 유착한 형태이고, 이것은 형식으로서 중상주의 단계에 있었다. 또한 제국주의는 중상주의(절대주의 왕권) 시대부터 존재했다. ... 제국주의 단계를 자유주의 단계의 변질로서가 아니라 자유주의 단계에 의해 '억압된 것의 회귀'로 보아야 한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데올로기는 지금도 살아 있다. 그러므로 그것에 반한 것이 일어나면 뭔가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표상된다. 근년의 예를 말하자면,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사태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근면한 생산과 공정한 교환을 잊고 '상인자본적' 투기로 내달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본주의의 변질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아래 있는 모든 국민은 주기적으로 생산 과정의 매개 없이 돈벌이를 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마르크스, 자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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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증여의 호혜제 | 농업 공동체의 내부 | 네이션 | 우애 |
2 | 수탈과 재분배 | 봉건 국가 | 국가 | 평등 |
3 | 화폐에 의한 교환 | 도시 | 자본(시장경제) | 자유 |
4 | 어소시에시션 | 어소시에시션 | 어소시에시션 | 어소시에시션 |
네이션은 오성적인(홉스적인) 국가와 달리, 농업 공동체에 뿌리를 둔 상호부조적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네이션은 농업공동체가 그러한 것처럼 다른 네이션에 대해 배타적이다. 그러나 이러게 말하는 것은 단지 내셔널리즘을 감정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 관계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니체는 독일어로 죄의식(Schuld)이 경제적인 부채(Schuld)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그 경우 이 부채는 사람들이 증여에 대해 지는 부담감이다. 바꿔 말하면 이런 종류의 감정 밑바탕에는 교환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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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제 화폐 경제는 자율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전체 생산을 뒤덮으려고 해도 결국 부분적이고 기생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스스로가 만들어낼 수 없는 것, 임의로 처리할 수 없는 '외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즉 토지(광의의 자연 환경)와 노동력 상품의 담당자인 인간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국가와 네이션이 관련된다. 자본제 시장경제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재생산'에 관해 네이션=스테이트의 개입이 없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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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소시에이션은 윤리적-경제적 관계의 형태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1860년대에 마르크스도 코뮤니즘을, '어소시에시션의 어소시에이션'이 자본/국가/공동체를 대신한다는 데서 찾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가 급속하게 사라진 것은 단지 파리코뮌의 좌절 때문이 아니다. 하물며 마르크스가 바쿠닌파를 제1인터내셔널에서 쫓아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1860년대에 독일, 미국, 프랑스 등에서 진행된 중공업 발전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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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은 자본제 경제를 '자연사적 입장', 즉 '이론적인' 시점에서 본 것이다. 거기에 주체 차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우노 고조가 자본론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 것은 공황의 필연성이지 혁명의 필연성은 아니며, 혁명을 '실천적인' 문제라고 본 것은 옳다. 하지만 이 '실천적'이라는 것은 오히려 칸트적 의미에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본의 운동에 대항하는 운동은 '도덕적'인 것이다. 자본의 운동이 불러일으키는 착취, 소외, 불평등, 환경 파괴, 여성차별 등에 대항하는 운동은 '도덕적'이다. 한편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개개인의 '책임'을 괄호에 넣고 있는데, 그것은 도덕적인 차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도덕적인 것을 계기로 하고 있고, 마르크스 자신도 그랬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마르크스는 '경제 범주'를 무시하고 생각할 수 있는 도덕적 운동이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물론 경제범주란 화폐와 상품 또는 생산물들을 화폐나 상품이게 하는 가치형태를 말한다. ...
화폐 경제에서 판매와 구매, 또는 생산과 소비는 분리되어 있다. 이 분리는 노동자와 소비자를 분리시키고 마치 기업과 소비자가 경제 주체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노동운동과 소비자운동을 분리시킨다. 노동운동이 형해화함에 따라 소비자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활성화되었다. 그것은 환경보호, 페미니즘, 마이노리티운동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시민운동'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고, 노동운동과 연결을 갖지 않거나 부정적이다. 그러나 소비자운동은 사실 입장을 바꾼 노동자운동이며, 그런 한에서 중요하다. 반대로 노동운동은 소비자의 운동인 한에서 그 국지적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재생산인 소비 과정은 육아, 교육, 오락, 지역 활동을 포함해 광범위하게 걸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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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가치는 생산 과정만으로는 실현되지 않으며 '사회적' 총자본으로서만 실현된다. 이것은 잉여가치가 전지구적으로만 실현되는 이상 그것을 전폐시키는 운동이 초국가적(transnational)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기업이나 개별적인 한 나라 안의 총자본에 대한 투쟁은 단지 자본제 경제의 일환에 지나지 않게 된다. 노동자는 기업이나 국가 사이에서 서로 분단되어 있다. 그들의 이해는 개별자본의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 분명히 선진국의 노동자나 농민은 착취당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들은 국가(총자본)에 의해 이러저러한 재분배를 받고 있으며, 그 재분배를 통해 다른 나라의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점을 고집하는 한, 노동자운동은 국가로 분단되고 더욱 강력한 국가 권력에 의한 통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본의 운동이 전지구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을 조직할 때, 그것에 따르면서도 역전하는 계기는 그 자체 안에 즉 유통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 환경문제나 마이노리티 문제를 포함하여 소비자 운동은 '도덕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정한 성공을 거두어 왔던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는 불매운동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도덕적인 운동이 성공하는 것은 단지 도덕성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품과 화폐라는 비대칭적인 관계 자체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과 소비자운동의 결합을 모색해야 한다. 더욱이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연대와 달리 그것 자체가 새로운 운동이어야 한다.
... 자본과 국가에 대한 대항운동은 단순한 노동자 혹은 소비자 운동이 아니라 초국가적인 '소비자로서의 노동자'운동이어야 한다.
... 세계 시장으로부터 자기를 격리하고 국가주의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이제 없다. 그렇다면 이제 대항할 방법이 없는 것일까?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유일한 방법은 지역 통화에 의한 유통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아래서 생산-소비 협동조합을 조직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선진국의 생산-소비 협동조합과 연결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비자본주의적 교역이고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는 네트워크에 의한 교역이다. 선진 자본주의국가에서의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에 대한 대항운동은 한 나라의 범위로 한정될 수 없다. 그것은 개발도상국을 무시하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 정치적 총파업과 봉기 대신에 노동자가 평소대로 일하고 또 자본제의 생산물-어떤 나라의 것이든-을 사지 않는 운동을 했다고 한다면 어땠을까. 이를테면 이러한 총보이콧(Genral Boycott)이 제2인터내셔널 아래 각국에서 동시에 행해졌다면, 자본이나 국가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불과 10퍼센트의 보이콧도 자본에는 치명적이다. 자본이나 국가는 노동자의 총파업이나 무장봉기를 억제할 수 있지만, 불매운동을 억제할 수는 결코 없다. 그것이 바로 '비폭력 대항'이다. 이것을 위해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고한 계급의식'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애초에 타인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정치 조직은 그 자체가 (국가) 권력인 것이다.
... 마르크스가 말한대로 자본의 운동은, 잉여가치가 없어지면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잉여가치를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 첫번째 방법은 G-W-G' 라는 회로 밖에 있는 생산과 소비의 형태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산-소비 협동조합이다. 이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마르크스)에는 임노동(노동력상품)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자본으로 전화하지 않는 화폐, 즉 이자를 갖지 않는 화폐에 기초한 지불결제수단 시스템이나 자금조달시스템이 형성되어야 한다.
... 자본론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율배반이다. "화폐가 없으면 안된다"와 "화폐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화폐를 '지양'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이 두 요구를 충족시키는 화폐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마르크스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노동화폐나 교환은행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것은 프루동이 노동가치설에 기초해 노동시간을 화폐로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근본적인 무지가 있었다. 노동가치는 화폐에 의한 교환을 통해 사후에 사회적으로 규제된다. 즉 가치 실체로서의 사회적 노동 시간은 화폐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지, 그것이 화폐를 대신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화폐는 암묵적으로 시장가격에 의거하고, 만일 그것을 인위적으로 규제하려고 하면 시장 가격과의 차액만큼 화폐와 교환된다. 따라서 화폐를 지양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본으로 전화하지 않는 화폐의 가능성을 마르크스가 부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 하나는 네그리가 말한 것처럼 "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노동력을 팔지 말라"(자본제 아래서 임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를 이루지 못한다. 또 하나는 "자본제 생산물을 사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노동자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장에서 행해진다. 그렇더라도 노동자(소비자)에게 '일하지 않는 것'과 '사지 않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하며 살 수 있는 또 다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생산-소비 협동조합이나 LETS 등의 어소시에이션밖에 없다. 이리하여 비자본제적 생산-소비 협동조합이나 지역 통화의 존재는 자본제 경제 안쪽에서 일어나는 투쟁을 지지한다. 그와 동시에 후자의 불매(不賣)-불매(不買) 운동은 자본제 기업을 생산 협동조합으로 재편성해가는 것을 재촉할 것이다. 자본과 국가에 대한 내재적인 투쟁과 초출적 투쟁은 유통 과정, 즉 소비자-노동자의 장에서만 연결된다. 왜냐하면 이 장에서만 개개인 주체가 되는 계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소시에이션이란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주체성에 기초하는 것인데, 이 유통과정을 축으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 우리가 말하는 비폭력은 예를들어 간디에게서 보이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시민불복종'으로 환원해서는 안된다. 예컨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국 제품의 불매 운동만이 아니라 동시에 생산-소비 협동조합을 육성하려고 한 간디의 대항운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이 없다면 보이콧은 그람시가 말하는 진지전이 될 수없다. 또 이러한 비자본주의적 협동조합으로의 지향이 없다면 단지 자국의 자본을 방어하는 내셔널리즘 운동밖에 안된다.
... 폴라니는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암에 비유했다. 그것은 농업 공동체나 봉건국가 '사이'에서 시작되었고, 결국 내부로 침입해서 그것들을 스스로에 맞춰 다시 만들었지만 여전히 기생적인 존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자(소비자)의 초국가적인 네트워크는 자본과 국가라는 암에 생기는 대항암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은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가능하게 한 조건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유통의 장을 거점으로 한 내재적 또는 초출적 대항운동은 완전히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이어서, 어떠한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도 손을 댈 수가 없다. 자본론은 그것에 논리적 근거를 부여한다. 그것은 가치형태에서의 비대칭관계(상품과 화폐)가 자본을 낳지만, 동시에 거기에 그것을 종식시키는 '전위(Transposition)적인' 모멘트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자본주의에 대한 트랜스크리틱이다.
... 국가를 '지양'하는 운동은 자본이나 국가 또는 네이션의 교환원리와는 다른 것으로서 어소시에이션, 그리고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을 서서히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경우 이 운동은 달성해야 할 것을 스스로 실현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소시에이션은 국가 권력을 장악한 후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국가를 대신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국가를 '지양'한다는 것은 일종의 국가(사회적 국가)를 형성하는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대항 운동은 일면으로는 국가와 비슷해야 한다. 즉 '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될 수 없고, 기껏해야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 안에서 국소적으로 반항하는 작은 운동 또는 미적 운동밖에 되지 않는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한 후 현저해진 것이 그러한 경향이다. ... 이미 아나키즘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운동들은 기본적으로 아나키즘의 부활이고, 동시에 일찍이 아나키즘이 가졌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즉 '중심화'를 극도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분산화하고 분열되며, 결국 사회민주주의적인 정당으로 수렴되게 된다.
... 대항 운동이 출발하는 것은 개인으로부터이다. 그러나 추상적인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에 놓인 개인이다. 개인은 젠더나 섹슈얼리티, 에스닉, 계급, 지역, 기타 다양한 관심의 차원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대항운동은 각각 차원의 자립성을 인정하면서, 따라서 또 개인의 다중적 소속을 인정하면서, 그것들 다수 차원을 종합하는 세미라티스(Semilatice)형 시스템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은 트리형의 조직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심'을 가지 않으면 고립되고 이산하며 대립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 경우, 중심이 단지 초월론적 통각 X로 있을 뿐이므로 '중심화'를 두려워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각 차원의 대표로 구성되는 중앙평의회에 의해 종합된다. 그 경우 그것들의 대표 선출에서는 선거만이 아니라 제비뽑기가 도입되어야 한다. 그것에 의해 중심이 있음과 동시에 중심이 없는 조직이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