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무슨 교육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3박 4일의 짐이 든 가방이 무거워서 기차역에서 잠시 어떻게 집에 갈지 고민했다. 다행히 같이 갔던 동료의 지인이 데리러 온다길래 얻어타고 가기로 했다. 운전자는 이 지역 사람이 아니어서 그들의 목적지에 방해가 되지 않는 길에서 세워 달라고 할 참이었다. 집 주소를 불러 달라는 운전자와 가벼운 실랑이를 하다가, 여기서 세워주세요, 금방 걸어갈 수 있어요, 라고 말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걸어서는 가본 적 없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이 언덕을 내려가면 동부시장이고 그리고 집이 나오는데, 생각하면서 걷는데, 길 건너편의 간판 하나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잊지는 말아야지**
간판에 쓰여있을 법한 내용이 아니었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멈춰서 가게를 쳐다보았다. 가게 이름만 적혀있었다면 무슨 가게인지 더 가까이 가서 봤을 텐데, 친절하게도 **철거/벌초**라는 글자와 전화번호가 크게 쓰여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등에 멘 가방이 무겁고 또 지쳐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와 씻으면서도 그 간판이 계속 생각났다. 이미 떠나간 사람이고, 벌써 망가진 건물이지만 잊지는 말아야지, 하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 계속 내 옆에서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날부터 어떤 주문처럼 잊지는 말아야지, 라는 조용한 울림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실적보고서에 쓸 사진을 정리하다가도,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받으며 온기를 느낄 때도, 우회전 횡단보도에서 잠깐 멈춰있을 때도 잊지는 말아야지, 라는 말이 울렸다. 밖에서 어떤 소리로 들리는 게 아니라, 방울 안에 있는 작은 쇠구슬이 이리저리 부딪쳐 소리가 나는 것처럼 잊지는 말아야지, 라는 울림이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울렸다. 처음에는 간판에 너무 감동받아 자꾸 떠오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인생에서 본 최고의 간판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잊지는 말아야지, 라고 해야지,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된다.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틈이 주어 지면 어김없이 잊지는 말아야지, 로 가득 채워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혹시 내가 미쳐가는 건가.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걸까. 간다면 어디로? 정신과? 이비인후과? 잊지는 말아야지, 잊지는 말아야지, 잊지는 말아야지, 잊지는 말아야지, 잊지는 말아야지, 잊지는 말아야지, 잊지는 말아야지,……… 그런데 대체 뭘?
왜 그렇게 넋이 나갔어. 무슨 일 있어?
피곤해서 그래.
일상이 흐트러진다. 분명 내가 잊어버린 게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순 없다, 라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체 내가 잊어버린 게 뭘까. 잊지는 말아야지 가게 사장님을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방법을 함께 고민해 달라고 해볼까. 아니면 당신 가게 간판 이름 때문에 내가 고통받고 있다고 따져야 하는 걸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동안 그 조용하고 가득찬 울림에 시달리다, 내가 잊어버린 것들 적어보기로 했다.
기억나지 않는 수학 공식들, 스페어키의 위치, 초등학교 때 일기장에 적은 당시의 괴로움들, 스무 살의 버킷리스트, 했어야했던 수많은 연락들, 밤새며 읽었던 판타지 소설의 내용들, 언젠가 잠시 함께 살았거나 밤을 새우며 이야기 나누던 사람들의 이름들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두서없이 적다 보니 목록의 기준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네이버 국어사전에 나온 ‘잊다, 잊어버리다’ 동사의 5가지 쓰임으로 정했다.
1. 한번 알았던 것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거나 전혀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
2. 기억해야 할 것을 한순간 전혀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
3. 일하거나 살아가는 데 장애가 되는 어려움이나 고통, 또는 좋지 않은 지난 일을 전혀 마음속에 두거나 신경 쓰지 않은 것
4. 본분이나 은혜 따위를 마음에 새겨 두지 않고 아주 저버린 것
5. 어떤 일에 열중한 나머지 잠이나 끼니 따위를 제대로 취하지 않은 것
이제 이 다섯 가지 기준에 맞춰서 잊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정리하자, 하고 삶의 모든 기록을 뒤져보기로 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어떤 영화의 대사는 사실이다. 기억이 없으니 기록에 의지해 잊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야 했다. 이상하게도 생각을 여기까지 마치고 목록을 정리하는 동안은 잊지는 말아야지, 가 울리지 않았다. 목록을 완성하고 나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그동안 적어 온 일기장, 수첩, 다이어리, 공책을 포함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디지털 기록들까지 죄다 찾아내야 한다. 28권의 다이어리와 41권의 일기장, 13권의 수첩과 18권의 공책 속에서, 싸이월드와 블로그, 인스타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등에서 내가 잊어버린 것들을 전부 찾아볼 작정이다. 이젠 누군가를 볼 때도 저 사람이 잊어버린 건 뭘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잊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정리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