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의 늪에서 ‘커먼즈’의 바다로 – 자본의 바깥을 항해하는 실천적 이론서

빈고게시판

노회찬재단에서 펴내는 계간웹진 <평등과공정> 4호에 <자본의 바깥> 서평이 실렸습니다.

원문보기 : https://hcroh.imweb.me/all-attention/?bmode=view&idx=170498571

부채의 늪에서 ‘커먼즈’의 바다로 – 자본의 바깥을 항해하는 실천적 이론서
: 『자본의 바깥 – 커먼즈은행 빈고의 탈자본 금융생활 탐구』, 김지음·빈고

 

한영섭 금융과 미래 독립활동연구자

 

주류 금융의 화려한 성과급, 그 이면의 수탈 구조

매년 연말이면 주류 금융권은 ‘역대급 이자 수익’과 수조 원대 성과급 잔치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이 화려한 숫자의 실체는 철저하게 설계된 ‘신용의 계급화’를 통해 시민의 미래 소득을 약탈한 결과다. 주류 금융은 담보가 있고 신용이 높은 이들에게는 저리의 혜택을 주지만, 삶의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는 가차 없이 높은 가산금리를 부과한다. 위험을 분산한다는 명목하에 가난한 이들에게 더 많은 비용을 전가하는 ‘가난을 파는 비즈니스’가 오늘날 주류 금융의 본질이다.

필자는 청년연대은행 토닥과 빚쟁이유니온 등의 활동을 통해, 은행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담보로 수익을 극대화하는지 목격해 왔다. 주류 금융이 설계한 톱니바퀴는 한 번 부채의 늪에 빠진 이들을 결코 놓아주지 않는다. 그들은 신용을 점수화하여 인간의 등급을 매기고, 그 등급에 따라 생존의 비용을 차등 적용한다. 이것은 정당한 경제 활동이라기보다는 고립된 개인들을 향한 조직적인 수탈에 가깝다.

정부 서민금융의 기만 : 17.9%라는 서민금융?

더 심각한 것은 주류 금융의 약탈성을 보완해야 할 국가마저 그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내놓은 ‘햇살론15’나 최저신용자 특례보증 상품의 금리는 연 17.9%였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조금씩 낮아져 지금은 12.5%로 낮아졌다. 시민단체에서 이자율이 높다고 낮춰야 한다고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서민금융진흥원에서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더 낮출 수 없다고 하던 금리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어느날 12.5%로 낮아졌다. 누군가 마술을 부리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제도권 금융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명분이지만, 실상 국가가 나서서 법정 최고금리에 육박하는 고금리를 정당화해왔던 것이다.

빈집에서 빈고로 : 삶이 금융을 조직하다

이러한 절망적인 금융 현실 속에서 저자 김지음과 빈고가 걸어온 길은 우리에게 금융의 본질을 다시 묻게 한다. 저자는 스스로를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 책 『자본의 바깥』이 보여주는 사유는 명확하다. 빈고는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기구가 아니다. 빈고가 있기 전, 해방촌에는 ‘빈집’이 있었고 그곳을 일구는 ‘빈마을’ 공동체가 있었다.

은행의 본질은 화려한 빌딩이나 전산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 그 자체에 있다. 자본주의 은행이 개인을 고립시켜 부채를 지게 만든다면, 빈고는 터전을 공유함으로써 부채의 필요성을 줄인다. 자본의 소유권에 저항하며 ‘누구나 머물 수 있는 공유지’를 만들려 했던 실천이 먼저였고, 그 터전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서 금융을 확장시킨 것이다. 금융이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금융을 도구로 부리는 금융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자를 사양함으로써 확장되는 커먼즈(Commons)

빈고 운영의 핵심은 ‘이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자본주의 금융에서 이자는 자본 증식의 핵심 동력이지만, 빈고는 이를 거부한다. 대신 이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지구분담금’과 ‘공유지’라는 개념을 세웠다. 조합원들이 이자를 사양함으로써 발생하는 잉여는 개인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대신, 공동체의 공간을 확보하거나 사회적 활동을 지원하는 ‘커먼즈’를 넓히는 데 쓰인다. 즉, 개인들의 자산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공유지의 넓이’를 키우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중력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의 기반을 스스로 만드는 ‘탈자본 금융’의 구체적인 경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과 빈고의 실천이 지닌 가장 독보적인 가치는 칼 마르크스, 칼 폴라니, 가라타니 고진의 사유를 해방촌이라는 지상 위에서 발전시켜, 이른바 ‘금융 커먼즈(Financial Commons) 이론’을 정립했다는 데 있다. 저자들은 이를 ‘함께 살기 게임’이라는 틀로 설명하며, 네 가지 핵심 가치를 금융의 동학으로 발전시킨다.

<그림> 함께 살기 게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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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본의 바깥, 2025

 

 우애의 방식(Friendship)에 따르면, 금융은 본래 서로의 삶을 돌보는 상호 부조에서 시작되었다. 익명의 신용 등급 대신 ‘우애’를 담보로 돈을 흐르게 한다. 이는 가족관계와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 유지된다. 두 번째는평등의 방식(Equality)인데 분배의 원리에 따라 자원을 배분한다. 이는 강력한 국가에 의해서 통제되고 절대적인 권력 관계에 의존하게 된다. 세 번째인자유의 방식(Freedom)은 자유시장의 원리를 토대로 자본의 크기에 따라 채권-채무자 관계로 이루어진 세계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금융자본주의 모델이라 하겠다. 마지막은공유 방식(Commons)으로, 이자를 거부하고 ‘지구분담금’을 쌓는 행위는 사적 축적을 멈추고 공통의 부(Commons)를 넓히는 과정이다.

탈금융자본의 출구 : 금융 커먼즈라는 설계도

저자들은 이러한 네 가지 방식을 통해 자본주의적 금융 시스템으로부터의 ‘출구’를 설계했다. 이는 단순한 사고 실험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이윤 동기를 ‘커먼즈의 풍요’로 치환함으로써, 탈자본 및 탈금융자본의 구체적인 경로를 만든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이념적으로 제시했던 ‘교환양식 D’가 빈고의 장부와 규약을 통해 실재하는 금융 동학으로 정립된 순간이다. 이들은 연구자가 아니라고 겸손해하지만, 실상 마르크스의 화폐 형태론을 넘는 새로운 가치 순환의 실천적·이론적 토대를 닦았다. 이는 자본주의 이후의 경제 양식을 상상하는 이들에게 가장 구체적인 이론적 무기를 제공한다.

상업 보험을 넘어선 실천, ‘건강보험계’

책에서 소개된 ‘건강보험계’ 실험은 특히 고무적이다. 거대 상업보험사의 실손보험이 시민의 불안을 매개로 막대한 이윤을 챙길 때, 빈고는 공동체가 서로의 질병과 사고를 돌보는 ‘계’의 형식을 부활시켰다. 이는 의료와 돌봄을 자본의 상품이 아닌 공유재로 되돌리려는 역사적 실천이다. 주류 금융과 보험사로 흘러가는 자본의 흐름을 차단하고, 공동체의 안전망을 스스로 구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노회찬 의원이 강조했던 평등과 공정의 가치를 경제적 실질로 치환하는 과정이다.

노동의 눈으로 본 금융의 재설계

필자가 노동공제연합 ‘풀빵’을 통해 실천하고 있는 노동공제 운동의 관점에서, 책이 제안하는 ‘노동자 커먼즈’는 매우 강력한 대안이다. 저자는 민주노총과 같은 거대 조직의 조합원들이 힘을 합친다면, 자본주의 금융에 의존하지 않는 거대한 대항 금융 생태계를 충분히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간 자본이 통제하는 노동의 영역에만 익숙했다. 하지만 이제는 ‘노동이 통제하는 자본’을 현실화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십시일반 모은 자금이 주류 금융의 판돈이 되어 우리를 억압하는 칼날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주거를 해결하고 아픈 동료를 돌보는 ‘커먼즈의 종잣돈’이 되어야 한다. 빈고는 지난 17년의 역사를 통해 이것이 망상이 아닌 실질적인 권력의 이동임을 입증했다.

다시, 평등과 공정의 현장으로

빈고의 실험과 김지음의 기록은 그 결사가 금융이라는 가장 견고한 영역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책의 후반부에 언급된 다양한 탈자본 사례들은 필자에게 무척 반가운 대목이었다. 청년연대은행 토닥부터 지역 자활공제, 무이자은행, 노동자 협동조합들의 분투는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 준다. 해방촌에서 시작된 이 흐름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넘어 더 넓은 공유지 운동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주류 금융의 안쪽에서 조금 더 유리한 등급을 얻기 위해 줄을 설 것인가, 아니면 ‘자본의 바깥’에서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커먼즈를 건설할 것인가. 필자는 이제 이 책을 지침 삼아 다시 현장으로 간다. 빚이 아닌 연대가 흐르는 노동자 커먼즈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다. 이 글을 읽고 공유하는 여러분은 이미 저자들이 말하는 공유자다. 끝으로 저자들의 말로 마무리 한다. “우리는 그렇게 공유지를 만들고, 가꾸고, 누리고, 남기고 떠난 평범하지만 위대한 공유자로 영구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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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섭 금융과 미래 독립활동연구자

대기업 다니던 중 돈의 굴레에 갇힌 사회의 모순을 목격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활동가의 길을 걸었다. 생명보험회사 재무설계사로 일하며 주류 금융의 약탈성을 체감했고, 공공기관 금융복지상담사로 활동하며 부채 문제의 사회적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청년연대은행 토닥 이사와 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 사회적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청년 금융 자조 운동에 함께했고, 빚쟁이유니온 등 활동을 통해 채무자 인권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최근에는 노동공제연합 사단법인 풀빵의 사무국장과 정책팀장, 노동공제학습원 부원장을 지내며 노동자 스스로 금융의 주인이 되는 ‘노동공제’ 현장을 만드는데 함께하고 있다. ‘금융주권’과 ‘호혜금융’를 키워드로 약탈적 주류 금융에 대항하는 사회연대금융 체계를 정립하고 있는 독립활동연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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