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연대의 네트워크
“자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그물 밖에서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바란다.”
- 익명의 네티즌, AZDAILYSUN.COM
프롤로그.
‘은퇴의 종말: 노동을 그만둔 삶을 감당할 수 없어질 때’
제목이 섬뜩하다. 이 기사는 2014년 [하퍼스 매거진] 8월호에 실렸다. ‘더 길게 써달라.’ 주변 사람들이 권한다. 글쓴이는 덜컥 받는다. 그 길이 얼마나 길고 험난할지 모른 채. 2017년, 고단한 여정 끝에 책 한 권을 내놓는다. <노마드랜드>. 이 제목 역시 예사롭지 않다. 글쓴이는 저널리스트 ‘제시카 부르더’이다. 그는 “서브컬처와 경제의 어두운 면을 주로 다룬다.”
제시카는 <은퇴의 종말> 기사를 쓰면서 ‘린다 메이’를 만난다. 린다는 집 없이 차에서 살면서 일하는 60대 여성 ‘노마드’이다. 제시카는 대략 2014년부터 3년 가까이 린다의 삶을 뒤쫓는다. 종종 연락하고 만나며 린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다. 린다가 길 위에서 만나는 노마드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도 듣는다.
린다가 길 위에 나서기 전에 찾아보았던 웹사이트, 인터넷 게시판, 블로그, SNS 따위도 뒤져본다. 서부 개척 시대부터 현재까지 미국의 경제사와 생활사에 관한 자료들도 톺아본다. 거기다 밴을 사서 손수 길 위에서 살아본다. 린다와 그의 친구들이 하는 노동도 잠시나마 겪어본다.
제시카는 이 과정을 거쳐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낸다. 그 이야기는 잘 짜인 다큐멘터리 영화 같다. 주인공은 당연히 ‘린다 메이’이다. 린다의 친구들도 조연과 단역으로 출연한다. 린다와 친구들의 이야기는 제시카의 편집에 따라 현재에서 과거로, 다시 미래로… 종횡무진 널뛴다. 그 사이사이에 굴곡진 미국의 역사가 배경으로 깔린다.
배우들의 이야기는 단면이 아니다. 특정한 시점만 잘라서 보여주지 않는다. 길 위에 나서기 전과 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이 겪은 일들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그들의 생각, 감정, 의견도 담아낸다. 이들의 이야기는 린다를 출발점으로 해서 꼬리에 꼬리를 문다. 린다 - 돈 휠러 - 린다 채서 - 밥 애퍼리/애니타 부부 - 데이비드 로더릭 - 척 스타우트 - 필 드필… 마치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추가하는 것 같다.
이것만이 아니다. 아마존, 인력업체, 놀이공원 따위의 구인광고도 건다. 방송사와 각종 인터넷 언론의 뉴스는 물론이고 노마드들의 웹사이트/ 블로그/ 페이스북 따위의 링크도 올라온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 같다. 아니다. 이것은 얽히고설킨 복잡한 네트워크의 집합이다.
‘집도 없이 저임금 노동에 시달릴 64세 여성 린다 메이에게 미래란 어떤 그림일까?’ 제시카는 이 물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울러 린다를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고자 한다. 증거를 찾기 위해 제시카는 린다와 노마드들을 둘러싼 그 복잡한 네트워크에 뛰어든다. 증거를 찾는 과정에서 제시카는 먼저 ‘흑’과 ‘백’밖에 없어 보이는 네트워크를 마주한다.
흑백 네트워크
어떤 네트워크는 노마드의 삶을 아주 깨끗하고 새하얀 공간에 올려놓는다. 린다와 같은 노마드들을 채용하는 기업들은 노마드 노동자들을 ‘워캠퍼’라 칭한다. 그들은 워캠퍼들에게 ‘놀 듯이 일하고, 일하면서 놀자!’고 한다. 언론과 방송은 노마드들이 여행과 스릴, 동료애를 즐긴다고 보도한다. 한편에서는 노마드들이 스스로 만든 온라인 공간과 책에서 이상을 설파한다. ‘더 적게 갖고 행복하게 살자! 차에서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낙오시킨 시스템에 대한 양심적인 문제 제기자들이 되자! 자유와 모험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자!’
반대로 어떤 네트워크는 노마드의 삶을 ‘누아르 영화’처럼 상영한다. 워캠퍼들은 아마존 창고에서 일하기 위해 약물 검사를 받고 금속탐지기와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배송품을 훔치다 체포되고 해고된 워캠퍼들은 아마존 캠퍼포스의 ‘수치의 전당’에 헌액(?)된다. 언론은 늙은 노마드들이 모이는 겨울의 쿼츠사이트를 “쥬라기 트레일러 공원”, “올드 러시” “미국에서 상당히 기괴하고 심하게 미쳐 있는 곳들 중 하나”라 보도한다.(207쪽)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서 배우가 연기한 밴 생활자는 아이들에게 “난 저 밑에 강가에 있는 밴에서 살아! 너희도 밴에서 사는 걸로 끝나고 싶지 않으면 운동을 하라.”고 경고한다.(179쪽) 언론은 노마드들을 ‘징징이’라고 놀리는 한편, 그들을 조롱하고 우스갯거리로 만든다. (270쪽)
노마드들은 ‘밴 강간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사탕을 달라는 놀림을 당한다. 한밤에 낯선 행인들이 밴을 흔들고 욕하면 차 안에 꼭꼭 숨는다. 고금리 대출에 의지하는 자신의 처지를 속상하고 부끄러워한다. 노마드들은 낙인에 익숙하다. 자칭 ‘은퇴자, 여행자, 노마드’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스스로를 ‘타이어 떠돌이, 집시’로 비하하기도 한다. 외부 관찰자들은 ‘대침체기의 오키, 미국인 난민, 돈 많은 홈리스, 현대의 과수원 부랑자’라며 야릇한 별명을 붙인다. (86쪽)
이런 흑과 백의 네트워크가 쏟아내는 말들은 어디에서 나왔나. 웹사이트와 구인 행사 부스에 달린 광고 배너, TV 화면, 신문 기사, 인터넷 웹사이트, 블로그, SNS, 책, 아마존 물류창고 게시판, 미국의 법률과 정책 매뉴얼, 사람들의 농담, 루머 … 이 흑백의 네트워크는 이를테면 ‘가상의 공간(virtual space)’에 얽어놓은 그물이다.
무지갯빛 네트워크
제시카는 이런 흑백의 네트워크에 어리둥절해한다. 그는 흑과 백의 장막을 걷어 문을 열고 노마드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한발 다가가서 본 그들의 삶은 흑과 백이 아니다. 오히려 다채로운 무지갯빛이었다.
노마드들은 한가한 은퇴자가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노동에서 은퇴할 수 없는 자들이다. 빠듯한 사회보장연금으론 집세조차 감당할 수 없다. 노마드들 가운데 노인만 있는 것도 아니다. 20~30대 청년들도 있다. 기계공부터 1년 생활비가 10만 달러였던 IT회사 임원까지 출신도 다양하다. 고학력자도 꽤 있다. (린다는 건축공학 학위를 두 개나 갖고 있다.)
노마드들은 ‘이상주의자’이면서도 ‘현실주의자’이다. 그들은 밴 강간범이나 도둑이 아니다. 차에서 살기 때문에 오히려 범죄에 노출되기 쉽다. 그들은 중독자나 ‘징징이’가 아니다. 충실한 사회인이다. (알코올중독자였던 린다는 24년 동안 술을 끊었다.) 그저 살림이 빠듯하다. 그래서 차에서 사는 것 뿐이다.
길 위에서 팍팍하게 산다. 그 삶을 버티기 위해서다. 혹독한 노동을 견딘다. 그럼에도 투철한 직업윤리를 지킨다. 길 위에서 친구를 만난다. 가족을 만든다. 공유지에서 공동체를 만든다. 공동체 안에서 무엇이든 나눈다. 의미를 찾고 행복을 발견한다.
사회에서 차별받던 그들이다. 그들이 동류 모임 안에서 다른 부류의 노마드들을 배제한다. 흑인에게 ‘깜씨’라고 놀리기도 한다. 미니멀리즘과 반소비주의를 표방하는 반면, 자신들의 사이트에 상품광고 배너를 붙여 수입을 번다. 악마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다. 일할 수 없으면 쓸쓸한 죽음밖에 남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다만 비틀거린다. 묵묵히 걸어간다.
때로는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피터 폭스는 노마드들을 위한 이동 의료팀이나 간이 보건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노년의 밴 생활자들을 위한 비영리 법인을 누군가 설립하면 근사하겠다고도 했다. (351쪽) 라본 앨리스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쓴다.
“부적응자란 패배자나 낙오자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영리하고 인정 많고 열심히 일하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미국인들이었다. 평생 동안 아메리칸드림을 좇은 끝에 그들은 그것이 단지 커다란 하나의 사기극에 불과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247쪽)
제시카는 그들의 삶에서 미묘한 진실과 희망을 발견한다.
“하지만 노마드들 사이에서는 다른 무언가도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보는 대로의 진실은, 사람들은 심지어 가장 혹독하게 영혼을 시험하는 종류의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힘겹게 싸운 동시에 낙천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현실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역경에 직면했을 때 적응하고, 의미를 추구하고, 연대감을 찾으려는 인류의 놀라운 능력을 증명해준다. … 견뎌내려는 우리의 의지를 뒤흔드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별이 빛나는 광활한 하늘 아래 동료 워캠퍼들과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을 때와 같은 공유의 순간들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일은 가능하다. 다시 말해, 내가 몇 달째 인터뷰하고 있던 노마드들은 무력한 희생자들도, 걱정 없는 모험가들도 아니었다. 진실은 훨씬 더 미묘했다.” (271~272쪽)
제시카는 결국 ‘사회’라는 네트워크를 들여다본다. 미국인 수백만 명이 전통적인 중산층으로 사는 일의 불가능성과 씨름한다. 불가능한 선택지들이 불러온 사회 분열을 본다. 이것은 임금 격차가 아니라 하나의 단절이라 말한다. 사회이동의 불가는 ‘사실상 신분제’와 경제성장 둔화를 불러온다. 지니계수를 통해 미국의 지독한 불평등을 가늠한다. 이러한 네트워크 속에서 많은 이들이 중산층에서 내려온다. 이들이 린다가 보여준 ‘코코넛 속의 문어’처럼 ‘차에서 사는 노마드’가 된다.
누가 범인인가
제시카는 노마드들의 과거에서 공통된 숫자 하나를 발견한다. ‘2008’! 2008년? 미국에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진 해이다. 대형 금융회사들의 파산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던 때였다. 채권을 남발한 은행, 채권의 위험성을 몰랐던 신용등급 평가기관, 타이밍을 잘못 맞춘 연방준비제도.(연준) 이 세 주체는 모두 민간 기관이었다. 주범은 금융회사였고 공범은 연준과 신용평가회사들이었다. 이들은 자본의 증식만을 목적으로 하는 미국의 금융자본이다.
주범이었던 금융업체들은 파산 위기에 처하자 정부에 손을 벌린다. ‘우리가 망하면 나라도 망한다. 돈을 달라!’ 조사도 하지 않고 죽은 사람 명의로도 대출을 해줬던 때는 언제고?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대로라면 자업자득으로 망해야 했다. 정부는 그들 일부에게 구제금융을 지원한다.
지원받은 금융사들은 살아남는다. 살아남아서 기뻤는지 금융업계의 경영진들은 보너스 잔치를 벌였다. 정부는 주범인 금융회사들을 구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곧바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정부는 이 사태를 방치했다. 그것도 모자라 뻔한 범인들에게 보너스까지 챙겨줬다. 대단한 조력자다.
“피해는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은행에 자산을 맡기고 주택 할부금을 내고 있던 사람들의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미국에서만 5조 달러가량의 연금, 퇴직금, 저축이 증발했다. 2008년 기준으로 미국 내 주택 중 압류된 주택의 비율은 87퍼센트에 달했고, 사태가 진정되었을 무렵에는 미국인 약 800만 명이 일자리를, 600만 명이 집을 잃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노마드랜드>에 등장하는 노마드들 대부분은 이 시기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다. 전에는 대체로 중산층으로 불렸고,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직장을 얻어 열심히 일을 하면 자신의 노후와 자식들의 미래가 편안할 거라고 믿었던 그들에게 보상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15~416쪽, ‘옮긴이의 말’에서 발췌)
2008년의 경제 붕괴는 ‘대침체’를 불러왔다. 대침체 기간에 빅테크와 플랫폼 기업들은 오히려 ‘대성장’을 이루었다. 이들의 성장은 기존의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쇠락을 부추겼다. 기존산업에 기대던 사람들 상당수가 이때 일자리를 잃거나 사업이 망했다. (택시업계에서 28년 근무한 66세 밴 생활자 피터 폭스는 스스로를 ‘우버에 밀려난 공유경제의 희생자’라고 칭한다.) 이들은 갈 곳을 잃었다. ‘아마존’과 같은 빅테크나 플랫폼 기업들은 이들에게 엄청나게 유연한 노동력을 얻어낸다. 쉽게 말해 언제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인력이다.
노마드들은 중산층에서 밀려나 길 위에 섰다. 기업은 이들을 악랄하게 이용한다. 근무시간을 마음대로 늘렸다가 줄인다. 초과근무 수당도 없다. 수익이 줄면 근무 시간을 깎아댄다. 어떤 고용주들은 물과 전기를 쓸 수 있는 주차장을 제공해준 만큼 무임금 노동을 시킨다. 어떤 데는 숙식 정도만 제공하기도 한다. 고령 노동자들은 더 부려 먹는다. 잘 쉬지도 않고 성실해서다. 심지어 연방 세액 공제 혜택까지 받는다.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고용한 대가로. (임금의 25%~45% 공제) 아마존은 ‘차량 방한 장비 갖추기’ 웹페이지를 제공한다. 차 안에서 추위를 견디는 워캠퍼들에게 친절하게 방한 장비 사용법을 알려준다. 아마존닷컴의 방한 장비 구입 링크를 거는 건 덤이다.
워캠퍼들은 일하다 다치고, 병이 들고, 정전기에 충격을 받고, 열사병에 쓰러진다. (열사병에 쓰러진 이유는 도난 방지를 위해 적재창고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관리자들은 창고 밖에 구급차를 대기시키고 쓰러진 노동자들을 실어 날랐다.) 스캐너 화면 남은 시간에 맞춰 픽업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기계도 말을 듣지 않는다. 관리자들은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꾸지람한다.
퇴근할 때면 땀범벅에 곤죽이 된다. 어떤 날은 씻지도 못하고 출근한다. 수개월에 이르는 야간교대에 지쳐 멍해진다. 자판기에서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진통제로 버틴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만 도맡는다. 심지어 일하다 죽기도 한다. 노동조합 설립에 가담하는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기업들이 노마드 노동자들을 ‘워캠퍼’라 부르는 데는 꿍꿍이가 있다. 캠프장 관리자 알선업체의 “캠핑하면서 돈 벌자!”는 광고문구에 그 단서가 있다. 노마드들을 캠핑을 즐기면서 쉬엄쉬엄 일하는 사람들로 그려야 한다. 그래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
심심해서 소일거리로 일하는 노마드들에게는 최저임금을 안 줘도 된다. 초과근무수당도 필요 없다. 어차피 그들은 근무지에서 차를 대고 캠핑을 하고 있으니까. 워캠퍼들은 물과 전기를 쓸 수 있는 주차장을 내주기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한다.
하루 10시간이 넘고 야간에도 일하는 고된 노동을 가릴 수 있다. 노마드들이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일하다가 다쳐도 캠핑하다가 다친 것으로 위장할 수 있다. (심지어 일하다가 죽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론마저도 노마드 노동자들을 ‘한가하게 캠핑을 즐기는 은퇴자’로 그려주니 더할 나위 없다.
이것은 명백한 ‘노동법 위반’이다. 노동법을 위반한 기업들은 처벌받을까. 마음대로 근무시간을 조정해도, 최저임금과 초과근무수당을 안 줘도,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조치를 하지 않아도 그들은 처벌을 피한다. 받더라도 솜방망이에 그친다. 문제가 생겨도 정부가 방관한다. 시정기관의 조사도 허술하다. 하나 마나 한 시정 명령도 한참 뒤에 내린다. 사법부도 웬만하면 기업의 손을 들어준다. 설사 판결에서 져서 벌금을 낸다손 치자. 그들이 부당하게 벌어들인 수익에 비하면 껌값이다.
되려 정부는 노마드들을 궁지까지 밀어붙인다. 자신들이 방관하여 그들을 길 위에 내몰았음에도. 노마드들을 홈리스로 취급한다. 이상해 보이면 끊임없이 심문한다. 산이든 사막의 공유지든 어디서나 내쫓는다. 지나치게 오래 거주한다 싶으면 가차 없다. 심지어 주(州) 정부들은 이들을 쫓아내려고 법까지 만든다. 엎어진 놈의 꼭뒤를 차는 격이다.
혁명과 연대의 네트워크
왠지 이상한 기시감이 든다. 그렇다. 이것은 2008년 경제 붕괴의 데자뷔이다. 주범이 금융자본에서 기업자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정부가 조력자 역할을 한 것은 똑같다. 이것은 정말 기묘한 네트워크이다. 통탄할 일이다. 사회가 이렇게 저열한 네트워크에 놀아나도 되는 것인가. 이 시스템을 바로잡으려면 어떤 네트워크가 작동해야 할까.
쉬운 대답은 없다. 분명한 것은 2011년에 월가를 점령한 무리들처럼 혁명의 연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1년의 월가 점령은 큰 성과가 없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그 점령이 시스템의 부조리를 들춰냈다. 노마드들은 자신들을 거리로,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로 내몬 공범들에게 맞서 싸워야 한다. 금융자본만이 아니라 자신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정부와 기업도 점거해야 한다. 혁명과 연대의 네트워크를 조직하자. “만국의 노마드들이여, 단결하라!”
에필로그.
노마드들은 홈리스였을까. 그들은 정말 ‘집’에서 안정적으로 사는 삶을 꿈꾸지 않는가. (‘홈리스’라는 낱말은 노마드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이 책의 옮긴이는 그런 질문에 다른 답을 전하며 ‘옮긴이의 말’을 마친다.
“[노마드랜드]가 영화화되어 전 세계의 호평을 받고 있는 2021년 3월 현재, 린다 메이는 전에 애리조나주 더글러스에 사두었던 2만 제곱미터의 땅을 밴 생활자들의 연대인 ‘홈스 온 휠스’에 기부하고, 뉴멕시코주 타오스에 새로 땅을 샀다. 그는 그곳에 온실과 작은 집을 짓고 정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보금자리를 향한 린다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420쪽)
린다의 여정은 어쩌면 혁명과 연대의 네트워크에 남다른 영감을 불어넣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